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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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

이 문장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이 문장은 감탄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지만 저는 '또다시'의 의미로 '역시!'를 썼습니다. 하루키만큼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서구권 작가 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가 하루키에 필적할 만 할까요? 하루키의 신간이 나오면 선주문 몇 부가 심심찮게 기사에 등장하고 많은 이들이 예약 주문을 넣습니다. 하루키란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발간 전부터 화제가 되곤 합니다. 저 역시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제가 읽은 그의 책들이 '상실의 시대',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없는 남자들', '1Q84' 가 있으니까요. 그만큼 저에게도 하루키는 믿고 보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기사단장 죽이기'는 기대가 컸던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루키 소설에서 반복되는 서사의 틀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대개 책을 구입할 때는 서평을 훑어보는데 이번에는 서평을 읽지 않으려 했습니다. 일단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또 평을 읽으면 아무래도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니까요.


하루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문체입니다. 사람의 감성을 오래도록 관조한 끝에 나온 듯한 그의 문체가 저는 참 좋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보다 삶의 애상과 젊은 날의 방황을 치밀한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적어도 저에게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잃지 않는 것도 하루키 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음악(특히 클래식)에 관한 박학다식함도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감탄하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은 하루키 소설의 기본 특성이 '기사단장 죽이기'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역시! 하루키!'란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요소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전 소설들의 변주 혹은 반복으로만 느껴집니다. 소설의 앞부분에 소위 말하는 밑밥이 충분히 깔립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밑밥을 따라 하루키의 세계로 한 발을 내딛지요. 그 세계에는 어딘가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나는 주인공이 있고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고(하지만 그는 한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거나 사랑에 배신을 당한 상태죠.) 뭔가 신비한 느낌의 사건이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주인공은 기이한 체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그 무엇, 주로 자아를 찾거나 상처의 회복과 관련됩니다. 그 과정을 다루면서 하루키는 인물의 복장이나 표정, 동작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방대한 음악적 지식을 풀어놓습니다.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고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 이런 식의 전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기사단장 죽이기'는 어떨까요?


키 173cm, 나이 36세, 부모와는 거의 절연하고 15살 나이에 여동생을 잃은, 직업은 초상화가인 '나'가 아내의 이혼 통보 후 일본의 북부 지방을 떠돌다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미술학원에서 어린이와 주부를 대상으로 강사일을 하지요. 그 와중에 수강생 2명과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 그러던 어느날 집 천장에서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그림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첫 장면을 표현한 것이지요. '나'는 그 작품에 묘하게 끌리고 오래도록 지켜봅니다. 그러나 작품에 담겨진 함의는 파악하지 못하지요. 그런 와중에 에이전트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 나. 내가 사는 집의 맞은 편 골짜기에 사는 백발의 신사 멘시키 와타루(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한 인물입니다. 그 의도가 단순한 초상화 의뢰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2권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가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모델을 서겠다고 합니다.(이전의 나는 한 번도 인물을 앞에 두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 기이한 제의를 나는 수락하고 신비로운 남자 멘시키와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 모를 방울소리. 멘시키의 도움으로 돌무덤을 파헤쳐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어놓은 듯한 원형의 석실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방울만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초상화가 완성되고(멘시키는 무척 만족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의뢰를 하게 되지요.) 이데아라고 명명되는 기사단장이 출현합니다. 1권의 제목이 '현현하는 이데아'입니다. 흔히 이데아는 사물이나 형상의 본질 혹은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이 현실에 나타납니다. 이데아와 현실은 순환적 관계일까요? 아니면 순차적 관계일까요? 현상과 본질의 합일은 가능할까요? 현상 속에 나타난 이데아는 어떤 기능을 하게 될까요? 꽤 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제목입니다. 이 의문도 2권을 다 읽으면 풀릴 수 있기를...


제가 일반화한 내용과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서사가 전개됩니다. 2권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와서 반전의 묘를 보여줄 지는 모르겠지만 1권만 읽은 지금 상태에서는 거의 하루키 월드의 무한변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압도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전개가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빠르게 읽히고 재미도 있습니다. 다만 하루키 소설에 다소나마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란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는 전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1권일 따름입니다. 2권에서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섣부른 결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감상은 2권까지 마치고 더 자세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권에서 눈에 들어왔던 문장들을 정리해 봅니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27쪽)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94~5쪽)


눈앞에 어떤 흐름이 생겼다면 일단 흘러가보면 된다. 상대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에 걸려들면 될 일이다.(128쪽)


'위장한 축복. 모습을 바꾼 축복. 언뜻 불행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뻐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야. Blessing in disguise. 그리고 이 세상에는 당연히 그 반대도 있을 테지. 이론적으로는.'(157쪽)


'생각해보니 그건 타자와 대면하는 자신을 정의하는 일과도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군요. 자명하되 그 자명성을 언어화하기는 어렵다...'(179쪽)


정념을 통합하는 이데아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려면 좀더 시간을 두어야 한다. 솟구치는 색깔을 잠시 재워두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날 이후, 밝은 빛 아래서 할 일이었다. 필요한 만큼 시간이 흐르면 그 정체를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참을성있게 기다리려면 나는 시간을 믿어야 한다. 시간이 내편이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294쪽)


끝없이 이어지는 그 침묵 속에서 내 감정은 날붙이로 만든 무거운 추처럼 한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왕복했다.(306쪽)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어, 라고 아마다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것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게 싫다면 진공의 세계로 가는 수밖에 없다.(378쪽)


'제 나이쯤 되면 당신도 분명 이 심정을 알게 될 겁니다. 진실이 때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저는 흔들림 잆은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468쪽)


내 주위의 소용돌이가 점점 세차고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너무 늦었ㄷ.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철저하게 고요했다. 그 기묘한 정적이 나를 떨게 만들었다(495쪽)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은 일도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501쪽)


양이 많아서 일부를 빼고 썼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참 많았네요. 하루키의 문체적 감각은 정말 놀랍고 부럽습니다. 그러나 서사의 틀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2권에서는 어떤 사건이, 어떤 인물이 '나'의 앞에 나타날까요? 회의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기대를 안고 2권으로 향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9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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