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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기사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승리일까.

 


196㎏ 여성, 위 수술·운동 병행해 건강 찾아… "이젠 당당하게 길 물어볼 수 있어"
초고도 비만에 생명 위협까지… 사연 접한 성모병원, 무료 수술

"키 183㎝에 몸무게 196㎏인 여자로 사는 일은 암흑이었습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이정선(37)씨 얼굴에 그간의 설움이 스쳐가는 듯했다. 몸무게 97㎏으로 다시 태어난 이씨는 수십년 만에 뱃살 밑으로 처음 드러난 발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생명까지 위협받는 초고도 비만 환자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2008년 8월 이씨 사연이 한 방송을 통해 알려진 뒤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이 '위 우회술'을 해줬다. 소주잔 크기만 하게 자른 위를 소장과 연결해 음식물 섭취와 흡수를 동시에 줄이는 수술이었다.





2008년 7월 당시 196kg이었던 이정선씨. /이정선씨 제공





몸무게 97kg으로 다시 태어난 이정선씨가 활짝 웃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수술 후에는 남의 눈을 피해 공동묘지에 가서 운동을 했다. 운동으로 체중은 서서히 줄었지만 살이  처지기 시작했고, 접히는 곳마다 습진과 물집이 생겨 의자에 앉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이런 사정을 안 서울성모병원은 지난 8일 12시간 동안 배 주위 처진 살 7㎏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줬다. 수술비는 모두 병원이 부담했다.

이씨는 생선 노점을 하던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초등학교 때 덩치가 커서 중학생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몸무게가 100㎏을 넘었다. 조금만 먹어도 질병 수준으로 살이 쪘다. 1992년 고교 졸업 후 4년간 사무실 경리부터 재봉공장 보조 재봉사까지 수백번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몸으로 여기는 왜 왔느냐'는 냉랭한 눈빛만 돌아왔다. 1996년부터는 사람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텔레마케팅(전화영업)으로 보험과 책을 팔았다. 한 달에 100만~120만원을 벌었다.

이씨는 "나를 버리지 않은 엄마를 위해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며 "외모에 신경 쓸 만큼 삶이 녹록지 않았다"고 했다. '성격까지 나쁘면 아무도 상대 안 해준다'는 생각에 활달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어느새 '예스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1년 어머니 회갑 선물로 62㎡(19평) 아파트를 사드렸지만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4년 만에 날려버렸다. 어머니는 종교시설에 들어가고 이씨는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지긋지긋한 살덩어리들을 떼어 버렸다. 이씨는 "다른 사람이 나한테 신경 안 쓰고 무관심한 게 너무 좋다"며 "17년 만에 백화점에 갔는데 이젠 낯선 사람한테 길도 물어볼 수 있고 버스 타도 미안한 생각이 없어졌다"고 기뻐했다.

"75~80㎏ 정도가 최종 목표예요. 자격증도 따고 직장도 얻어 어머니와 살 집을 다시 마련해야죠. 100㎏짜리 족쇄를 벗어던져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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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반도체 공장' 피해자 열전·②] 김시녀·한혜경 모녀

"웃겨요. 믿을 수 있어요? 내가 장애인이 됐어요."

그녀가 양 주먹을 쥔다. 눈을 질끈 감는다. 경직된 듯 힘이 들어간 몸이 떨린다. 이것이 그녀의 울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뇌종양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눈물샘이 같이 잘려나갔다. 소뇌에 종양이 자리 잡았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몇 달을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우리 혜경이 그냥 내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만 있게 해주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수술을 하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에 면회 갔는데 쟤 사지가 다 묶여있는 거예요. 간호사 보고 왜 묶어놨냐니깐,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침대 하나 값이 3000만 원이래요. 그 침대가 부서질 정도로다가 난리를 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물인간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래, 부셔져도 괜찮다. 식물인간만 아니면 된다. 그땐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좋으니까."

그러나 뇌종양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수술을 하러 간 날, 혜경 씨는 자신을 위해 준비휠체어를 보고 "이걸 내가 왜 타?"라고 반문하며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혼자 걷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부축 없이는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말은 힘겹게 나온다. 복시로 인해 사물이 4개로 보이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시력도 크게 떨어졌다. 언어, 시각, 보행 1급 장애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는 단어다.

한혜경 씨의 소원은 건강해져 예전처럼 일을 하는 거다. 월급을 받아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언젠가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어머니 김시녀 씨의 소원은 딸이 숟가락질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녀는 매일같이 재활치료원을 찾는다. 그녀가 예전처럼 직장에 다니는 일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모두가 인정했던 삼성, 하지만…

한혜경 씨는 6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12시간 맞교대가 일상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삼성에 다닌다고 그러면 애들이 다 인정했어요."

그녀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간 딸은 김시녀 씨의 자랑이기도 했다.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김시녀 씨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정작 혜경씨는 밥 먹을 새도 없이 자기 바빴다. 늘 피곤해했다. 스물 몇 살짜리 얼굴에 빨간 여드름이 가득했다. 생리도 몇 달 넘게 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 생리불순은 회사에 들어오면 한 번씩은 겪는 절차처럼 얘기되고 있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나자 아예 생리를 하지 않았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 후에도 어깨나 머리가 자주 아팠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으면 며칠은 괜찮았다. 걸음도 자꾸 뒤뚱거렸다. 뼈를 다친 건가 싶어 X-ray를 찍어보기도 했다. 별 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을 전전하는 사이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혜경 씨는 신들린 것 마냥 헛소리를 해댔다.

신경과를 찾았다. 진료를 하던 의사가 머리를 MRI 촬영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온갖 병원을 갔지만 머리 쪽에 이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검사 결과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의사는 말했다.

"종양 크기로 보니 7, 8년 쯤 된 거네요."

2005년 수술을 받을 당시로부터 7년 전이면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때였다. 치료하기에 바빠 그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재활치료를 받던 중, 혜경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회복지사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이라는 단체를 알려주었다.

한번 연락이나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을 노리고 접근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가 찾아왔다.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서 한 작업 내용을 듣기 위해서였다.

혜경 씨는 6년 동안 솔더크림을 회로기판에 바르는 작업을 했다. 회로기판열처리 기계에 넣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불량을 검사하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곁에 두었던 솔더크림의 주성분이 '납'이었다. 납은 발암물질이다. 솔더크림은 종종 피부에 묻곤 했다. 불량품은 육안으로 가려야 하기에 열처리 된 회로기판을 가까이서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판에 묻은 납이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작업장에 납 냄새가 가득했다. 종일 맡다보니 기숙사에 와도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급된 보호장비는 면으로 된 마스크와 비닐장갑뿐이었다.

혜경 씨에게 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삼성은 좋은 회사이니까, 당연히 그런 (위험한) 거 안 쓰겠지 생각했나봐요."

겨우 19살에 들어간 회사였다.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작업장에서 버젓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다. 회사는 그녀가 사용하는 약품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일을 가르쳐주면서 손에 크림이 묻으면 IPA(Isoprophyl Alcohol)로 닦으라고 말한 게 안전교육의 전부였다. 유기용제 IPA조차 중추신경계열에 영향을 주는 독성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업환경이었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


ⓒ프레시안(김봉규)
"말해줬어야죠. 뭘 쓰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럼 내가 나 혼자라도 정기검진 받고 병원에 가고 그랬을 거잖아요. 반도체가 그렇게 중요해요? 사람이 이렇게 되지 않게 알아서 해줘야지…."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다. 으, 으, 화를 누르는 소리다.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가만히 안 놔두고 싶어요."

"먹어도 맛을 몰라, 슬퍼도 눈물이 안나…"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인정되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혜경 씨의 병을 산재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질병이라고 했다. 삼성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착각이라고 했다.

혜경 씨에게 산재 인정은 억울함을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딸의 곁을 떠날 수 없기에 김시녀 씨는 어떤 벌이도 할 수가 없다. 집을 팔고 차를 팔아 치료비를 대고 약값을 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김시녀 씨의 근심은 늘어간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덧 진정이 된 혜경 씨가 차분히 말한다.

"내가 갑자기 장애인이 됐어요.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가끔씩 울컥울컥 해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혜경이는 종일 집에 있거나 병원에서 운동하는 거 밖에 없어요. 쟤도 예쁜 옷 입은 사람 보면 자기도 입고 싶을 거고,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을 거잖아요. 뭘 먹어도 맛을 아나. 슬퍼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기를 해.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잘 수 있나?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요…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대체 그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혜경아, 금방 돼. 될 거야. 너 너무 걱정하지 마…내가 나한테 말해줘요."

그리고 돌아본다.

"엄마가 고생이 많아."

"아니야…엄마잖아…."

"나 나중에 또 병 걸리면 수술시키지 마. 진짜로 약속."


ⓒ반올림
혜경 씨는 팔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아당긴다. 약속도장을 찍으려는 모양이다. 김시녀 씨는 손을 뒤로 뺀다.

"됐어, 이 지지배야."

"수술시키면 안 돼."

"아유, 재발 안 돼."

그녀가 이번엔 내 쪽을 보며 말한다.

"건강해, 건강할 때 지켜야 해. 건강이 최고예요."

종양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큰 까닭이었다. 남은 종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혜경 씨 어머니 말대로 "재발되면 모녀가 삼성 앞에 가서 텐트치고 살다가 거기서 둘이 죽던지 뭘 하던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 4월, 반올림은 한혜경 씨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에 맞서 재심사를 요청했다. 8월 초 결과가 나왔다. 불승인이었다. 현재 반올림은 노동부에 재심사청구를 준비 중이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희정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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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된 글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지킴이 반올림'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목소리를 <프레시안>을 통해 9회에 걸쳐 전달한다. 2007년 故 황유미 씨의 죽음에서 출발한 반올림은 3년이 지난 지금 100여 명이 피해 노동자를 더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것도 노동조합이 없어 노동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어려운 삼성에서다.

반도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오늘날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지, 인체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한 연구도 거의 진행된 바가 없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경제의 중추로 자리매김한 탓에 그들의 발병에 대한 의문을 가장 앞서 규명해야할 정부도 소극적인 조사에 그치고 있다.

'반올림'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고, 반도체 산업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반올림의 활동을 알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고통받는 이들과 연결하려는 목적도 있다. 연재된 글은 여분의 이야기를 보태 2011년 책으로 엮일 예정이다. 본 연재는 <레디앙>, <참세상>, <미디어 충청>, <울산노동뉴스>와 공동 게재된다. <편집자>

그에겐 딸이 있다. 반도체 회사에 입사해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딸은 백혈병 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항암치료로 벗겨진 머리와 핏기 없이 창백한 딸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생각했다.'왜 우리 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10만 명 중 2, 3명이 걸린다는 희귀병이다. 가족 중에 백혈병은 커녕 암에 걸린 사람도 없다. 딸은 겨우 21살이었다. 고3 때 삼성 반도체에 입사한 후로 회사와 기숙사만을 오가던 아이였다.

'일하다가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막연한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 딸과 같은 조에서 일한 이숙영이라는 사람도 백혈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곳에서 2인 1조로 일했는데, 똑같은 병에 걸려. 백혈병이라는 게 감기도 아니고 옮겨 다니는 전염병도 아니잖아요? 그 희귀한 병이 둘 다 똑같이 일하다가, 똑같이 걸린다는 건 틀림없이 이상하잖아요. 뭐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는 딸 유미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아픈 딸이 괜한 걱정을 할까봐 조심스러웠다. 지나가는 말로 한번 묻고 며칠 뒤에 다시 묻는 식이었다. 유미는 디퓨전(diffusion) 공정에서 일한다고 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여러 화학약품에 담가 세척하는 일이었다.

"무슨 약품을 쓰는데?"

그가 묻자 유미는 영어로 된 약품 명칭 몇 개를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딸의 다이어리에는 공정 순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 쓰고 외웠다. 그런 아이가 자신이 매일같이 쓴 용액의 성분을 몰랐다. 화학약품의 이름과 기능은 외우고 또 외워도, 성분은 알지 못했다.

물어볼 곳이 회사 밖에 없었다. 황상기씨는 딸이 다니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전화를 했다. 산재인 것 같다고 하자, 회사 직원은 펄쩍 뛰었다. 과장과 직장이 집으로 찾아와 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퇴사를 할 테니 산재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회사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치료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남은 치료비가 4000만 원이었다. 병간호를 하느라 일을 하지 못해 벌이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치료비를 보상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때만 해도 딸이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다 나은 줄 알았다.

몇 주 뒤, 유미가 열이 펄펄 끓었다. 내성이 생겨서 해열제도 듣질 않았다. 애를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재발이 된 게였다. 마침 회사 직원이 아주대병원으로 찾아왔다. 직원은 약속된 치료비가 아닌 500만 원을 건넸다.

"500만 원을 내밀면서 그것밖에 없데.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었는데, 그 돈을 안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애가 저러고 있으니까."

속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딸의 병이 산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산재다 싶은 거야. 내 눈으로 본 게 있잖아."

회사는 산재라는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으로 꾀고 술수를 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산재'라는 단어도 못 꺼내게 하는 삼성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날은 '개인질병'이라며 윽박지르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마음에 눈물만 흘리다 온 적도 있었다.

고심 끝에 황상기씨는 언론에 이 문제를 알리기로 했다. 먼저 공영방송을 찾았다. <KBS> 방송국에 제보를 하니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힘없는 개인이 증거를 어떻게 찾아요?"

그것도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증거를 찾아오라니,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그는 딸에게 인터넷 이용법을 배웠다. 작은 언론사를 찾기로 했다. 손에 익지 않아 인터넷 검색이 서툴렀다. 전화번호가 보이기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월간 <말>지의 윤보중 기자와 연락이 됐다. 비슷한 경로로 <수원시민신문> 김삼석 기자와도 만나게 된다. 유미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고(故) 황유미 씨와 부친 황상기 씨. ⓒ반올림

그러나 2년 여의 투병생활 끝에 2007년 3월, 유미는 세상을 떠났다.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황상기씨는 싸움을 결심했다. 근로복지공단에 삼성을 상대로 산재 신청을 했다. 삼성 반도체에 백혈병 환자가 황유미, 이숙영 외에 4명이 더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삼성 홍보그룹 관계자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환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인권단체들이 있었다. 다산인권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유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위를 결성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시작이었다.

그 후 3년, 황상기 씨 한 명이었던 제보자는 100여 명에 다다랐다. 백혈병뿐 아니라 악성 림프종, 재생불량성 빈혈, 뇌암, 루게릭 등 희귀질병들이 제보되고 있다. 이들은 작업공정에서 벤젠과 납, 방사선 등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모두 대표적인 발암 물질이다.

유미가 세척을 하기 위해 만진 웨이퍼에도 벤젠이 묻어 있었다. 세척약품 중 하나로 사용한 황산은 발암을 촉진시키는 물질이다. 막연한 의심으로 시작했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점차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삼성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 보고서'도 그의 의심을 뒷받침해준다. 보고서는 반도체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99종의 화학물질 중 삼성이 자체적으로 성분을 확인한 경우는 한 건도 없고, 심지어 10종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제 황상기 씨는 산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거기에 어떤 유독물질이 있었는지 몰랐을까요? 삼성이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살인이에요, 살인."

19살 유미의 다이어리를 봤다. 2003년 10월 6일 <삼성전자 입사>라고 적은 날부터 삼성전자 직원 유미의 생활은 시작된다. 교복 대신 하얀 방진복을 입은 유미는 21일 월급날을 달력에 표시해두었다. 일기에는 날짜 옆에 '월급날 10일이 남았음'이라는 문구가 날씨 마냥 적혀 있었다.

11월에는 수능 날에 표시를 했다. 유미의 친구들은 이날 수학능력시험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은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입사 초반엔 퇴사하고 싶단 생각 정말 많이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맨날 울고 엄마한테도 퇴사하고 싶다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면서도 엄마 때문에 퇴사하지 못하고 참고 일했다. 차라리 친구들처럼 대학이나 갈 걸. 싫은데도 참고 일하는 건 엄마한테 미안해서이다. 엄마가 대학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우겨서 이 회사 왔는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퇴사 못하겠다. 슬픈 책이라도 읽고서 아주 펑펑 울고 싶다."

달력에는 Day(오전 근무) Swing(오후 근무), G.Y(밤 근무)가 표시된 사이사이로 '집에 가는 날'이 적혀 있다.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한 선물 목록에는 내복이 들어가 있다.

일기에는 휴무 때 어떻게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는지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였다. 방진복에 낙서를 해 혼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정수칙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용모 단정,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는 수칙도 보인다. 청정수칙을 중시하고 직원들의 복장까지 단속하는 삼성이 수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건강에는 왜이리 무심한 걸까.

유미가 3번이나 옮겨 적은 작업수칙, 품질수칙 10대 항목 어디에도 안전장치나 안전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2004년도 마지막 장에는 다짐서가 있다. 2005년에는 작업할 때 MISS를 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신입사원 유미의 1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다음해 6월, 유미는 백혈병 판정을 받는다.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에서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말하는 내내 기침이 잦다.

"제가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고는 많이 울었어요.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골수이식을 받고 회복되던 때였다. 그러나 몇 달 후, 병이 재발한 그녀는 영영 눈을 감았다.

황상기 씨를 만나기 위해 속초에 간 날이었다.

"저기가 울산 바위에요."

속초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앞장서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가리킨 곳에 푸른 능선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산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예, 그러고 말았다. 황상기씨는 다시 앞섰다.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 와서야 유미씨의 유골을 뿌린 곳이 울산 바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딸을 울산 바위에 뿌린 이유를 이야기 했다.

"유미가 방사선 화학약품 때문에 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주 공기가 맑고 깨끗한 산에서 맑고 푸른 동해바다 바라보면서 있으라고 그곳에 뿌렸어요."

황상기 씨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산재임을 밝혀내겠다고 딸에게 한 약속도 이루어내길 바란다.

故 황유미 씨의 명복을 빕니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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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무섭다 ①] 서민층과 부유층 아이들의 방학 나기 '극과 극'

상류층 자녀는 여름방학이 지나고 9월에 돌아오면 읽기 성적이 15점이나 뛰어오른다. 반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빈곤층 자녀의 읽기 성적은 거의 4점이나 떨어진다. 빈곤층 아이들은 학기 중에는 앞서 가지만 여름방학 동안 상류층 아이들에게 뒤처지고 마는 것이다."(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295쪽)
 

 

 

 

 


과거 '여름방학'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골 외갓집', '보이스카웃 캠프' 등 뛰어 노는 것이었다. 특히 보충수업, 학원수강에 시달리는 중고등학생과 달리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은 그야말로 '자유'였다. 하지만 최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마저 소득 수준별로 질적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저소득층의 경우 '방학 중 돌봄'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는 방학 중 학습의 기회 정도가 아이들의 성적 차이로 나타난다는 보고도 있다. 우리에게도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닌 듯 하다. <프레시안>은 2회에 걸쳐 초등학생들의 방학 나기를 살펴본다. <편집자>

#1. 저소득층 아동 지수 학생의 여름방학

초등학교 5학년 김지수(가명) 학생은 아침 8시면 눈을 뜬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밥솥에 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 엄마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지라 아침밥을 먹기는 요원하다. 시리얼로 때우기 일쑤다.

세수를 하고 오전 10시에는 지역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에 간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 학교 친구들은 학원이다 캠프다 바빠서 같이 놀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집은 무섭기 때문에 애써 공부방에 간다.

지수는 방학 중에 할 일을 여러 가지 세웠다. 일기 쓰기부터, 영어 단어 하루에 10개씩 외우기, 한자단어 외우기, 국어 문제집 하루에 10장씩 풀기 등. 하지만 방학이 절반 정도 지난 지금 이것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었다.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시간이 다 가버리거나, 아이들과 PC방에서 노느라 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내일은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부모님은 워낙 바빠서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온다. 공부방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을 관리하고 돌보느라 지수에게만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보니 공부방에서 점심만 먹고 아이들과 PC방 등을 돌아다니기 일쑤가 된다.

캠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구청 등에서 지원을 하는 저렴한 캠프라 하더라도 10만원이 넘는게 많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감당하기 어렵다. 지수와 같은 저소득아동들이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캠프도 있으나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은 거기까지 신경 쓰기가 어렵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란 것도 있지만, 방학 전에 충분히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바쁜 일상 때문에 일일이 신경쓰기 쉽지 않다. 지수 부모님도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 결국 방학 내내 지수는 PC방 등을 전전했다.


▲ 공부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 ⓒ프레시안(허환주)


#2. 고소득층 박슬기 학생의 여름방학

초등학교 6학년인 박슬기(가명) 학생은 요즘 정신이 없다. 지난 14일 여름방학을 맞은 그였다. 방학을 마치자마자 가족과 함께 주말에 호주로 2박3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빠가 이번 여름에는 부득이하게 휴가를 내지 못해 주말로 가족여행을 잡았다. 슬기네 가족은 슬기 방학에 맞춰 1년에 2번 정도 해외에 나갔다온다.

슬기는 공부 때문에 학기 중에도 바쁘지만 방학 때는 더욱 심하다. 26일부터는 글로벌 인성리더십 캠프에 참여했다. 4박5일 과정으로 브레인스토밍 및 토론·경청훈련, 오바마 스피치 훈련, 배려 스킬 등에 관해 배우프로그램이다. 8월 중에는 7박8일 일정으로 또래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작년 여름방학의 경우, 미국NASA(미국항공우주국) 캠프에 참여했었다. 당시 슬기는 화성 환경관과 항공우주 전시관을 돌아보고 우주비행도 체험했다. 또한 미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과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견학했다.

당시 슬기는 전문 강사와 동행, 관련 분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현지에서는 매일 현장 보고서를 쓰고, 돌아온 뒤에는 NASA와 관련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했다. 당시 10박 11일 코스항공료와 숙박비, 프로그램 참가비 등으로 약 360만 원이 들었다.

슬기는 "방학동안 뭘 할지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해 다양한 캠프 등을 계획했다"며 "일정이 빡빡하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슬기 어머니인 정미숙(39) 씨는 "아직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는 딸에게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어 방학 때는 여러 캠프 등을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극과 극을 이루고 있는 초등학생의 여름방학 보내기

고소득층 가정 초등학생과 저소득층 가정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 생활이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고소득층 가정 아동들 중 일부는 방학 2주 전부터 학교수업을 빠지고 영어마을에 들어가거나 해외 영어 연수를 떠나는 이들이 상당하다. 여름방학에 외가댁에 가서 수박을 쪼개 먹고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던 시절은 까마득한 먼 이야기가 된지 오래다.

실제 강남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기간제 교사 박인숙(25) 씨는 "합창단 아이들이 이번 방학에는 중국에서 열리는 합창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박인숙 씨는 "아이들 대부분이 부유층 자제라 100만 원이 넘게 드는 경비에도 사비를 들여 다녀온다"며 "매 방학 때마다 이렇게 대회를 참여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게 비일비재하다"고 설명했다.

강남에 위치한 또 다른 초등학교의 경우 방학 기간 중 영국, 호주, 캐나다 등 3개 나라 중 한 곳을 선택, 3주간 영어연수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아이들에게 독려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 10명 중 8~9명이 참여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초등학생들의 해외연수어학연수 참여율은 1%로 중학교 0.8%, 고등학생 0.2%에 비해 가장 높았다. 소득수준별로는 월 700만 원 이상 고소득자의 참여율이 3%로 가장 높았다.


▲ 여름방학을 맞아 해외로 연수를 떠나는 초등학생들. ⓒ연합뉴스


영어학원, 논술학원, 피아노 수업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

해외 연수캠핑을 하지 않는 초등학생들도 마냥 놀고만 있는 건 아니다. 목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인혜는 방학이 학기 중보다 더 바쁘다. 아침엔 7시에 일어난다. 8시부터 인터넷 강의를 듣고 9시부터는 동네에 있는 독서 스쿨에 간다.

오후에는 영어학원, 피아노 수업, 논술학원 등을 다닌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8시. 밥은 대부분 학원 틈틈이 사먹는다. 초등학교 4학년인 진수는 그나마 낫다. 학원은 수학만 등록했다. 다만 이번 여름방학 때는 책 100권 읽기를 목표로 세웠다. 영어는 아버지에게 매일 1시간씩 배우기로 했다. 진수는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대신, 부모님이 그가 방학동안 할 일들을 관리해준다.

특목중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민영이의 경우 영어와 수학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했다. 하루 5시간씩 일주일에 3일씩 수업이 진행된다. 그는 이미 중학교 과정은 다 배운 상태라 이미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수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9년 사교육비조사결과를 보면 초등학생들 사교육비 비용은 10조 3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생 1인당 1년에 34만5000원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목할 부분은 가구별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및 사교육 참여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특히 맞벌이 가구보다 아버지만 소득이 있는 가구의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와 사교육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 가정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넉넉치 않기 때문이다.

캠프는 꿈도 못 꾸고, PC방만 돌아다니는 아이들

반면 저소득층 아동들은 방학 중에 PC방 등을 전전하며 시간 때우기에 급급하다. 아동 돌봄 시스템의 부족으로 인해 저소득층 아동들이 방학 중엔 방치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소득층 아동들이 방학을 맞아 다양한 경험을 쌓고, 부족한 공부를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제 구로에 위치한 A 게임방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생은 "부모님들이 모두 일을 나가서 집에 있기 무섭다"며 "공부방을 가도 되지만 거긴 사람도 너무 많고 재미도 없어 가기 싫다"고 PC방에 오는 이유를 말했다. 이 초등학생은 일명 '메뚜기 뛰기'로,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1시간에 1000원 하는 게임비가 없어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PC방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돈도 없는 초등학생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게임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PC방 주인은 "게임을 하다 돈이 없어 도망치는 초등학생들이 상당수 있다"며 "돈을 받기 위해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하면 대부분이 맞벌이 부부였다"고 설명했다.

고소득층 부모들은 방학 두 달 전부터 캠프 정보를 수집해 미리 계획을 세워놓는다. 입학사정관제에서 창의적 체험활동을 반영하게 됨에 따라 아이들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각종 캠프와 외국어 연수는 기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이 다 하니깐 덩달아 자신의 자식이 뒤쳐질까 우후죽순 식으로 아이들을 해외 등으로 경험을 쌓기 위해 내보내기도 한다. 강남 모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한 학부형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몇몇 친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데 그 중 다수가 여름방학 때 해외를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결국 우리 자식이 그들에게 뒤쳐질 거 같아 어렵게 이번 방학 때 아이를 해외에 보낸다"고 말했다.

그나마 없는 살림이라 하더라도 어렵게 돈을 마련해 해외를 보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저소득층 가정 부모의 경우, 아이를 해외로 보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여름방학이 방치되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두렵게 만들고 있다.

 



/허환주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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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워킹푸어] 지방대생은 스펙 쌓아봤자 '단기 알바직'?

 20대가 고통 받고 있다. 1000만 원에 달하는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태반이 백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의 문은 200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더 심해졌다.

지난 1분기 20대 취업자 수는 29년 전인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440만 명(1998년), 434만 명(1999년) 수준을 유지하며 400만 명을 거뜬히 넘겼던 20대 취업자 수가 1분기에는 370만 명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실업률은 급증했다. 지난 1분기 20대의 공식 실업률은 9.1%로 2000년 1분기의 9.4%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 13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는 무려 20만4000명에 달했다. 1년 전에 비해 15.2%나 늘어났다.

20대 대부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중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는 아니어도 'in 서울' 조차 되지 못한 지방대생들이다. 2009년 시도별 대학 재적학생수를 보면,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242만7662명 가운데 서울, 인천, 경기의 수도권 대학 학생 수는 107만 명(44%)이며, 그 외의 대학에 속한 학생은 135만 명(56%)이다.

비수도권 대학의 학생 수가 전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지방대 출신은 저임금의 임시 일자리일지언정 정부 대책으로 마련된 청년 인턴마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가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가 이른바 '대학 거부' 선언을 한 뒤, 한 지방대 학생은 김예슬 씨의 선언과 그 사회적 울림을 지켜본 소회를 이렇게 토로했다.
 

 

 

 

 


"그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은 좌절했다. 그 용자의 이름은 '고대 자퇴녀'였기 때문에. 만약 한밭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학력과 학벌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대학생들은 마음으로 이미 자퇴했고, 그들 중 일부는 조용히 교문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명문대 학생도, 비 명문대 학생도 진정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권연대 소식지에 이런 글을 쓴 한밭대 학생 임아연 씨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교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했다. '고대를 관둘 정도면…'이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빈곤한 교육철학으로 점철된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김예슬 씨를 더욱 빛나게 했던" 그 이름을 갖지 못한 이들. 만일 그들이 김 씨와 마찬가지 이유로 대학을 '거부'한다면,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을까? 임아연 씨가 느낀 '좌절감'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의 반응과 지방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 반응이 어떻게 다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대 김예슬'의 대학 거부 "스펙에 열중하는 대학이 싫었다"

이상호(가명, 28) 씨는 지난 2008년 대학을 그만뒀다. 두 번째 들어간 학교였다. 첫 학교는 사는 곳에서부터 왕복 4시간이 걸렸고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쳐 2001년 충북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꼭 7년 만에 이 씨는 학교를 스스로 뛰쳐 나왔다. 군대를 제대한 뒤 1년 간 휴학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다시 복학한 직후였다.

이 씨가 학교를 떠났던 3년 동안 "대학은 전혀 다른 공간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 변화가 이 씨에게는 낯설었다.

"모두 다 똑같은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수업 들어갔다가 도서관 갔다가 토입 수업 들으러 가고, 토익 학원 끝나면 의미 없는 술자리로 하루 일과를 끝내는 생활의 무한 반복. 사람과 사람이 모여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축제만 해도 그랬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각 동아리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을 들고 나오는 자리였다면, 2008년이 되니 형식은 과거와 똑같을지 몰라도 내용물이 아무 것도 없어졌다. 예전처럼 각 동아리가 친 천막도 있었지만, 창작물은 없고 끽해야 일일카페나 주점이 다였다. 대신 축제는 외부에서 데려 온 대중가수나 개그맨이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호 씨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 씨가 군대와 휴학을 거쳐 돌아온 뒤 학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애정을 쏟았다는 동아리 역시 전혀 다른 곳이 돼 있었다. 달라진 동아리의 모습에 대해 이 씨는 "관심사를 공유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존에 하던 동아리 활동은 점점 축소돼 갔다. "하자"고 해도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다 지치면 쉬어가는 쉼터"가 돼 버린 동아리는 이 씨가 활동하던 곳만은 아니었다. 영어 스터디, 주식 공부 등 "자기 경력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가 아니면 대부분 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대학의 가장 큰 변화였다.

따지고 보면 이 씨가 군입대 등으로 학교를 떠났던 3년 이란 세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학교는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 씨는 답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사회의 변화는 급격하게 눈에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질 기회 자체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이니, 다들 조급해진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등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은 점점 더 몰려들고. 적어도 적당한 일자리마저 없어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이 등록금도 가파르게 올랐다. 국립대인 우리 학교만 해도 내가 입학할 때 120만 원이었는데 군대 갔다 오니 230만 원이 돼 있었다. 학기마다 꾸준히 20만 원씩은 올랐던 것 같다. 학교 다니는 동안 이미 모든 대학생이 엄청난 빚쟁이가 돼 버린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일자리에 취직하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신은 신용불량이라는 올가미에 걸리는 걸 20대도 잘 알게 된 것이다."

스펙에 열중하는 20대의 모습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지만, 이 씨는 그런 대학이 싫었다고 했다.

"빚으로 다녔던 대학,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었다"

이상호 씨도 학자금 중 일부는 대출을 받아 냈다. 입학금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방학 등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해도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그만둘 때까지 모두 400만 원 정도의 학자금을 빌렸다. 이 씨는 내년이면 원금 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솔직히 대학을 그만둘 때 대출을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 씨의 여동생도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닌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을 다닌다는 이 씨의 동생은 한 학기에 500만 원 넘게 등록금을 낸다. 고향을 떠나 대학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생활비도 더 많이 드는데, 웬만한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도 빠듯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휴학을 자주 했고, 스물여섯 살인 여동생은 이제 겨우 대학 4학년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 동생도 대학을 간다면 똑같을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전라도 광주의 한 대학을 졸업한 박민재(가명, 35) 씨도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등록금은 거의 다 대출로 냈다"고 했다. 게다가 박 씨가 대학생일 때는 학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가 몇 개씩 발급이 되던 시절이었다. '카드대란' 직전이었다. 박 씨는 "생활비까지 다 신용카드로 썼으니 카드빚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뒤부터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박 씨는 2004년 대학 졸업 이후 7년 동안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프로야구 경기장 진행요원, 텔레마케터, 이마트 협력업체 직원, 학원 총무, 서울시 교통국에 소속된 행정 서포터즈, 한강사업본부 소속의 기간제, 샌드위치 가게, 돈가스 가게 등 이력도 다양하다. 평균 월 100~150만 원을 벌었다.

고향 나주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살기에는 결코 넉넉치 않은 돈이다. 박 씨는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이나 따로 연애를 안 하면 살 수야 있다"고 말했다. 매달 기본으로 들어가는 돈만 월세 20만 원에 휴대폰 비용 3~4만 원이다. 고시원에 살고 있어 각종 공과금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 서울에서 작은 인쇄업체에 다니고 있는 이상호 씨도 생계가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씨까지 직원이 3명인 이 인쇄소에서 그가 받는 돈은 월 100만 원이다. 사는 집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가 37만 원인 작은 원룸이다. 이 씨는 "이 월급에서 문화적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하면서 살려면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 뿐이라 먹는 게 늘 부실하다"고 말했다.

박민재 씨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통 한 끼를 밖에서 먹으려면 최소 5000원인데, 돈이 없으면 두 끼를 집에서 먹고 여유가 있으면 한 끼만 집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가끔씩 보내주시는 반찬에 그냥 밥만 해서 먹는 거다.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데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사먹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한다. 

1년 정도 다녔던 이마트 협력업체를 빼면 박 씨가 얻었던 일자리는 모두 단기였다. 따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고 일한 종로의 돈가스 가게나, 이태원의 샌드위치 가게도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아르바이트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더 이상 그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되면 박 씨는 다시 인터넷 등을 통해 새 일자리를 구했다. 박 씨에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사는 삶에 대해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하니까.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이 있는데 놀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폭은 굉장히 좁다."

박 씨는 안정적인 곳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기능직 공무원 시험도 봤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은 공부를 꾸준히 오래 해야 하는데 그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기능직 공무원은 택했다. 하지만 두 번 다 미끄러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딱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박민재 씨지만, 그는 높은 실업률을 놓고 '20대가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핀잔을 주는 주장에 대해 "일부 맞긴 맞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환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눈높이만 얘기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중소기업 근무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월급이나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면 중소기업 경력은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반면 부당한 대우는 정말 많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눈높이만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 하루 평균 13시간 노동에 월 100만 원 안팎

이상호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학 시절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 씨는 제일 좋았던 곳으로 대기업 계약직을 꼽았다.

한 대기업 화장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4개월 일했던 그는 "아무리 비정규직이어도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복지도 상대적으로 좋고 출퇴근도 정확했다"고 회상했다. 주5일제도 지켜졌고, 근무 시간도 정확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중간 휴식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고, 작업복도 돈을 받지 않고 회사에서 지급해 줬다. 연장근무를 하면 수당도 줬다. 그곳에서 월 95만~100만 원을 받은 것이 이 씨의 아르바이트 경력에서 최고액이었다.

반면 핸드폰 공장, 군납 낙하산 제조 공장, 신축 아파트 하자 보수, 대형마트의 청과물 판매 등 다른 일자리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2003년, 그가 대학생인 것을 속이고 정규직으로 들어가 두 달 정도 일했다는 경기도 안양의 핸드폰 공장에서는 하루 13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주말은 없었다. 회사에서 내준 기숙사와 공장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번 돈은 한 달에 70만 원 수준이었다.

경기도 광명의 낙하산 제조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 전에는 시급 3000원을 주겠다고 하더니 첫 달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시급 2500원으로 계산해 월급을 줬다. 노동시간도 하루 13시간이었고 2주일에 한 번 일요일만 쉬게 해줬다. 휴식 시간은 하루에 2번,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뿐이었다. 그것도 채 한 시간이 안 됐다.

"핸드폰 공장이나 낙하산 공장이나 노동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기숙사에서 아침 8시에 눈 떠 공장에 가서 퇴근하고 방에 돌아오면 밤 11시였다. 그러면 할 일은 잠 자는 것 뿐이다. 그래도 피곤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공장 안에 먼지가 정말 많은데 마스크 같은 걸 지급해주지도 않았다."

군대 제대한 뒤 바로 일자리를 얻었던 청주의 대형마트는 대형 유통업체였음에도 환경이 열악했다. 이 씨는 파견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4대 보험은 전혀 없고 심지어 유니폼도 하청업체가 파견 노동자에게 따로 돈을 받았다.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88만~92만 원 정도를 벌었는데 이 씨는 '아르바이트'였지만, 동료들 가운데는 그 일자리가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형들이 많았다. 나야 '알바'로 생각했으니 그렇지만, 직장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하거나 항의할 곳조차 없다. 몸이 아파서라도, 일단 무단결근이 생기면 바로 해고다."
 

박민재 씨가 전전했던 일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 '첫 경험'이었던 텔레마케터는 실적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서 출신 대학 동문 주소록을 가져다 줬고, 동문들에게 잡지 구독을 권유하는 것은 두 달로 끝이었다. 세 번째 달부터는 전혀 실적이 나지 않았고 결국 '잘렸다.' 마지막 달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마트 협력업체에서는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벌었지만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주중에는 각 이마트 점포를 돌아다니며 납품한 물건의 판매량과 진열 상태를 확인해야했고, 주말에는 용인에 있는 창고에 가서 물건 포장 작업을 도와야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하다보니, 이마트에서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각 점포마다 1년에 1~2회 '리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동원됐다. 한 점포에서는 1년에 한두 번이라지만, 납품 점포가 여러 개인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 리뉴얼을 하기 위해 밤을 샜다.

샌드위치 집이나 돈가스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에 12시간, 배달 일을 했던 돈가스 가게는 "오토바이 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오토바이 보험료, 기껏해야 1년에 20만 원이다. 대학 때 오토바이 사고가 난 경험이 있어서 보험을 꼭 들어달라고 주인에게 여러 번 요청했는데 번번이 묵살됐다. 보험 들어달라면 '사고 나면 책임져준다'는 말만 하는데, 사고 나면 정말 다 책임져줬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다행히 내가 일할 때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주차 단속 민원 처리가 주된 일이었던 서울시 교통국의 행정 서포터즈나, 한강시민공원에서 나무 심고 꽃 심는 일을 했던 기간제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경쟁도 만만치 않다.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인 셈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공무원? 00학번 이후 없다"

결국 20대가 '눈높이'를 낮춰 얻을 수 있는 일자리란, 이들의 경험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형편없는 복지,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일상인 '질 낮은 일자리'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둔 이상호 씨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스펙 쌓기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가 나뉘게 된다. 당연히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게 돼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일 아닌가."

이 씨는 "그렇게 희박한 승률의 도박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할까"는 회의감에 대학을 '거부'했지만, "졸업을 했더라도 인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취직한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없다"였다.

"같은 학교 사람 중에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은 99학번이 끝이었다. 99학번 선배 하나가 삼성전자에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없었다. 과도, 동아리도 마찬가지다. 공기업도 전혀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는 얘기는 엄청 많이 들었는데 됐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기들 중에 한 친구는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전혀 엉뚱하게 골프장에 가 있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했다면 정규직 취업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이 씨가 증언한 지방대생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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