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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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 혹은 양주와 견해를 같이 하는 철학가의 해체와 선별, 그리고 분류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기대하게 한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이 많은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뤘다니 더욱 그렇다. 책의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을 분류했던 역사가들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힘에 주목하며, 그것들을 분류한 관점을 해석하고 해체한다. 그것을 통해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관점이나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 다음부터 작가는 자신의 관점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비판과 재구성 기반은 바로 양주, 혹은 아나키스트다. 즉 국가의 폭력성의 단점을 부각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불필요성과 해체에까지 이른 철학가들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철학자든 역사가든 과거를 자신의 논거로 활용할 때, 언제나 선택하는 근거는 바로 자신의 관점이다. 언제나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게 되면 이전, 혹은 동시대의 철학자나 역사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관점은 독선으로 불릴 수도 있고, 흐를 수도 있다. 자신의 관점이 옳다라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비난은 어느 각도에서도 가능할 수 있으며 비판적 관점이나 이론이 대중성은 확보할 수 있지만 얼마큼 효율적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성과 대중성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의 타당성과 가치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부가 없던 시대를 살지 못했기에 언제나 아름답게 윤색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설사 아름다운 무정부상태가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정부가 없는 시대를 살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나누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확인은 안 된다. 다만 나와 너란 공동체 범위와 우리란 범위 정도로 구분된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이 둘은 다루는 분야가 서로 너무 달라 비판이 금지되어 있는 분야인 것도 같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축구를 좋아하는 이가 야구 매니아에게 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으로 인문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회과학은 그 ‘우리’란 범주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하는 불운을 갖고 있다. 정치학,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자에게 있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책임이 채택될 경우 그 책임의 범위는 공동체 크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관점이나 대안을 내놓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인문학자가 부러울지 모르겠고, 어쩌면 양자(양주)가 국가를 비판하는 태도가 부러울 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결국 정부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아마도 사회과학자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평가할지 모르겠다. 괜한 고통을 사서 하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도, 복지정부도,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지켜주는 정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주의 견해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은 사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비자는 불필요한 학자들을 삭제시키라고 했고,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런 독단적인 정권을 비판하며, 그에 항거했고,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최소한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만큼의 사회를 이루는데 나름 공헌했다.
  양자는 물론 저자는 국가, 혹은 정부에 대한 도구론을 기반으로 정부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아나키스트로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자들을 발굴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의도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은 도가라는 묶인 철학자들을 빼곤 어떤 면에선 정치학자로서의 측면이 강하고 그래서 인문학자가 다루는 분야보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는 분야기도 하다. 그런데도 양자의 관점을 따르고 있는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을 분류한 이들 이면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적 권력관계를 파헤치면서 권력관계를 따르는 사가들을 비판하는 측에 선다.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사가들 역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그것은 마치 양자의 견해의 타당성을 만들기 위해 선 저자의 의도와도 다르지 않다. 다만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를 뿐이다. 또한 양자의 비판은 국가에 관한 것이며, 이 점에서 국가의 절대성을 부정한 도가들 역시 이미 사회과학자들이다. 이 점에서 양자는 물론 도가의 모든 사상가들 역시 사회과학자들이다.
  인간은 착한데 국가와 지배자의 속성을 담은 국가기제의 타고난 문제점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의 불운이 강해졌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됐다. 특히 그 중심엔 도가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들이 존재하며, 그 중 양자의 견해가 가장 주목되는 것 같다. 매우 강력한 이기주의자로 평가되곤 한 양자의 개인주의는 유별나기는 한 것 같다. 그다지 많지 않은 자료로 그의 많은 이야기들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정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확실하다. 많은 이론가들도 국가 혹은 정부의 문제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런 정부와 국가를 어떻게 좋은 기관으로 만들 것인가 하고 고민을 했다면 양주, 노자, 장자와 같은 이들은 차라리 무시했다. 그래서 이들 도가 철학자들에게 있어 정부는 죄악이 되거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삭제해야 할 기관일 뿐이다.
  이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또한 과연 작은 규모의 공동체의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에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미국 Arizona의 Argosanti와 같은 특별한 공동체가 주목 받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은 요원할 따름이다. 차라리 욕심을 촉발시키는 세상의 모든 광고나 광고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확실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리라. 도리어 어떤 시도도 바보와 같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뭘 해도 어려운 법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오늘의 관점에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를 비판한다. 하지만 각자의 시대에 맞게 역사서는 제작되는 법이고, 오늘날 유행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다루는 법이다. 이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는 열심히 분해되고 해체되면서, 그 속의 권력적 요소들은 물론 당시 시대의 정치권력기관을 정당화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 비난은 하지만 냉정할 수도, 냉정할 리도 없다. 관점은 싫든 좋든 주관적이다. 그것도 정확하게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아나키스트라면,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아직 동의하기에 주저하는 아나키스트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 무정부상태를 시험하고 보자라고 이야기하기에도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그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색다른 시각을 전해주고 새로운 생각을 일깨운다는 점에선 매우 긍정적이다. ‘만약 A가 없다면’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어 A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비판이 비난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비판이 비난이 되는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역사책의 교본이란 ‘사기’와 ‘한서’는 당시 정치권력의 의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고서 해체되는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만 가혹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적 흐름을 외면하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기본 전제로 삼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적을까? 설사 안티테제에 선 자들 역시 어떤 전제에 따라 자기 이론을 펴기 마련이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한 채 자행되기 마련이다. 정부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모르고 정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사실 없다.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나를 고민하는 법이고 역사가들 역시 같은 고민을 할 뿐이다. 그들도 용기는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도 불분명한 1000년 이상도 더 된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에 재구성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사회를 기준으로 재편집한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시경 속의 이야기를 갖고 당시 여성들의 적극성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애정관과 비교해서 그 진솔성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에 적극적인 것은 어쩌면 근대 이후에 들어와서 보다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과거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그것을 사회의 일반적 풍속도로 몰아간다면 현재의 작품이나 드라마는 숫자로도 훨씬 풍부하고, 결국 과거보다 지금 더욱 진솔할 것이다. 정말 진솔함을 따진다면 현재 제작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가사나 그들이 찍고 있는 영상작품들의 수위는 결코 과거에 비해 손색없이 진솔하다. 차라리 더할 것이다. 차라리 그때나 이때나 인간은 다 비슷하다라는 결론이 훨씬 현명하다. 과거의 신화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현대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중국 철학가적인 사고다. 하지만 과거를 살지 못한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기준일지 모른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의 구분은 한 제국의 정치권력을 위해 일하는 관료들이 사후적으로 만든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 역시 1000년도 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시도되는 범주일 뿐이다. 다만 방향과 목적, 그리고 그 방식이 다를 뿐이며 정치권력이 후원하지 않을 뿐이다. 정치권력이 지방분권이냐, 아니면 중앙세력이냐에 따라 책의 방향이 달라지듯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짧든 적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역사를 해체, 편집, 그리고 재수정을 가하기는 마찬가지며, 당시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욕구 과잉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저자의 방식이 제자백가 사상가들을 가능하면 고유명사로 처리해 일일이 다루려는 의욕은 무척 인상 깊지만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많은 이들이 시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최소한 이해의 폭은 넓힐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현재 누가 지켜주고 있는가도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가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자율성은 많이 보장된 사회다.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계급은 어느 정도 사라졌고, 자립이 중요시되는 자유 역시 점차 보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정부의 힘이다. 정부가 도구인 것도 수긍할 수 있고, 정부의 폭력성 역시 인정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정부는 태어나자마자 사악하다는 것은 극단일 수 있다. 언제나 양극단의 중간에 정부는 위치하며 어느 쪽으로 끌어당기느냐가 정부가 좀 더 국민과 개인을 위해 좋은 판단의 문제가 될 것이다.
  난 무엇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소통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전제의 보편성을 더욱 크게 확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특정 사상의 완고함이 사라지고 보다 타당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이해가 나오는 법이다. 정부의 폭력성을 주목한 학자들은 단지 도가에만 있지 않다.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물론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도 그랬고, 지금의 사회과학자들 역시 고민하긴 마찬가지다. 과연 그들 중 국가권력의 폭력성으로 인해 국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권력 통제를 위해 삼권분립이나 인권의 강조를 통해 권력의 폭력성을 제어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결국 국가만이 모든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모두 해줄 수가 없다고 아예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차피 도구라면 잘 다뤄야 하는 법이다. 파워포인트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고 파워포인트의 장점을 무시한 채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까 말이다. 차라리 인간 본연의 탐욕과 본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그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는 불분명하지만 유가, 묵가, 법가 등이 다들 고민한 내용들이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고민해서 그런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때의 고민이 지금의 고민과 비슷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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