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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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 중 좋아하는 작가가 몇 없습니다. 신경숙씨(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신경숙씨의 표절사건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대 놓고 표절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유야무야 넘어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작가적 역량이나 위치를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상당히 좋아했던 작가인데 과연 재기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가 김애란입니다. 그녀의 문체, 그녀의 작품 세계가 다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달려라 아비'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 '비행운'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었고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 여름 새로운 소설집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읽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7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제목인 '바깥은 여름'과 일치하는 작품은 없습니다. '바깥은 여름'? 그렇다면? 아마도 '안은 겨울'이 가장 무난한 답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세상 만물에게 시련과 고난의 계절입니다.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열정의 여름이라면, 겨울은 소멸되어가거나 생명력이 사라진, 죽음의 계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바깥은 여름'일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소설집의 첫 장을 넘깁니다.


'입동'을 읽고서 한동안 책을 덮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먹먹함 때문입니다.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 그들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멈춰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듯 했을 것이고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들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21쪽)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뻔한 위로를 하고 누군가는 연민의 눈길을 보냈을 터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관심과 위로라는 것은 시간에 구속될 따름입니다. 채 피우지 못한 단원고의, 그 안타깝고 한스러운 스러짐도 짧은 집단적 애도의 기간이 지나자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곤 이제 그만하자고, 일상을 살자고 애써 털어냅니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이 강도는 연해집니다. 결국 아픔은 스스로의 몫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나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37쪽) 아프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나는 온몸이 후들후들 떨립니다. 계절은 지나가고 시간은 흐리고 관심은 사라지지만 그들은 여전히 겨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용서가 뭐야?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43~44쪽)

'노찬성과 에반'의 핵심적인 문장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반을 안락사시키기 위해 돈은 모았던 찬성, 하지만 그 돈에서 일부를 휴대폰 충전기, 유심, 그리고 케이스를 사는데 쓰고 맙니다. 그리고 에반은 찬성이 곁에 없는 시간에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납니다. 에반을 찾다 돌아오는 밤길에 찬성을 '용서'란 말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이후 찬성의 마음에도 겨울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긴 겨울을 지나고 나서야 찬성은 한 뼘 성장할 것이고, 용서란 말의 의미를 체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건너편'의 이수와 도화 역시 겨울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이수는 어떻게든 이 겨울을 벗어나 도화 앞에 당당하고 싶습니다. 도화는 이 겨울을 끝내는 것은 이수와의 이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표상이 바로 이수와 도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이 겨울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끝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도화가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118쪽)라고 궁금해 하지만 그녀 역시 갈 길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풍경의 쓸모'는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182쪽). 과거는 추억의 좋은 재료가 되지만 현실의 질곡을 딛고 일어설 만한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과거는 자신의 굴레가 될 수도 있으며, 인간 관계의 장애가 될 수 있음을 '풍경의 쓸모'는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눈이 날리는 겨울을 살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겨울을 함께 했으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온통 여름만을, 태양만을 좇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과거가(는)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173쪽)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과거가 나의 일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상실을 안겨줍니다. 뜨거운 태국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눈이 날리는 한국을 떠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곽 교수와의 과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곽교수의 여름 바깥으로 쫓겨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물어 뛰어들었다 남편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반을 잃은 것입니다. 차가운 마음 속의 겨울에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던 그녀에게 사촌언니는 스코틀랜드 행을 권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롯이 혼자가 됩니다. 그녀는 '죽음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고 느낄만큼 죽음과 가까이 합니다. 그런데 그녀 옆에는 시리(siri)가 존재합니다. 프로그램된 대답만을 하는 시리가 오히려 그녀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는 나의 질문에 '어디로 가고 싶'은 거냐는 선문답과도 같은 대답을 하는 시리. 그런 시리에게 그녀는 친구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한국에 들어온 그녀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 아이의 누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습니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 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266쪽)라고. 비로소 그녀는 남편의 죽음과 직면하고 남편의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남편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그녀에게 이제 더이상의 겨울은 없을 것입니다.


'침묵의 미래'에서는 극단적인 고독, 상실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언어가 다 사라지고 오직 중앙어만 남아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소수언어박물관'을 세우고 천여 명의 언어대표자를 박물관에 전시(!)합니다. 그리고 보름에 한 번꼴로 언어가(사람이) 사라집니다. 보호하고 연구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은 소멸을 가속화하고 박물관에 거주하는 이들은 단 한 마디 말도 섞지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현실에서 사라집니다.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145쪽) 언어가, 존재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침묵의 미래에서는 '나는 누구'인지도 의미가 없으며(알 수도 없으며), 어찌 될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언어와 존재가 사라진,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프게 읽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고 볼 수 있는 아픔과 슬픔을 이렇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슬픔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처럼 다시금 삶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 속에 있지만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은 끊임없이 계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겨울 속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찬성'처럼 정신적 성장을 하고, 때로는 '이수'처럼 또 한번의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명지'처럼 가장 가까운 이의 삶을,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정우'처럼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여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269쪽)고 합니다. 아픔을, 상실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결코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상실의 끝에는 죽음이, 소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디작은 희망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희망을 바라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작가는 말합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아픔을 부여안고 그 어느 곳으로 향하는 것. 이것이 아픔과 상실을 극복하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 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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