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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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었습니다. 흠...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일까요? 아니면 뭔가 획기적인 반전을 기대한 것일까요? '기사단장 죽이기'는 '1Q84'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지만 그 세밀함이나 설득력의 측면에서는 많이 떨어지네요. 무엇보다도 사건의 연결 고리가 무척이나 약해서 읽는 내내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서 평균 아래에 위치한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 그럼 소설의 내용부터 정리해 볼까요? 여기서부터는 소설의 내용에 바탕을 둔 주관적 해석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책을 읽지 않은 분이라면...(물론 이 블로그를 찾는 이도 거의 없지만 ㅎㅎ)

 

키 173cm, 나이 36세, 부모와는 거의 절연하고 15살 나이에 여동생을 잃은, 직업은 초상화가인 '나'.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 천장에서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 그 그림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첫 장면을 표현한 것. 백발의 신사 멘시키 와타루의 초상화 의뢰와 완성. 그리고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 모를 방울소리. 돌무덤 밑의 원형의 석실, 그 안의 방울. 이후 이데아라고 명명되는 기사단장이 출현. 멘시키의 또다른 초상화 의뢰(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 나와 멘시키, 아키가와 쇼코와 마리에의 만남. 그 중간중간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와 가족사(특히 가족사에는 난징대학살의 참상의 조금이나마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상화의 순조로운 진행과 아울러 나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마리에(그리고 멘시키와 아키가와 쇼코도 가까워지죠.) 그리고 (서류상으로는) 이혼한 아내 유즈의 임신소식. 그리고 갑작스러운 마리에의 실종과 '나'의 아마다 도모히코가 있는 요양원 방문. 마리에를 찾기 위한 신비한 체험-제목인 기사단장을 죽이고 '긴얼굴'과 '돈나 안나'의 안내를 받아서 메타포 세계로의 여행. 공포와 두려움, 험난한 환경을 이기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더니 그곳은 바로 잡목림 속의 원형 석실. 멘시키가 나를 구조하고 그보다 조금 이르게 마리에의 귀가. 나와 마리에의 만남과 대화, 나와 유즈의 만남과 대화, 그 이후의 재결합. 이에 앞선 '기사단장 죽이기'의 밀봉 보관. 후일담.

 

거듭 언급하지만 이 이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소설읽기의 결과입니다. 이 말을 꼭 염두에 두고 다음을 보시길...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은 2권보다 차라리 1권이 낫다는 생각. 1권에서의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인식. 정말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독후의 느낌. '1Q84'도 뒤로 갈수록 뭔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는 1권부터 강한 기시감으로 인해 작품의 흥미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꾸역꾸역 완독. '1Q84'가 환상적 세계 속에서의 암투와 인물 간의 사랑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면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환상적 세계와 현실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느슨하고 그 둘을 연결해 준 '기사단장 죽이기'란 그림은 그저 소도구일 뿐 그 자체의 의미를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인물 사이의 연결도 당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이데아와 메타포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 뿐 이 둘의 개념이나 보조관념 따위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그저 언어표현일 뿐 그 어떤 언어적, 문학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아무리 환상적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필요한데 이번 소설은 그 부분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혼을 하자 했던 아내는 정식 이혼서류를 보내며 이혼에 적극성을 보이다 갑자기 몇 개월 후 남편을 만나 재결합을 합니다. 이혼 제의에도 뚜렷한 이유가 없고 재결합에도 그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수상한 인물로 그려지는 멘시키는 여전히 많은 비밀이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안개 속에 가둬놓고 끝내 그 안개 속에서만 인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뜬금없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요양원에서 만난 아마다 도모히코의 모습도 상당히 억지스럽습니다. 그리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역시 어떤 이유도 없이 '나'에게 두려움(?)을 주고 끝내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나'의 느낌만이 나타날 뿐(현실에서 두 번, 그리고 두 번은 그로 추정되는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그는 작품 안에서 유령과 같은 인물입니다. 아키가와 마리에도 신비에 쌓인 인물입니다. 그저 멘시키의 집에 갇혀 있던 그녀를 위해서 나는 암흑과도 같은 메타포 세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합니다. 왜 마리에를 찾기 위해 '나'의 시련과 희생이 필요한 것인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사단장의 죽음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나 뜬금없이 나타나는 돈나 안나는 무엇 때문이지... 무엇보다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의미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향한 아마다 도모히코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일본의 난징대학살과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크리스탈나흐트-폴란드계 유대인 학생인 헤르헬 그린슈판이 독일인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파리에서 저격한 것을 구실로 1938년 11월 9~10일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했던 밤-가 몇 번에 걸쳐 언급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부분은 작가인 하루키의 역사인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 전체에서 새발의 피처럼 언급되는 난징대학살 때문에 일본 우익의 비판이 상당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러나 이 저항의식과 작품 내용과의 연관성은... 글쎄요. 이어붙이기가 애매합니다. 또한 그림을 통해 이데아가 열리고 메타포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서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연속되는데 이것이 작품 전개의 필연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냥 우연적 사건의 연속일 뿐... 무엇보다 인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 속에서 현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 불분명하면서 작품 전체의 이해도를 저하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데아의 소멸이 실제화되면서 관념과 현실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그 이데아의 소멸로 인해 메타포의 세계가 열리는 것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메타포의 세계, 이중메타포는 명명 자체는 상당히 거창하지만 작품 속에서의 의미는 인물의 불안과 두려움의 형상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메타포가 전이가 되는 과정이 '나'의 시련 극복과 희생이 따르는 것인데 그 전제가 무엇보다 희박합니다. 어느모로 보나 단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마리에의 실종)이 해결되는 것인데 왜 기사단장의 죽음과 '긴얼굴'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제 자신이 가지는 지식과 이해의 한계입니다.

 

1권보다 2권의 읽기가 더뎠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내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작가의 전작인 '1Q84',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위대한 개츠비' 등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책을 읽으며 기시감이 강하게 나타나서 작품의 몰입도를 방해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시감은 하루키 세계의 한계 혹은 반복으로도 다가왔습니다. 결국 제게는 하루키란 브랜드(이런 명명을 해도 될까 싶지만)가 가지는 기대감과 명성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많은 부분에서 아쉬움 가득한 작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아니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장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설입니다. 인물의 표정과 모습에 대한 세밀한 묘사,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배경의 사실적 표현, 음악을 비롯한 상식의 광대함, 애련함을 자아내는 듯한 인물의 내면 심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케 하는 문체, 무엇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필력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무난하게 아니 매우 만족스럽게 읽을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저에게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에 다소 못미치는 작품일 뿐이죠. 어디까지나 하나의 작품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익숙하다는 것은 편안함과 동시에 나태함을 안겨줍니다.(하루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제 태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읽고 난 후의 미진함이 마음에 걸립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좀더 공감하며 읽었다면 또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하루키 월드로의 또한번의 순례가 끝났습니다. 다음 순례에는 또다른 그의 세계가, 마음이 혹하는 새로운 세계가 제 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2권에서 마음에 들어온 문장들로 글을 마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정도로'(12쪽)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교류였다. 이윽고 엷어져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기억은 남는다. 기억은 시간에 온기를 줄 수 있다. 그리고-잘되면 말이지만-예술은 그 기억을 형태로 바꾸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122쪽)


'...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실제 일어난 일의 많은 부분은 어디까지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온 결과죠.'(139쪽)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 뜻밖의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생물학적으로(그리고 사회적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느 날 누군가가 또박또박 알려주는 것. (190쪽)


'벽은 원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외적이나 비바람으로부터 말이죠.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가두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 높게 솟은 견고한 벽은 안에 갇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시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떤 벽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261쪽)


'당신한테는 원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원할 만큼의 힘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에서,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했습니다.'(298쪽)


커다란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바깥에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하늘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나는 그 똑바른 선을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토록 길고 아름다운 직선은 어떤 자를 써도 인간의 손으로는 그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 아래에는 무수한 생명이 약동하고 있을 터였다. 이 세계는 무수한 생명과, 그리고 그것과 같은 수의 죽음으로 가득하다. (333~334쪽)


'... 훌륭한 메티포는 모든 현상에 감춰진 가능성의 물줄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시인이 하나의 광경 속에 또다른 새로운 광경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당연한 말이지만, 최고의 메타포는 곧 최고의 시가 되죠...'(415쪽)


'당신 안에서 당신이 하는 올바른 생각을 붙들어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것, 그렇게 몸집을 불려 나가는 것. 그것이 이중메타포입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쭉 당신 안의 깊은 어둠에 살고 있었어요.'(417쪽)


'우린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요.'(450쪽)


'... 형태를 지닌 것들에게 시간이란 위대한 존재지. 시간은 한없이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거든.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541쪽)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교류였다. 이윽고 엷어져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기억은 남는다. 기억은 시간에 온기를 줄 수 있다. 그리고-잘되면 말이지만-예술은 그 기억을 형태로 바꾸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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