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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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지만 손이 가지 않는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 여류작가(특히 장르소설에서 ) 중에는 미야베 미유키와 온다 리쿠가 그렇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읽은 것이 없습니다. 영화로 나왔던 '화차'만이 간적경험이었을 뿐... 온다 리쿠와의 만남은 오래 전 '밤의 피크닉' 밖에 없습니다. 고등학생들이 밤새 걷는 내용이죠 ㅎㅎ 잔잔하면서도 약간의 스릴이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온다 리쿠의 작품이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작가에게 사상 첫 '서점대상 2회 수상'의 영예를 안겼고, 나오키상까지 동시 수상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기에? 하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흡입력이 상당합니다.

총 12년의 구상, 11년의 취재, 7년의 집필 끝에 탄생한 작품. 일본에서는 인물들의 콩쿠르 연주곡을 모은 클래식 음반이 발매되었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됐습니다. 작품을 읽어나가며 이런 묘사와 감상을 주는 음악을 직접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으니까요. 더구나 인물들이 연주하는 음악들 중의 일부는 직접 감상해 봤거나 제목만이라도 들어본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작곡가, 음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3년에 한 번 개최되는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실제 하마마쓰시에서 3년마다 열리는 콩쿠르라고 합니다.) 이곳에 압도적인 4인이 등장합니다. 천재라고 불리며 주니어 콩쿠르를 제패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공연장에서 돌연 모습을 감췄다 이제는 대학생이 돼서 무대에 나타난 에이덴 아야. 압도적인 실력과 뛰어난 외모를 갖춘, 이미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요시가에 콩쿠르에 등장한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있었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악기점 직원으로 살아가던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거장 유지 폰 호프만의 제자라고 알려진, 양봉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주를 선보이는 16세 소년 가자마 진.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 네 인물 중 하나를 응원하지 않을까 합니다. 워낙 개성적인 인물이라 어느 한 사람에게만 눈길을 주기에도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꾸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에이덴 아야를 응원했습니다. 혜성과 같이 등장해서 역시 혜성과 같이 사라진 천재 소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또 모든 것을 준비해주던 어머니의 죽음은 이 천재 소녀를 음악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까지 음악을 내몰 수는 없습니다. 피아노 연주가 아닌 밴드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녀가 어머니의 대학동기였던 하마자키 학장의 요청으로 콩쿠르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심리적 방황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그녀는 콩쿠르를 통해 인간으로서도, 음악가로서도 한 단계 성장합니다. 스스로 떠났던 음악계에 다시 돌아온 그녀... 그녀는 우승을 거머쥘 수 있을까요?

 

거의 700쪽에 육박하는 분량입니다. 하지만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물론 뒷부분에 가서는 다소 흥미도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다르게 서술을 해도 음악에 대한 해석 혹은 설명이 반복되다 보니 약간의 지루함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초반부의 신선함과 세밀함이 워낙 좋았기에 후반부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 콩쿠르가 이렇게 3차 예선과 본선으로 진행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네 인물의 연주에 대한 서술이 계속 반복되는데(어쩔 수 없는 측면이긴 한데...) 이 부분의 양을 줄이거나 예선마다 초점을 맞추는 인물을 설정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겠죠? 그런 면에서 한 인물을 중도에 탈락시킨 것은 꽤 절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욕심같아서는 한 인물을 더 떨어뜨렸으면 했는데요(공교롭게 그 인물이 우승을 합니다 ㅎㅎ) 이유는 작품에 대한 집중도가 다소 향상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개인적인 느낌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을 하며 읽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

 

백 명에 가까운 참가자 중에 1차 예선 통과자는 24명, 그 후 12명, 6명으로 통과자는 줄어듭니다. 피를 말리는, 잔인한 토너먼트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경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존경합니다. 공감합니다. 자신의 배움의 양분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따뜻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 영향을 받고 상대의 장점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깨닫고 또다른 도약의 디딤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갈등이 없습니다. 이미 각 단계별 경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인물 간의 갈등이 필요없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읽으며) 그 인물에,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면 될 뿐입니다. 이렇게 인물 간의 갈등이 없는 소설도 참 오랜 만에 만나지 않나 싶습니다.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입니다. 그래서 인물들의 연주곡명은 알아도(그것도 새발의 피지만) 들어본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서 작품에 묘사되는 혹은 서술되는 연주에 대한 느낌을 떠올릴 만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가 표현한 음악에 대한 느낌을 읽어가면서 간접적인 추체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절묘하게 음악을 표현한 글을 보면서 직접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수많은 악기 중 피아노를 참 좋아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아니 우리나라에서 음반이 발매된다면 꼭 사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그들이 연주했던 음악들은 제가 어떤 느낌을 줄까요? 궁금하기만 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저처럼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읽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경탄하면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할까 짐작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네 인물 중 하나를 자연스럽게 응원하면서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어느 인물이 우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정말 매력적이면서 개성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런 조합을 생각해 낸 작가의 능력도 놀랍지요. 어쩌면 대중에게 거의 외면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일본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지요. 과연 한국에서도 음반이 발매될 지, 또 성공을 거둘 지는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문장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더 다가온 문장들을 소개합니다.

 

세상은 밝고, 한없이 넓고, 항상 흔들리며 쉽게 변화하는, 성스럽고도 두려운 장소였다.(17쪽)

 

물결이기도 하고 진동이기도 한 무언가가 온 세상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나라는 존재 자체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환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꿀벌은 세상을 축복하는 음표라고.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지고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있노라고.(18쪽)

 

'세상에서 백 명밖에 연주하지 않는 악기로 1등을 해봤자 시시하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들 훌륭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더 훌륭해지고 싶다고 몸부림치며 자기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상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빛을 받는 음악가의 위대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거야. 그 뒤에 좌절한 음악가들이 수없이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136쪽)

 

도시의 목소리는 청아하다. 아련한 메아리처럼, 수도승이 쥐고 있는 석장처럼,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늘 저편에서 울려 퍼진다.(297쪽)

 

나는 두렵지 않단다, 진...... 한 발 먼저 음표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거야...... 진은 내가 두고 가는 선물이란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기프트지.(309쪽)

 

하루하루 삶속에서 물을 준다. 그것은 삶의 일부이자 생활을 구성하는 행위다. 빗소리와 바람의 온도를 느끼고, 그에 따라 작업도 바뀐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개화와 수확이 찾아온다. 어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인지를 초월한 기프트다. 음악은 행위다. 습관이다.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음악이 가득하다.(374쪽)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여기가 한계인가 절망하는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유는 몰라도 느닷없이, 그때까지 연주하지 못했던 부분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표현할 길 없는 감격과 충격이다. 정말로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 탁 트인 벌판에 서는 기분이다.(455쪽)

 

일렁거리는 시간의 흐름 밑에 가라앉은 고독, 평소에는 못 본 척하는 고독, 느낄 새도 없는 일상생활 이면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고독, 아무리 다들 부러워하는 행복의 정점에 있어도, 충실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도, 역시 모든 행복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독을 등에 업고 있다. (561쪽)

 

인간이라는 존재에 아주 조금, 지상의 중력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그에 가장 합당한 답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는 순간에 곧 사라지는 음악. 그 행위에 정열을 쏟고, 인생을 바치고, 마음을 강하게 빼앗기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덧붙은 작은 마법 같은 옵션 기능이 아닐까?(654쪽)

 

물결이기도 하고 진동이기도 한 무언가가 온 세상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나라는 존재 자체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환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꿀벌은 세상을 축복하는 음표라고.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지고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있노라고.(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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