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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도이 노부히로 감독, 이토 아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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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불수능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등급컷은 작년보다 더 오른단다. 언론에서도 고교 과정에 배우지 않은 이론들이 국어영역 비문학에 대거 출제됐다고 호들갑이다. 경제학에서 ‘오버슈팅 이론’이 출제되어 7년차 한국은행원도 6문제 중 2문제를 틀렸다고.

 

 

사실 수능에서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수준의 지문들이 출제되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평이나 평가원에서 연중 몇 차례 실시하는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역시 대개가 대학 학부 교양서나 교과서에서 출제되고 있다고 한다.

 

 

학원을 운영하는 한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역대 수능에서 수험생들을 소위 멘붕에 빠뜨리게 했던 지문들은 모두가 대학 학부 수준에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들이라고. 그레고리력을 다룬 지문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출제된 지문 그리고 채권과 이자율의 관계를 다룬 지문들이 소위 역대급 난도를 자랑했다나 뭐라나.

 

 

어느 정도 어렵길래 ‘역대급’운운 하나해서 살펴보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이걸 정말 시간 내에 풀라는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고교생 대부분은 고교 수업 과정 중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론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대학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적성시험일지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능 만점자들이 복수로 나온다는 사실에 이르면 저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올해도 여전히 만점자가 여럿 나오겠지. 신문에 보니, 가채점 결과 만점자가 9명에 이른다니, 열심히 공부한 일반 고교생들이 자괴감이 들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올해 수능에서도 어김없이 수험 무용담의 신화는 반복되겠지. ‘만년 꼴지가 1년 만에 명문대에 입성하다’, ‘학원과 과외 수업도 듣지 않고 만점을 받은 아무개’, ‘지체부자유로 당당히 일류대에 합격한 아무개’ 등등.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는 날 이런 기사는 우리 모두가 심심찮게 보아온 언론의 헤드라인 뉴스다.

 

 

일본에서도 이런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나 보다. 포항 지진 여파로 수능이 일주일로 연기된 바로 그 시점에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수능 시즌을 맞아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취지로 케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 준 영화였다. 타이틀은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전교 꼴찌의 문제 소녀가 약 1년 반 만에 명문 게이오대 정책학부에 합격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게 실화라는 게 꽤 놀랍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무용담을 접해 봤기에 내겐 좀 약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상평을 찾아보면 본 사람들의 인생영화라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수험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학교 담임 선생에게 ‘쓰레기’라고 불려지고, 저 쓰레기가 게이오대에 붙으면 내가 발가벗고 물구나무 서 있겠다는 약속을 반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할 정도면 소위 ‘구제불능’의 문제아란 소리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가? 문제아 중 일부는 천재라는 사실을. 문제아 중에 과학자나 불세출의 배우 또는 스포츠 스타가 탄생하는 걸 우리가 숱하게 목도했었다. 태도가 불량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쓰레기는 아닌 거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95%의 확률로 확신할 수 있다. 반 꼴등의 저 아이가 연대에 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이건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왜? 중학교 수준의 영어나 수학도 안 되는 저 아이가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니까.

 

 

다시 영화 얘길 해 보자. <불량소녀>의 주인공 사야카(아리무라 카스미 역)는 놀기 좋아하는 4차원 고교 2년생. 초등학교 때 친구를 못 사귀어 왕따를 당한 경험으로 인해 중학교 이후 친구가 인생의 제1의 목표가 됐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친구로 대해 준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인생의 낙. 성적은 꼴찌라도 매일이 행복한 소녀.

 

 

고교 2학년 여름방학. 이제 슬슬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 사야카는 어머니의 권유로 문제아들을 대학에 보내주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사야카의 실력이 드러난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테스트를 모두 0점으로 돌파한다. 놀라운 건 모든 문제의 답을 채웠다는 거. 물론 오답으로.

 

 

근데 그 오답을 쓴 이유가 기발하다. strong의 뜻을 ‘이야기가 길다’로 알고, story가 long하다고 설명한다. 성덕태자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뚱뚱한 여자라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불쌍하다고(‘쇼토쿠’를 '세이토쿠타코'로 읽음. 일본어 한자 태(太)는 의미가 뚱뚱하다).

 

 

학원 선생 츠보타(이토 아츠시 역)는 이런 기상천외한 답을 말하는 사야카에게 ‘발상이 천재급’이라고 칭찬한다. 일본이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4방위 표시 기호도 모르는 이 ‘비리갸루’ 사야카에게 학원 선생은 가능성을 본다.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는 것으로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사야카에게 장난반 진심반으로 게이오대를 추천한다.

 

멋진 남자가 많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인상으로 게이오를 선택한 사야카는 이후 누구나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로 명문 게이오에 합격한다. 중간 중간 가족사에 대한 짠한 얘기가 나오긴 하는데, 이는 모두 아는 것처럼 성공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같은 야그다.

 

 

어쨌거나 비루갸루 사야카는 명문대생이 된다. 이 뻔한 무용담이 재밌냐고? 물론 난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우연히 봤다. 근데, 감독이 진짜 영화를 기막히게 연출했다. 뻔하디 뻔한 야그를 아주 재미있게 본 것이다. 그것도 2번씩이나 봤다. 이런 영화를 흡입력 있게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데,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매우 수완이 좋은 감독인 듯하다.

 

 

소재는 B급이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몰입해서 볼 수 있다. 근데, 이런 무용담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난 영화를 보고 낄낄거린 후에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다. 왜 우린 이런 무용담을 미덕으로 삼아 노오력을 강요받아야 하는 걸까? 과연 노력한다고 사야카 같은 학생이 탄생하기는 하는 걸까?

 

 

물론 앞에서 살짝 얘기했다시피 난 이 실화가 별루였다. 왜냐하면 고3시절 <아! 서울대학>이라는 대학합격 수기 책에 안호상이라는 인물의 무용담을 이미 봤기에 그렇다. 이 사람은 내가 여태껏 본 수험 무용담에 있어서 최고봉에 있는 두 명 중 한명이다. (다른 한 사람은 사법시험을 최단기간에 합격한 김선수; 300명 미만 뽑을 당시 김선수 씨는 18개월만에 합격했다)

 

 

이 사람은 학창 시절 내내 불량배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성적은 전교 뒤에서 3등. 학력 수준은 초등수준. 고교 중퇴자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학력고사에 이르기까지 안호상 씨가 보여준 무용담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갸루 사야카보다 안호상이 훨씬 대단한 것은 그가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데 있다. 어느 누구도 조언해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야카의 성공은 그녀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가족과 츠보타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사야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츠보타 선생이 없었다면 단연코 사야카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런 도움 없이 스스로 모든 역경을 이긴 게 무용담으로써는 훨씬 가치가 높지 않을까. 그래서 사야카의 입시 성공을 담은 영화가 약간 별루였다. 츠보타가 없었다면 게이오 합격은 없었기에.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렇다.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알고 응원해주면, 낙오자가 되는 학생들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거. 이 영화의 방점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가능성만을 가지고서도 그 학생을 믿고 응원을 보내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게 공교육이 목표로 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무용담이 회자되고 권할만한 덕목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난 적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회 구조 하에서는 끊임없이 경쟁을 이어 나가야 하는 삶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는 채용 시험(공무원 공채 시험 포함)으로 승진 시험으로 그리고 자격증 시험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시험들의 본질은 선발 인원 안에 내가 들어가야 성공이다. 남을 제칠 수 없다면 내가 실패하는 구조다. 모든 수험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식은 응시자들을 등수로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능과 고시로 대변되는 지필시험이 공정할 수 있는 시험이긴 하지만 사회의 건전성 면에서 보면 권할만한 선발 제도는 아니다.

 

 

수험 무용담 뒤에 숨어 있는 주입식 교육의 획일화는 현대 사회가 탈피해야 하는 근대의 마지막 부산물이기에. 수많은 시간을 암기와 문제 풀이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시험이 진정한 교육제도일 거다. 배우는 게 재미있고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시험, 개인에게 특화된 시험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교육의 시발점이자 목표일 것이다.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지만, 가능성만을 보고 학생을 응원하는 사회는 이보다 나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불량소녀>가 현 입시 시스템 자체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츠보타와 같은 선생이 불량한 사야카와 같은 학생에게서도 가능성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획일화 된 시험 점수로 서열화하는 입시 제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누구도 현행 수능 제도가 우리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교육과 입시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단 번에 바꿀 수도 또 바뀌어 질 수도 없을 거다. 그 과도기적 모델이 필요한데, 이 영화가 그 지점을 충분히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획일화된 교육제도에서는 누구나 경쟁에 밀려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 실패자로 낙인찍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학생을 응원해 주는 문화가 정착하면 좋을 듯하다.

 

 

수능이 끝났다. 시험을 잘 본 학생보다 망친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들 수험생과 부모님들에게 이 영화를 함께 보길 추천드린다. 좋지 않은 교육 제도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일선 학교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츠보타 선생이 될지 니시무라 선생(사야카의 학교 담임)이 될지 자신은 알 테니까~^^

 

 

수험 성공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열열히 응원해 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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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그간 격조했어요^^ 반갑습니다

yamoo 2017-11-29 18:08   좋아요 0 | URL
쇼 님 반갑습니다. 제가 넘 게을러서욤..ㅎ 17년을 욜심히 마무리해야 겠습니다. 알라딘 서재에도 밀린 것들도 좀 쓰고..^^;;

stella.K 2017-11-2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개천에서 용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나 보네요.
근데 야무님 글 읽으니 수능은 좀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가 나오면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는 건지?
그래놓고 해마다 수능날 거의 비슷한 뉴스 멘트하잖아요. ㅉ

영화 개봉 때 못 본 것 같은데 저런 영화가 있었군요.

yamoo 2017-11-29 18:11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못 보셨다면, 한 번 보셔도 무방할 거에요..뻔한 소재를 참 흡입력 있게 연출했더라구요.

수능은 미친 시험이 맞아요. 적성시험을 표방했으면 적성시험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냥 학력고사와 적성시험의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전락한거 같아요. 뭐, 자격고사 시험으로 바뀌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

cyrus 2017-11-2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험에 따르면 학업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학업 성적이 좋은 사람들보다 사회 생활을 잘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yamoo 2017-11-29 18:13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런 경향이 많은 거 같아요. 거기다가 즐겁게들 일하는 듯해요. 학업 성적이 좋다는 건, 암기를 잘한다는 건데, 암기를 요하지 않는 분야는 많거든요.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게 갑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문제는 자기 적성이 뭔지 고교 졸업까지 잘 모른다는 것이죠..ㅎ
근데 정부는 고교학점 선택제를 실행한다니, 참으로 웃기는 노릇입니다.ㅎ

카스피 2017-11-3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소녀가 실화이긴 한데 사야카가 합격한 게이오대가 우리가 익히아는 그 명문 게이오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yamoo 2017-12-07 20:46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카스피 님!^^

헐~ 그런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명문 게이오가 아니라구요?! 영화에서는 명문 게이오라고 나와서요. 실화로 바탕으로 한 거라고...헐~ 아니라면 반전인데요!
 
[블루레이] 언어의 정원 (16p 설정집) - 한국어 더빙 수록
신카이 마코토 감독, 이리노 미유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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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목소리>를 보고 단박에 빠져버린 신카이 마코토 감독. 단 25분여의 러닝타임으로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감독의 역량에 혀를 내둘렀다. 매우 젊은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의 강렬함은 대단했다.

 

이런 체험 후에, 감독의 작품들은 거의 내 두 눈을 훔쳐갔다. 작품들 모두 좋았지만 항상 <별의 목소리>에 비해 2% 정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어 아쉬웠다. 콕 집어 뭐라고 할 수 없는 그 느낌. (뭐, 그런거 있지 않나.. 가슴이 먹먹하고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피부를 통해 올라오는 전율감에 휩싸이는 그런 느낌말이다.^^)

 

헌데, 오늘 만난(그제 토요일) <언어의 정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 보였다. 그 연유는 이러하다. 주말마다 나는 공공도서관에 간다. 책을 빌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목적은 DVD를 빌려 보기 위해서다. 집에서 나온 김에 항상 들르는 곳이 알라딘 중고 서점. 철학코너와 역사 코너에서 둘러보고 흥미진진한 두 권을 사서 도서관으로 갔다.

 

원래는 <빅 피처>를 빌려보려고 했다. 헌데 누군가가 빌려갔단다. 그래서 차선으로 덴젤 워싱턴 주연의 <플라이트>를 신청했는데, 그것도 역시 대출 중. 그래서 그냥 예약을 해 놓고 나올 찰나, 누군가 반납하고 갔는지 사서가 <언어의 정원>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걸 보겠다고 하니, 사서가 그러라고.

 

이 작품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많았다. 아쉬워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아마도 짧은 러닝타임 때문인 듯했다. 많은 것을 담으려 했는데, 분량상 한계에 봉착했다나 뭐라나. 하지만 짧은 시간으로도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했던 신카이 감독이었다. 기대감에 차서 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작품을 3시간여 동안 감상했다. 불과 46분에 불과한 러닝타임이지만 처음 보고 자막이 올라갈 때 울컥했다. 아름다운 영상뿐만 아니라 화면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디테일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였다고 생각됐기 때문. 그리고는 계속 봤다.

 

줄거리는 그저 그런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남고생과 여선생의 사랑이야기.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만엽집>의 가키노모토노 히로마로의 시구 두 편을 통해 격조 높은 사랑의 시가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의 타이틀인 <언어의 정원>은 정원 속에서 두 주인공이 이 시가로 연을 맺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는 이 작품을 연속으로 3번 보았고, 최고의 연출력이 발휘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무려 10번도 넘게 돌려 보았다. 사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같은 부분을 10번 이상 반복해서 본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무척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부분에 꽂히곤 하는데, 기억나는 작품으로는 대작 <베르세르크>가 있다. 이 tv시리즈 작품에서 가츠가 불사의 조드와 목숨을 건 칼싸움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감독이 정말 연출을 끝내주게 했다고 생각해서 수십 번을 반복해서 보곤 했다.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한다. 정말 질리지 않는다.

 

그 다음 비슷하게 반복해서 본 작품이 24부작 <페이트 스테이트 나이트> 엔딩 부분이다. 여주와 남주가 헤어지는 장면인데, 무척이나 상실감이 컸다. 그래서 이 부분도 십수 번 반복해서 보았다. 이별하면서 흐르는 엔딩곡이 정말 압권이었다.

 

<언어의 정원>에서는 엔딩 바로 전 장면이 나로 하여금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게 했다. 아키즈키(남주)가 사랑 고백 후 유키노(여주)의 방을 나오고, 유키노는 혼자 흐느껴 운다. 그러다가 시(만엽집에 나오는 시가)를 생각하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키즈키를 따라가 아키즈키와 마주한다. 그녀에게 대고 무자비하게 사랑의 불만을 쏟아놓는 아키즈키에게 유키노가 달려드는 상황이다.

 

특히 아키즈키가 그녀에 대해서 심하게 몰아세울 때 유키노의 표정변화와 마지막 아키즈키에게 달려들기 직전 한 줄기 햇빛이 유키노의 얼굴에 비춰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내가 왜 이 장면에서 그렇게 뻑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이후 그를 안고 통곡하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이 작품의 방점을 찍는 클라이막스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사진 직전이 클라이 막스. 여기서부터 엔딩곡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갑자기 내가 알라딘에서 구입한 두 권 중 한 권이 <만엽집>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1994년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인데, 저자인 이영희님이 <만엽집>을 통해 한일 언어문화를 연구한 필생의 역작이다. (2009년에 2권으로 재간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이영희 씨는 신문사 기자 출신) 매우 저평가 된 저작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영희 테제’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책의 결론은 <만엽집>에 쓰여진 언어가 신라의 이두였고,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현재 일본어의 뿌리가 된다는 것.

 

시구 하나하나에 놀라운 상징과 그 시대의 상황이 압축적으로 녹아 있어 해석이 매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 <만엽집>이다. 에로틱한 시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시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두로 읽어야 할 곳이 산재해 있다고. 이 시가들을 연구하는 것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 언어를 이해하는 귀중한 뿌리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언어의 정원>을 보게 된 것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했던 이유다.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지고 있는 시 두 편은 <만엽집> 제 11권에 실려있다. (참고로 아래 시가의 번역도 이두를 알아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대의 표기는 현재의 일본어식 표현과 전혀 다른 이두를 일본어에 맞게 사용했기에 그렇다고.)

 

 

[원문과 번역된 시가]

雷神 小動 刺雲 雨零耶 君將留

천둥소리 울리고 하늘 흐려 비가 온다면 그대 여기 머무르게 하련만

 

雷神 不動 雖不零 吾將留 妹留者

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작품에서 번역된 자막]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린다면 돌아가려는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만엽집>은 사랑의 시가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시기(약 8세기) 사랑의 표현은 '孤悲'였다. (이 단어는 포스터에서도 쓰여져 있다) 새기자면 '외로움을 느끼는 비애'정도 될 듯하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만엽집> 시대의 사랑을 메타포로 가져온 게 분명하다.

 

하지만 꽤 단호히 주장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8세기에 그려진 사랑의 의미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메타포는 깔 돼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얹어 아주 멋지게 해석해 내었다. 나는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남주 설정에서 감독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일본 아스카 시대 시가의 명인으로 칭송받는 가키노모토노 히로마노의 시 두 편은 2013년 도쿄의 정원 안에서 주인공들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비가 오는 정원의 한 정자(휴게터)에서 유키노는 아키즈키를 처음 만난다. 간단한 인사 후에 헤어지는 찰나, 천둥이 치면서 비가 오는 배경으로 유키노가 아키즈키에게 읊어 주는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린다면 돌아가려는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천둥소리 울리고 하늘 흐려 비가 온다면 그대 여기 머무르게 하련만)”이라는 시구는 8세기 때 이미 사어(死語)가 된 고전 언어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2개월 후에 유키노의 시에 답하는 아키즈키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역시 더 이상 고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의 사랑의 언어다.

 

이 모든 대화가 도쿄 한 복판의 정원에서(대개가 비 오는 상황) 오고 간다. 남녀 두 주인공이 6월에 처음 만나 9월에 헤어지기 까지, 유키노와 아키즈키는 비가 오는 날만 만나서 서로 위해주면서 가까워진다. 그 매개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만엽집>의 사랑의 시가다. (다른 하나는 ‘구두’)

 

그리고 아키즈키의 사랑 고백 후 혼자 울먹이며 앉아 있는 유키노에게 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이라고 읊조리는 아키즈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유키노는 그를 잡으러 간다.

 

아키즈키를 안으며 통곡하면서 하는 유키노의 말, 즉 그녀가 낙심해서 살 기력을 잃었을 때 다시 발을딛고 살 수 있게 해 준 이가 바로 아키즈키였다는 말은 사랑이 언어를 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일종의 알랑비탈?)을 깨닫게 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망가진 삶'을 치유하고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만엽집>의 시가를 하나의 축으로하고, 다른 하나는 ‘걷는다’라는 행위가 구두와 함께 등장하는 플롯 구조를 완성한 듯.

 

이는 아키즈키가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으로 설정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 구두였을까? 구두는 개인의 일상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물리적 사물이자,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키노는 일부 학생들의 그릇된 모함으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학교에 출근하지 못한다. 그 대신 공원으로 향한다. 이 상황은 심리적으로 정상이 아님을 나타낸다. 아키즈키에게 구두 디자인 문제로 자신의 발을 맡길 때, 그녀가 '걸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만엽집>의 사랑(孤悲)을 감독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지 알려주고 있는 포인트이기에 그렇다.

 

결국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유키노가 통곡하면서 하는 대사는, 감독이 8세기 사랑의 시가를 어떻게 자기식으로 해석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명장면이지 않을까한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별의 목소리>를 보고 난 후 계속 채워지지 않았던 2%를 충만히 채울 수 있어 뿌듯하다. <언어의 정원>이 아니라 '영상의 정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단한 비주얼을 보는 것은 더블 보너스~! 

 

덧.

마지막 엔딩 곡이 너무 좋다.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엔딩 곡 때문에 반복 횟수를 늘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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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놀랍고,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은 더 놀랍고,
yamoo 님의 해석마저 놀랍네요... 그저 감탄.. 감탄..

yamoo 2014-01-23 12:20   좋아요 0 | URL
영화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오렌님께서 보시면 어떠실지...
<노래하는 역사>는 저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처음 건졌습니다. 94년도에 출간되고 01년에 재출간 되었는데도 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니, 아주 좋은 책이더군요. 끝내주는 삽화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페크pek0501 2014-01-2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망가진 삶'을 치유하고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 결국 사랑이란~
"사랑만이 굽은 것을 펴고, 회복하고, 조정하고,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진정한 창조력을 갖춘 사랑이야말로 완벽한 구원자다." - <초역 니체의 말 2>에서.
망가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창조력이죠.

작품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문제가 될 순 없는 것이죠.
작품은 독자나 관객의 해석에 의해 완성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창작자의 의도도 소용 없는 것...

화답하는 시가 참 좋네요.
님 덕분에 좋은 감상했습니다. ^^

yamoo 2014-01-23 12:22   좋아요 0 | URL
사랑이란 뭐, 그런거겠지요^^ 연출력이 끝내 줬어요~

작품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르니 뭐, 그렇지요.

만엽집에 수록된 시가라고 하는데, 정말 좋더군요.
저는 이 영화를 페크님에게 추천드립니다~^^

gostraight 2014-03-0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메일을 확인하면서 언어의 정원 포스터그림이 있길래 뭐지? 하고 눌러보니


안에 있던 내용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라고 새롭게 다시 느끼고 갑니다. 감사해요^^

숲내 2014-03-0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배우니 감사합니다.
함 봐야 겠네요.^^

Forgettable. 2014-08-0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딩은 음악이며 영상이며 대사며 갑작스러운 마무리까지 뭐하나 부족할게 없었어요. 눈물이 울컥.. 시구도 무척 좋았구요. 몇번이고 다시 보게 되더군요.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감상이라 다시 영화본 직후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 그런데 알라딘 검열 글 보고 들어왔는데 그 글도 사라졌네요.. 지우신건가요?
 
500일의 썸머 - 아웃케이스 없음
마크 웹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우선, 이렇게 말해 보자. 이 영화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정말?! 보고 또 보니 그렇다는 결론.

 

영화 초반에 나래이션이 계속 강조한다.  이 영화는 보통의 연애물이 아니라고. 플롯의 구성도 500일의 시간을 앞뒤로 마구 왔다 갔다 해서 정신이 없었다. '보통의 연애물'이 아니라는 나래이션은 영화에 집중하기 위한 어떤 장치쯤으로 생각했다. '좀 색다른데'...라는 생각을 갖고 러닝타임의 90%를 본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주인공 톰은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고 그런 여자가 나타날 거라 굳게 믿는 소심남이다. 반면 남주와 500일을 보내는 썸머는 쿨걸이다. 진정한 사랑은 없고 가벼운 만남만이 남여관계의 전부라 믿는다. 이들이 만나 사랑을 하는 500일의 연애 이야기...라고, 나는 확신하면서 보았다.

 

플롯 구성이 참신해도, 뭐....이건 100% 일반 로맨스 물이라 생각했다. 플레이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쯤...썸머가 결혼 반지를 끼고 톰과의 추억의 장소(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그 벤치)에 찾아왔다. 그때의 영화 상황까지 본 나는 냉소를 쳤다.

 

"흥! 뭐, 연애물이 아니라고?! 연애물이네, 뭐~

그럼 그렇지....썸머는 톰을 첨부터 가볍게 보았군. 애구, 불쌍한 톰. 썸머한테 어장관리나 당하구~"

 

아...그런데, 둘의 추억을 간직한 그 장소에서 톰이 썸머에게 묻는다. 결혼 계획이 없다는 네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됐는지. 그때 썸머는 말한다.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책에 대해 물어봤어.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야.." "지금은 운명을 믿어 톰, 니가 옳았어."

 

나는 썸머의 바로 저 말로부터 영화를 다시 돌려보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영화가 왜 일반 로맨스물이 아닌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톰이 썸머에게 어장관리를 당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톰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충분히 그렇게 비쳐진다. 첨부터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썸머에게 톰은 그녀가 사귀었던 이전의 두 남자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왜냐하면 썸머는 톰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니까.

 

하지만, 썸머가 톰에게 한 마지막 말은 그녀가 톰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영화를 다시 보니, 그녀가 톰 대신에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관심을 보인 남자를 선택한 이유를 알았다. 톰과 썸머의 관계에서 톰은 썸머의 생각과 선택을 한 번도 존중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톰이 썸머를 사랑했던 건 명확하다. 그가 데이트를 하면서 계속 '우리의 관계'를 묻는 건 그녀로부터 연인관계임을 다짐받고 싶어서다. 처음 시작이 가벼운 만남으로 시작됐기에, 톰은 그녀와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

 

가벼운 만남의 대상으로 톰을 생각했던 썸머는 어느 순간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까지 톰에게 털어놓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녀도 그를 이전에 가볍게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썸머는 몇 번의 톰과의 말싸움으로 그를 떠날 결심을 한 것 같다. 우선 첫번째 상황. 어떤 바(Bar)에서 한 남성이 썸머에게 치근덕 거리자, 톰은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그 남성과 싸움박질을 벌인다. 그리고는 썸머와 심하게 다투고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바(bar)사건 직후 톰이 썸머와 싸운 이유는, 썸머가 톰이 격분한 이유의 핵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가 싸운 이유는 썸머를 희롱으로부터 보호하려했던 게 아니라 그 남성이 톰을 무시하는 욕(찌질이)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방어를 위해 벌인 싸움을 썸머로 돌린 것이다.

 

혼자서 상황을 정리해 보면서 썸머를 생각하지만 정작 그는 썸머를 찾아가 자신의 본마음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한 걸 알면서도 썸머를 찾아가 위로해 주지 않는다. 찾아온 건 썸머였고, 그녀가 먼저 사과를 한다. (키스도 그녀가 먼저 한다)

 

두 번째 상황. 초반 둘이 사귀게 되는 접점이 음악이었다. 그래서 레코드 가격에 갔는데, 톰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가 뭐냐는 질문에 썸머는 링고스타라고 대답한다. 이때 톰의 반응이 걸작이다. 비웃으면서 어떻게 링고스타를 좋아할 수 있냐고 핀잔을 준다. 이 상황은 영화 중반 이후에도 한 번 더 등장한다. 톰은 그녀가 왜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지 묻지 않고 자신의 음악취향대로 그녀의 취향을 보잘것 없는 것이라 일축해 버린다.

 

세 번째 상황. 둘이 영화 구경을 갔다. 무슨 영화인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썸머는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관을 나와서 톰은 썸머에게 왜 울었느냐고 묻는다. 사실 이런 물음은 처음 미팅에 나온 여자에게 "몇 살이세요?"라고 묻는 수준과 동일하다.

 

다시 돌려보니, 톰은 연애에서 상대편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진상'이라 말한다. 하지만 톰의 이런 행동을 처음 영화를 보는 중에 발견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화는 아주 충실히 톰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에. 영화 주인공 톰에게 감상자가 감정이입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남성이면 더더욱!) 이 영화의 탁월함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결국 썸머가 (톰과의 권태기에)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묻는 남자에게 홀랑 넘어간 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닌 것이다. 연애의 성공은 다름 아닌 작은 배려심이다. 배려심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존중에서 나온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나올 수 없는 미덕 중의 하나이다.

 

톰은 자기 식으로 썸머를 사랑했다. 그건 타인을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여성상을 사랑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녀도 좋아하게끔 강요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의 다른 표현이다.

 

연애는 타인을 이해하는 행위이다. 그것도 동성이 아니라 이성을! 화성에서 오고 금성에서 왔다는 이 극과 극의 주체들이 만나 서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과정이 연애이다. 이의 성공적인 출발점이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임을 영화는 빼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단순한 연애물이 아니다. 영화 스스로 이를 멋지게 증명했다. 브라보~

 

 

덧.

1. 연애하고 싶어 환장한 남성 싱글들은 짝을 시청하지 말고 이 영화를 돌려보기를 부탁드린다.

2. 연애 초보자는 3번, 4번 돌려보시라 당부드린다.

3. 연애에 계속 실패하는 남성분들, 4번, 5번 돌려보시라.

4. 자신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여자에게 빠져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역시 반복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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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9-0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뿐 아니라 결혼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일상적으로 많이 부딪히고 서로 상처받죠.
서로 배려하고 서로를 생각하는 자세가 늘 필요한 것 같아요.

yamoo 2013-09-06 22:48   좋아요 0 | URL
결혼 하고도 계속 싸우는 커플들 많이 봤어요. 연애때보다 더 싸우더라구요~ 감은빛님의 그런 생각을 갖으면 환상적인 결혼 생활이 될듯해요~^^

페크pek0501 2013-09-1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의 덧 글, 참 재밌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연애에서뿐안 아니라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필요한 덕목이죠.
그런데 그거, 쉽지 않아요. 알고는 있으되, 잘 실천할 수 없거든요.
저 역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남을 잘 배려하지 못한다는... ㅋㅋ


yamoo 2013-09-15 16:08   좋아요 0 | URL
자계서인 <배려>만 보아도 인간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덕목이에요. 페크님의 말씀마따나 정말 쉽지 않아요. 하지만 남을 존중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의지만 있으면 아주 어렵지만은 않은 거 같습니다. 일종의 훈련이 필요할 뿐이죠. 남녀관계에서도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이 배려라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습니당^^

초원에 부는 바람 2013-10-0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별스럽지만 몇 마디 더해 봅니다. 사랑과 연애가 같은 것인가 늘 헷갈려요. 연애는 늘 정치적이지요. 사랑은 1인칭이며 연애는 관계이니, 실상 사랑이나 연애에 타자가 들어설 수 있을까요.

yamoo 2013-10-02 23:20   좋아요 0 | URL
알렝드 보통의 책을 읽다가 제기하신 문제로 인해 격렬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결론이 안났다는^^;;
 
퍼시픽 림 - 영화 [퍼시픽 림] 공식 소설
알렉스 어빈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가끔씩은, 정말 가끔씩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그냥 신나는, 보면서 제작비 엄청들었겠다고 느끼는 그런 영화 말이다.

 

 

 

 

검색을 해 보니, <퍼시픽 림>과 <월드워z>가 쌍벽을 이뤘다. (아, 내가 영화를 본 시점은 이병헌이 나오는 레드가 개봉하기 직전이었다.) 뭘 볼지 고민하다가 두 개 다 보기로 했다.

 

모두 보기로 한 이유는, 네이버 평가가 극과 극이어서. 어떤 부류는 유치하고 재미없다는 평이 지배적이고, 또 한쪽 부류는 무지 재밌는, 더욱이 신나는...그러니까 안 보면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재미없으면 욕 한번 해 주면 되니까~ ㅎ 그래서 아주 깔끔하게 이틀 단위로 조조영화를 봐 주기로 했다. 8월이면 집 가까운 롯데시네마도 조조 6천원으로 오른다는데, 얼른 봐야지..

 

그래서 먼저 본 퍼시픽 림. 한 마디로, 헐리우드 신나는 액션영와를 보고 싶은 내게 딱 맞는 영화였다. 정말 안 보면 후회했을 영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그리도 눈을 땔 수 없는 액션을 퍼부어 주시는지..

 

뭐, 일본 여주 캐스팅 미스라는, 또 판에 박은 듯한 줄거리로 일관했다는 말은 덮어 두자. 이 영화의 백미는 스펙타클한 액션이니까. 것두 현란한 것두 모자라서 무지막지한 비주얼 영화니깐~

 

특히 길예르모 감독은 이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영화를 들고 나와 이게 길예르모 감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길에르모 감독을 존경해 마지 않게 되었다. 일본 아니메의 전형인 메카물을 실사영화로 이렇게 빨리 볼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물론 거대 로봇 나오는 영화는 트랜스포머가 한 발 앞섰지만 용자물로서의 거대로봇 실사영화는 이 작품이 최초이지 않나 생각한다. 트랜스포머는 이 영화에 비하면 장난같다. 로맨스 라인 살리느라 로봇 액션을 줄였으니.

 

이거 재미없다는 사람들,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고상한 영화 즐기는 부류들은 뭐, 비추다. 타이틀만 봐도 안 보겠지. 하지만 그냥저냥 보는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재밌는 액션 블록버스터다!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재밌고, 만약 재미없다는 평가로 이 영화를 외면했다면 아마도 후회했을 거다.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보면 대박 중 대박이라는데...조만간 가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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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tesong 2013-08-0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하고픈말 다 써주었네용 ㅋㅋㅋ 감사

yamoo 2013-08-03 15:39   좋아요 0 | URL
헐~ 그런가요...잘 되었군요~ 신기~!
저하구 보는 관점이 갔았나봐요^^ 반가워요!
 
완득이 - Punc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그러니까 10월 14일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친구가 시사회에 당첨이 돼서 보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불러냈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꽁짜표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러 갔지요. 

책은 이미 재미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영화 포스터도 디게 재미 없을 것 같은 포쓰가 마구 발산되는 것 같아, 그냥 어떤 내용인지 확인만 할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보기 시작하자 영화의 재미에 금새 빠져들었습니다. 저예산 영화라는 티가 팍팍 났지만, 재미 면에서는 역대 성공한 한국 영화에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5분마다 한 번씩 폭소를 터뜨렸던 것 같습니다. 

동주 선생을 열연한 김윤석 씨와 도완득 역을 훌륭히 소화한 유아인 군의 연기가 발군이었습니다. 특히 김윤석 씨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연기 내공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아마도 성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만) 이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 때문일 것입니다. 

이끼에서 이미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김상호 씨의 옆집 아저씨 역은 정말 많은 웃음을 선사해 줬습니다. 조연 이었지만 옆집 아저씨 캐릭터가 없었다면 그 많은 웃음의 미학은 반감됐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완득이에게 호를 붙여주고 싶더군요. 영화 속에서 완득이는 이름 앞에 붙는 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유명한 사람 이름 앞에 남들이 불러주는 호. 완득이는 동주 선생으로 인해 그 염원하는 호를 저도 모르게 얻게 됩니다. 다름 아닌, '얌마'라는 호이지요. 담임 선생인 동주선생은 완득이를 그냥 이름대로 부르지 않습니다. 항상 '얌마, 도완득~!'하고 부르죠. 언제나, 항상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도완득의 호는 '얌마'입니다..ㅎㅎ 

한편, 이 영화는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웃기는 영화이긴 합니다만, 내용 자체는 만만치 않습니다. 이 영화는 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을 들추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조심스럽게 비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습니다. 

영화는 보기드물게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내내 웃었지만 완득이가 자신의 필리핀 어머니를 만나 구두를 사주면서 '엄마'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으니까요. 완득이의 어머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싸~했습니다.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왔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마지막 완득이의 웃는 모습이 어찌나 밝고 깨끗한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어찌나 재밌에 이 영화를 봤는지, 시사회 당첨된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거, 참 재밌네~ 진짜~ 재밌네'라는 말을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에게 초강추 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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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3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저는 영화본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마구 유혹의 메시지를 날리는 리뷰라니! 그런데
김윤석 씨의 연기를 처음 보셨단 말이예요? 으아, 야무님두 영화랑 담 쌓고 사셨군요. ^^

완득이 무척 좋은가봐요, 아직 책도 못 읽었는데...... ㅠㅠ

yamoo 2011-10-24 00:13   좋아요 0 | URL
네~ 김윤석 씨 첨 봤어요..ㅎㅎ 한국영화하고 그리 친하지가 않아서여..^^;;
좀 친해지려고 요즘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완득이, 완전 재밌습니다. 책 읽은 친구가 책보다 훨씬 낫다고 해요. 책 안 보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거 같다는...이거 꼭 보시길 권해드려욤!

가연 2011-11-0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좋은가봐요, 저도 볼까 생각중인데.

yamoo 2011-11-04 01:24   좋아요 0 | URL
완전 재밌어요! 전, 안보려고 했었다니깐여!ㅎ 보고나서 이 영화 광고인이 됐다는..ㅋㅋ 가연님에게두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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