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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새롭게 연재되는 글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다. 

[동아시아를 묻다·1] 동아시아에 내재하기 위하여

 

동아시아론, 버블기의 끝자락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외래어였다는 흔적조차 희미해진 말 아시아(Asia)에 '동(東)'이라는 방위가 달린 이 말은 담론의 대상이자 통찰의 주제로 빈번이 회자되었습니다.

동아시아론. 동아시아에 관한 담론은 탈냉전, 세계화, 지역화, 탈국경화 등의 추세와 맞물려 부상했으며 역내 교류의 증가, 북핵 위기, 중국의 부상, 일본 우익의 준동, 한류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현실 사건과 반응하며 현실감을 더해 학술 쟁점 이상의 담론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학술 영역에서라면 동아시아론은 사상사, 문화 연구로부터 지역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전 방위로 논의되며 인문학에서는 주체 구성지평으로, 사회과학에서는 긴박한 분석 범주로서 조명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어 동아시아론은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출구라는 인상마저 풍겼습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론은 풍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론은 철지난 담론이 될지 모릅니다. 이미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인상입니다. 여전히 여러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 위의 자전거 페달이 공회전하듯 담론은 지면(현실)과 무관하게, 그간 쏟아져 나온 동아시아론의 관성으로 인해 자기운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동아시아 사상사를 공부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론의 성장세가 멈췄다고 아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동아시아론이 외형적 성장을 거듭할 때도 그 번영과 사상적 공백 사이의 낙차가 제게는 눈에 밟혔습니다.

동아시아론은 풍년처럼 보였지만 실은 버블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권이 바뀌고 동아시아론에 관한 정책적 수요가 줄고, 관련 사업지원이 끊기자 동아시아론은 거품이 빠지듯 쇠락하는 풍경입니다. 역시 정책적 지원이 줄었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책적 지원 속에서 웃자란 동아시아론은 바로이유로 '동아시아'에 관한 담론임에도 '내수용' 담론으로 성장해왔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한국의 사상계는 어느 사상계보다 '동아시아'를 자주 입에 담지만, 몇몇 값진 시도들을 제외하고는 타국의 사상계와 공유할 만한 동아시아론을 생산해냈는지는 의문입니다. 한국의 조건으로부터 긴장어린 사상 자원을 빚어내 다른 지역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모호한 지평에 자신의 기대를 투사하는 형국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모호함, 동아시아론의 애매함

동아시아는 분명 모호한 말입니다. '아시아'의 어감에 배인 모호함은 '동'아시아로 좁힌다고 그다지 희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은 모호함을 대가로 지불하는 대신 풍부한 환기 능력을 얻습니다. '동아시아'는 그리하여 화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은 사회 현실의 다양한 면모에 새로 빛을 비추고, 기존의 학문적 대상과 범주들은 그 말 안에서 자명함을 잃거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말은 주체/타자, 근대/탈(반)근대, 국가/지역, 이론/역사 어느 개념과도 복잡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라는 말을 통해 환기되는 문제의식들은 멀리서 넉넉하게 표현하면 다양하다고 하겠으나, 바짝 다가가서 내실을 들여다보면 여러 모순, 불균형한 갈등이 엿보입니다. 동아시아는 하나의 문제의식이 전개되는 전제로 오기도 하며, 문제 상황을 갈무리하는 자리에 오기도 했습니다. 문화 연구에서는 현실의 면모를 새롭게 들추는 분석 틀로 쓰이기도 하며,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힘을 잃으면서 만들어진 공백을 메우며 이념의 위상에 서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말은 직관과 추상의 영역을 오가면서 다양하게 회자되었습니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지리적 개념으로 안착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동적으로 사용된 까닭은 '동아시아'를 문제의식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시대 배경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론은 어떤 배경에서 왜 요청되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갈라졌습니다. 앞서 탈냉전, 세계화, 지역화, 탈국경화 등 동아시아론이 부상하게 된 배경들을 늘어놓았는데, 그런 시대 조건들은 동아시아론이 성장해온 토양이자, 동아시아론을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동아시아라는 말은 모호성을 씻어낼 수 없었고, 그 모호성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론은 생산성을 띠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추상화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는 때로 자국을 지역의 수준에서 확대 재생산하는 지평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국민 국가 단위의 자국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장으로 모색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는 때로 지역 공동체설립경제적 근대화를 기도할 때 조명되기도 하며, 때로는 서구적 근대에 대한 '탈근대적 대안'으로 모색되거나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동학을 지닌 지역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문명론으로 경사되기도 했죠.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를 앞으로의 비전과 결부시켜야 하는 이유들은 쏟아져 나와 사상계를 넘어 정부 기구와 민간 단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 관한 상이한 접근들이 논의의 지평을 넓혀 갔지만,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라는 내적 원리는 밝혀지지 않은 채 동아시아라는 말의 모호함에 기대어 동아시아론은 애매하게 확산되었다는 인상입니다.

지금껏 다뤄오던 연구 주제나 기획을 그대로 '동아시아'라는 애매한 담론 장으로 옮겨도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고, '동아시아'라는 말이 붙으면 어떤 현실성마저 띠는 듯한 착시 현상 속에서 '동아시아'는 사고의 지평이라기보다 그럴듯한 수사로 전락해갔습니다. 그리하여 만연한 동아시아론은 구체적 현실에 직면하면 담론의 물질성이 휘발되고 추상성, 관념성을 노출하곤 했습니다.

동아시아가 환기한 것

저는 동아시아론의 쇠락이 안타깝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쇠락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라면 동아시아론의 유산화 작업에 착수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론 자체에 가치가 있어서라기보다 동아시아론을 통해 환기된 몇몇 문제의식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동아시아론은 서구 중심주의와 학문의 식민성을 문제로 부각시켰습니다. 사실 '동아시아(East Asia)'는 '극동(Far East)'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국무부 내에는 '극동 업무(Far Eastern Affairs)'를 대신해 '동아시아 업무(East Asian Affairs)'라는 명칭을 단 부처가 등장했고, 아시아는 전후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의 필요에 따라 '동아시아(East Asia)',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서남아시아(South-West Asia)'로 구획되었습니다. 즉, '동아시아'는 미국 지역 정책의 필요성에서 등장한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아시아'는 미국 주도의 지역학에서 한 가지 하위 영역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상계에서 '동아시아'는 다른 맥락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동아시아론의 포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최원식의 "탈냉전 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은 한국 사상사의 흐름 안에 있는 '변방적 경직성'을 질타하며 시작합니다. 교조의 권위에 매이지 않고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의 변증법적 관여를 통해 창조적 비약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백영서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제기하는 데 이릅니다. 그밖에도 '동아시아'를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성찰하는 지적 지평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런 시도 안에 내재된 역오리엔탈리즘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동아시아론을 매개해 서구 중심주의, 학문의 식민성 문제는 더욱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 지역에서 사상적 연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 논의는 필요합니다. 이 지역에는 '동아시아 공동의 번영'이라는 수사로는 감출 수 없는 적대 관계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분단, 과거사 문제, 양안 문제, 영토 분쟁, 경제 패권 등의 문제가 상존하여 한국과 북한, 중국과 타이완,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어지러운 갈등이 잠재해 있습니다. 긴장 관계가 어려 있는 각국 간의 역사인식의 충돌, 현실적 규모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지역 인식과 세계 인식의 간극은 동아시아의 문제 상황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지만,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지리적 실체가 아닌 사유의 지평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은 지난 20년 간 이 지역의 문제들을 들춰냈으며, 동시에 자국인 대 외국인, 내부 대 외부처럼 정합적으로 짜인 패러다임에 담겨지지 않는 사고를 산출해냈습니다. 앞으로도 현실상의 갈등 가운데 사상적 연대는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다만 사상적 연대를 도모할 때 국가 단위의 표상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적절한지, 그리고 이 지역 내에 존재하는 지리적·역사적 규모의 비대칭성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셋째, 동아시아론은 한국 사상계 내부의 소통을 가능케 했습니다. 한국의 사상계에서 공동 언어의 소실 현상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론은 한국 사상계의 다양한 차원에서 논점을 생산하고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동아시아론의 애매함이 가중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한국의 사상계에서 동아시아론이 달아올랐던 까닭이 한국의 장소성에 관한 재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해두고 싶습니다.

역시 여기서 창비 논자의 동아시아론은 더욱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논의는 건조한 동아시아 공동체론으로 경사되지 않고, 한국의 장소성에 근거해 한국의 동아시아론에 오리지널리티를 주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을 냉전 체제의 결절 지대로 인식합니다. 또한 복합 국가론은 분단 체제와 세계 체제의 고리로서 동아시아를 사고한다는 문제의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물론 이를 둘러싸고 여러 논자들의 논의가 거듭되었습니다. 무척 값진 충돌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론이 공론이 되지 않고, 한국의 상황에 근거하되 타국의 사상계와 공유할 만한 사상적 자원으로 연마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에 내재하기 위하여

결국 저는 '내재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탐색해보고 싶습니다. 즉 그저 지역 범주 혹은 지리적 근접성을 뜻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가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를 공동으로 모색해보고 싶습니다. 지금껏 제가 적은 내용에서도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라는 내적 논리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점을 공동의 토의 주제로 다듬어나가고 싶습니다.

아직은 동아시아론을 장사지낼 때가 아닙니다. 후원 담론의 지위를 상실하고 거품이 꺼지는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론은 사상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 자립할 수 있는지가 진정으로 추궁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윤여일 수유너머R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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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학자 심의용의 눈으로 읽은 중국 수사학의 고전 <귀곡자>. <귀곡자>는 상대의 정보를 염탐하여 그의 심리와 약점을 이용하고, 상대를 뺨치고 어르고 달래고 위협하고 띄워주워 신뢰와 총애를 얻는 유세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이런 <귀곡자>를 소인배의 책, 권모술수(權謀術數)의 궤변을 늘어놓은 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귀곡자>가 신하가 군주에게 유세하는 기술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한비자>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신하를 견제하려는 군주의 통치술을 담고 있다면, <귀곡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군주에 대항하는 신하의 유세술과 권모술수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귀곡자>를 해석하면서 음모(陰謀)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다시 조명한다.





프롤로그

제1강 귀곡자는 누구인가
귀곡자는 실존 인물이다/고대 중국 외교관들의 교과서 『귀곡자』/『귀곡자』의 진위 문제/귀곡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2강 공자는 왜 실패했는가
분노와 증오의 대화술/정치와 말의 힘/진리의 폭정/저항과 흔적/저항을 줄이는 전략

제3강 귀곡자와 수사학
정치 기술로서의 수사학/시적 표현으로서의 수사학/암시와 여백의 수사학

제4강 귀곡자와 마키아벨리
은둔인가 죽음인가/마키아벨리와 현실 정치/순진한 미덕보다 융통성 있는 악덕이 아름답다/모든 신하를 위한 신하론

제5강 보이지 않는 장치
보이지 않는 장치/음모의 기원/음모의 정치적 맥락/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수 있는 장치/음모의 전략적 효과

제6강 설득의 기술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깨닫는다/역린逆鱗/태괘兌卦와 유세/유세의 방식

제7강 유세의 노하우, 패합술
프레임 전쟁/부각과 은폐/솔직함이 전부는 아니다/전략적 모호함

제8강 유세의 노하우, 췌마술
문제는 정보다/췌마술/우회전략/무정한 사람

제9강 위기가 기회다
틈새/실재계의 침입/그럴 리가 없다/때라 무르익었으면 혁명하라/위기란 기회이다

에필로그
부록 귀곡자 원문과 해석








저자 : 심의용
 



  • 최근작 : <귀곡자 교양강의>,<장자 교양강의>,<나의 고전읽기 세트 - 전14권> … 총 7종 (모두보기)
  • 소개 :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정이천의 『주역』 해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고전번역연수원 연수과정을 수료하고 국사편찬위원회 고전연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신여대 연구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주역과 운명』 『주역,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파라』 『세상과 소통하는 힘』 『못 말리는 아인슈타인에게 말 걸기』(공저) 『문화, 세상을 콜라주하다』(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 지식인과 정체성』 『장자 교양강의』 등이 있다.




 

젊은 우리 고전학자의 눈으로 읽은 중국 수사학의 고전

동양 철학을 전공한 필자 심의용은 최근 연구 자료를 통해 종횡가의 비조인 귀곡자가 생존 자체가 불투명한 은자가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임을 밝히고, 유가에 의해 저평가된 종횡가를 당시 정치에서 뛰어난 현실 감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주관적 도덕성에 집착하거나 귀족적 신분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엄밀한 사회과학적 사고와 기술을 통해 현실 개혁과 진보를 이룬 행동하는 집단으로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귀곡자가 현대인에게 전할 수 있는 흥미롭고 유용한 메시지와 지혜를 다채롭게 펼쳐놓는다. 『귀곡자 교양강의』는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고전을 실용적인 시각으로 분석하여 고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 오래된 지식과 현재적 상황과 연결한 새로운 해석이 주는 지적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종횡가와 비운의 고전 『귀곡자』

종횡가(縱橫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다. 종횡가는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한 이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하여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고자 했던 사상가다.
진 제국의 중국 통일 직전에 합종연횡의 전략으로 중국 대륙을 쥐락펴락했던 대표적 인물이 소진과 장의이다. 종횡가라 불리는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전국 시대에 최고의 정치 스타이자 탁월한 외교가였다. 소진은 여섯 나라의 제후를 설득하여 6개국 제후의 자격으로 유세함으로써 여섯 나라가 강력한 진나라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6개국의 재상을 동시에 겸임한다는 것은 역사상 유일무이하다. 장의는 뛰어난 지모와 변론술로 진나라 재상이 되었고, 소진이 만든 6개국의 합종을 깨트렸다. 이로써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전국 후기의 제후들과 천하는 이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부귀공명을 얻었다. 사마천은 이들을 경위지사(傾危之士), 즉 ‘궤변을 통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들의 수사학적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성과를 이룩한 두 사람을 가르친 스승이 바로 귀곡자(鬼谷子)이고 그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책이 바로 『귀곡자』다.
『귀곡자』는 위서(僞書)라느니, 저자가 분명치 않다느니, 신선방술(神仙方術)이나 병가(兵家), 심지어 점술과도 관련된다는 등 여러 가지 이견이 분분한 책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귀곡자』가 전국시대 중기에 실존한 인물의 저작임은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위한 수사학

그렇다면 『귀곡자』는 도대체 어떤 책인가? 종횡가는 기본적으로 유세가(遊說家)였다. 주유천하했다는 건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군주에게 유세했다는 말이다. 이 유세의 기술은 고대 그리스의 레토리케(rhetorike), 즉 연설의 기술과 비교될 수 있다. 웅변술이자 수사학(修辭學)인 것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시대. 그 시대에 무력이 아닌 말을 통하여 권력을 움직여 자신의 뜻을 펴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종횡가다.
『귀곡자』는 상대의 정보를 염탐하여 그의 심리와 약점을 이용하고, 상대를 뺨치고 어르고 달래고 위협하고 띄워주워 신뢰와 총애를 얻는 유세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이런 『귀곡자』를 소인배의 책, 권모술수(權謀術數)의 궤변을 늘어놓은 책으로 여겼다.
당나라의 문인 유종원(劉宗元)은 “그 말이 매우 기괴하고 그 도리가 매우 좁아터져 사람을 미치게 하고 원칙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평했고, 명나라의 선비 송렴(宋濂)은 "귀곡자가 말하는 패합술과 췌마술은 모두 소인들의 쥐새끼 같은 꾀로서 집에 쓰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쓰면 나라가 망하며 천하에 쓰면 천하가 망한다"고까지 혹평했다.
그러나 『귀곡자』가 신하가 군주에게 유세하는 기술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고대 중국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하를 그 자리에서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간(比干)을 비롯한 많은 충신들이 직간(直諫)했다가 개죽음을 당한 것이 좋은 예다. 아무리 충심을 가지고 유세한다 해도 말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 될 판이었다. 『한비자』의 「세난」(說難) 편은 이런 시대에 ‘유세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신하가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면서 군주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설득시킬 것인가가 매우 중요했다.
『한비자』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신하를 견제하려는 군주의 통치술을 담고 있다면, 『귀곡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군주에 대항하는 신하의 유세술과 권모술수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음모와 권모술수의 재조명

필자는 『귀곡자』를 해석하면서 음모(陰謀)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다시 조명한다. 음모는 아무도 모르게 추진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얘기일지라도 자신의 덕을 내세우며 상대를 깨우치고 가르치려 들면 상대는 자신의 그릇됨을 인정하기보다 저항하기 마련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게 강하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게 되는 법인데, 군주를 설득할 때는 군주 자신이 설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군주가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에 개입하면서도 개입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원래 권모술수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온갖 모략이나 술책을 말한다. 그러나 귀곡자에게 권모술수는 현실의 조건에서 실천적 전략을 이끌어내는 ‘권도’(權道)의 의미가 크다. 이는 정치적으로 볼 때 자신의 이념과 도덕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는 '정치 전략’(political strategy)이자 ‘정치 공학’(political manipulation)이다. ‘권’(權)이란 추상적 원칙(經)에는 반하지만 의(義)에는 합하는 ‘반경합의’(反經合義)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합당하고 적합한 전략을 뜻한다.
천 길 낭떠러지의 제방 꼭대기에서 제방의 물을 터트리는 과감한 결단과 만 길이나 되는 계곡에서 둥근 돌을 굴릴 수 있는 현실적 유연성과 변화무쌍함. 이것이 귀곡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의 모습이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순간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임시변통으로서의 ‘일시지권’(一時之權)보다는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떳떳한 도덕인 ‘장구지도’(長久之道)를 강조한다. 그러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해나가려면 ‘장구지도’만 가지고는 부족하며 ‘일시지권’도 필요하다.
이상적 도덕‘만’ 있고 현실적 전략으로서의 ‘일시지권’이 없다면 무모(無謀)하기 쉽고, 현실적 권모술수‘만’ 있고 ‘장구지도’가 없다면 사기꾼이기 쉽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하게 되어 있다”(有德者必有言)고 했지만 덕이 없는 자도 말을 하며, 또 덕이 있더라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면 현실에서 공을 이루기 어렵다. 귀곡자는 이 모든 것을 골고루 요령 있게 갖추는 노하우를 가르쳐준다.

배반의 기술

필자가 이 책에서 짚고 있는 귀곡자의 또 하나의 면모는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관계를 끊는 기술이다. 신하가 아무리 섬세한 유세의 기술로도 군주를 설득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곡자는 여기서 불사이군(不事二君), 불사이부(不事二夫)라는 유교적 가치를 부정한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지아비가 지아비답지 못한데도 끝까지 절개를 지켜야 할까? 신뢰는 깨지고 의심만 가득한데도? 도무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면 군주라도, 지아비라도 배반하고 이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배반하고 이별하되 잘해야 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배반의 기술을 말한다.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혁명을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를 ‘저희’(抵?)라 하는데, 틈새를 봉합한다는 뜻이다.

오제의 정치는 틈새를 봉합하여 질서를 잡았고 삼왕의 정치는 봉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업했다. 제후들이 서로 공격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때 이 틈새를 봉합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좋다.(五帝之政, 抵而塞之, 三王之事, 抵而得之, 諸侯相抵, 不可勝數. 當此之時, 能抵爲右.)

위 인용문에서 삼왕(三王)은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윤(伊尹)은 탕(湯)을 도와 은나라를 건국했고 여상(呂尙)은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했다. 귀곡자는 이 두 사람을 대표적인 현인으로 꼽는다.
귀곡자는 혼란해진 나머지 틈이 벌어져 봉합의 조치를 취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만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고 권한다. 지배자들이 이런 파격적 아이디어를 좋아했을 리 없다. 이런 맥락에서 『귀곡자』가 저주받은 고전으로 여겨진 까닭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화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잘 맺고 끊을 수 있는 것은 중요한 미덕이 되었다. 이러한 귀곡자의 생각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더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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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중국’의 부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최근 영화 ‘공자’가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하지만 흥행 성적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후진타오까지 나서서 독려하고 아바타 상영을 제한하는 등 당국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중국에서도 상황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다른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로 뭘 해보겠다는 목적성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중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명국가’ ‘문명중국’이라는 언설이 적잖이 회자된다는 점이다. ‘문명중국’은 정치적으로는 조공체제와, 가치개념으로는 천하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중국 지식인들이 말하는 ‘문명국가’라는 개념은 그들 사이에서는 ‘민족국가’의 대안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명중국’에 관해서 일본의 중국 연구자 다지마 에이이치(田島英一)의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근대의 국민국가 형성은 사(士)·민(民)·이(夷, 소수민족이나 주변국가를 포함) 세 집단을 균질적 국민으로 개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국 국민국가 창성의 특수성에 주목할 경우 거기에서부터 ‘문명중국’(캉유웨이, 康有爲), ‘혈통중국’(쑨원, 孫文), ‘계급중국’(마오쩌둥, 毛澤東)이라는 세 개의 모델추출할 수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중국’ 모델이 종언을 고하고 ‘문명중국’ 모델이 부흥했다. 이것은 공자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계급중국’ 모델의 종언과 ‘문명중국’ 모델로의 회귀가 중국 내외적으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문명중국’으로 사(士), 즉 지식인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은 인민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사실상 개혁개방 이후 구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인민에 대한 삼중의 주변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문명중국’의 출현은 어떤 식으로든 인민들에게 민주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의 이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현재 중국 지식인들이 가장 크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인민의 주변화가 심해지면서 나타나는 대중민족주의의 강화 현상일 것이다.(졸고, 「현대 중국 민족주의 비판」, 역사비평 2010년 봄호)

다음으로는, ‘문명중국’ 안에 자본과 제국에 대한 대안적 의식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 ‘문명중국’ 또는 ‘문명국가’라는 개념 안에 중국의 봉건과 서양의 근대를 극복할 계기로서의 대안문명을 내포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안에 민(民)과 이(夷)의 자리가 있는지, 자본주의의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고민과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 존재 여부는 어찌되었든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중국’이 종료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 어떤 식으로든 신사(紳士)와 같은 미묘한 계급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실체로서의 계급이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생활수준 같은 것에서 생겨나는 계급화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주의를 거쳤어도 수천 년의 계층적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 그것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민두기, 「「중국근대사론Ⅰ」, 지식산업사, 1988) 그러나 문명중국을 유교 그 자체의 회귀로 직결시키는 것은 좀 곤란할 수도 있다. 문명중국이라는 것을 사유방식이나 역사적 전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천하주의에서의 천하도 가치로서의 천하, 그러니까 도덕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또 여기서 문명중국, 유학, 공자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지금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를 박물관에서 다시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혁명을 포함한 근대성에 내재된 목적론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아리프 딜릭, 「역사와 대립되는 문화인가? : 동아시아 정체성의 정치학」, 『발견으로서의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000) 그러니까 유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가치 때문에 그것이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던 신념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전통이 과도하게 과장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서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맥락으로 들어갔을 때 유학에 관한 중국 공산당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국가 시스템체질을 고려할 때 공산당의 정책결정과 그 파급의 범주에서 지식인은 아직까지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진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공산당이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는 데, 그리고 자신의 정치문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유학을 단편적으로만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전면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공산당의 의지가 어떻든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진정 현실을 사유한다면 유학이든 공자든 그 부활이 ‘괴물 자본주의’와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유학이 과연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좀 더 디테일한 고민을 진행해야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민들의 생활과 유학의 부활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청화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캐나다 태생의 학자 다니엘 벨(Daniel A. Bell)은 그의 북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사회주의는 다만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있으며 더 이상 중국 정치의 미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런 진단을 바탕으로 앞으로 20년 내에 중국의 공산당을 의미하는 CCP(Chinese Communist Party)가 중국의 유가 정당을 의미하는 CCP(Chinese Confucian Party)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and Oxford, 2008) 다니엘 벨은 중국의 앞으로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이제 유학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공자와 유교의 부활은 단순히 과거 중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긍정하는 것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중국의 인민과 소수민족의 주변화 문제, 그리고 근대성에 대한 대안 등 현안에 관련해서 말이다. 공자를 현대에 살리기 위해서는, ‘유산’으로서만이 아니라 ‘계획’으로서의 공자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영화 ‘공자’는 이런 점에서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재미가 없더라도 작심하고 봐야겠다. 나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았던 한 낯선 외국인으로서 공자를 볼 작정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인터넷에 돌고 있는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에 자극받아 중국에서 ‘공자’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온다. 공자를 대상화시켜보는 작업은 그래서 중국인에게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역시 필요한 것 같다. 중국, 동아시아인이 공자의 가치관을 집단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공자를 낯설게 또는 외국인으로 보는 작업은 공자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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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를 어떤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가.  

유학, 지금 중국에서의 담론 지형 - 1  

                                                  조경란(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지난 두 번의 칼럼을 통해 나는 한국에서 ‘중국충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리고  ‘문명중국’의 부활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썼다. 중국의 충격과 문명중국의 부활, 그 근간에는 유학이 있다.

중국 경제가 부상하면서 함께 부흥한 것이 바로 유학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지금의 이러한 현상을 직시하고 잘 독해하기 위해서는 유학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객관적으로 관찰,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번 칼럼은 그래서 중국에서 유학과 관련하여 어떤 움직임이 일고 있는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하려 한다.

중국의 전 역사를 통해 공자와 유학은 죽었다 살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만큼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와 유학은 정면이든 반면이든 활용가치가 크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100년 동안의 유학의 극심한 부침(浮沈)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단 지금의 후진타오 정부에서 공자와 유학은 공식 시민권을 얻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마오쩌둥 정권에서는 비림비공(批林批孔)이 상징하듯이 공자와 유학은 정치적으로 봉건의 상징이 되어 철저하게 비판당했다. 그런데 이때 목표는 유학 자체보다는 전통사회에서 신권(紳權)을 가지고 있던 지식인을 근절하는 데 있었다. 지식인을 무력화하여 권력자가 대중을 직접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 차이위엔페이(蔡元培)가 북경대 총장에 부임해 학술자유를 표방하자 보수파 류스페이(劉師培)와 구훙밍(辜鴻銘) 등과 진보파 리다자오(李大釗) 후스(胡適) 루쉰(魯迅) 등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다. '중국현대사상사론'에서 리쩌허우는 이런 민주적 분위기가 5.4신문화운동을 여는 밑거름이었다고 말한다. ⓒ 연합뉴스  


그런데 유학이 중국현대사에서 체계적이면서 전면적으로 비판된 것은 신문화운동에서였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얼마 안 돼 중국 사상계의 분위기는 복고풍이 매우 강하게 일고 있었다. 명목만 공화정이었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왕조 아래의 그것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작동불능의 공화국에 대한 환멸은 루쉰 같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절필과 함께 칩거하면서 탁본으로 소일하게 만들었다. 이에 당시 해외 유학경험이 있는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런 복고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신문화운동이다.

신문화운동의 배경에는 대내외적으로 자본주의 근대화의 전세계적 전개와 그에 따른 중국내의 제도의 변화와 일상의 변화가 있었다. 1차대전 이후 동아시아로 육박해들어오는 근대화의 파고를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었고, 중국에서는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 신학문의 세례를 받은 1세대 지식인들의 집단적 출현이라는 근대사회의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5.4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신식교육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 역할에서 이탈한 신지식인 수는 이미 천만 명에 달했다는 연구가 있다(金觀濤 ․ 劉靑峰, 「新文化運動與常識理性的變遷」, '二十一世紀' 1999年 4月號).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은 신문화운동을 제국주의 열강의 깊숙한 침입을 받으면서 중국의 근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양 제국주의와 유착한 봉건세력에 대응하여 중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하는 객관적 상황에 직면하여 민주와 과학을 모토로 한 신문화운동은 신지식인들만의 리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 운동과도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서구 근대성을 자기네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중국 인민대중의 이해(利害)와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문화운동을 단순히 유학에 반대한 운동으로만 기억하기보다는 그것이 왜 일어났고,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원인을 대내외적으로 넓게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전면적으로 비판받아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시피 했던 유학이 지금 왜 다시 부흥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철학사조 자체의 내재적 접근만이 아니라 한 세기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시공간의 장기변동과 함께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큰 차원의 시야를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만이 중국 지식인들의 고민에 접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내적으로 보면 유학이 중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중국정부는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동아시아 4대용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근대화 모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유학의 잠재력에 주목하게 된다.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적 개방이 본격화되자 유학은 더욱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드디어 중국정부에 의해 유학이 공식적인 시민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베이스에는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아래 있는 국가는 인민의 편이라기보다는 이미 자본의 편에 서 있다. 자본의 에이전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의 유학도 그 어떤 것보다도 발전논리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을 보수주의자보다 오히려 자본이 더 선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중국고전을 중심으로 짜여진 중국 중앙방송의 백가강단(百家講壇)은 국가와 자본의 비호 아래 공전의 히트를 친 프로그램이다. 거기에서 가장 유명 스타가 된 이는 단연 『論語心得』의 저자 위단(于丹)이다.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이 책은 해적판 포함 10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언론에서는 문혁시기 홍바오수(紅寶書, 마오쩌둥의 빨간색 선집)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한 국학 붐에 대해서는 졸문, 국학열풍…21세기 ‘중국의 존엄’ 보여줄까, 『경향신문』, 2008년 8월 21일자 참조)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고전열풍과 관련하여 그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가를 자본, 국가, 문화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는 21세기의 ‘시대적 소임’을 자임하고 있는 '原道'라는 잡지가 있다. 1994년 창간되어 비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내로라하는 중국의 사상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중국의 운명과 유학의 운명을 동일화하여 유학부흥운동을 중국 굴기로 연결시키려는 것이 이 잡지의 목적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논단형식으로 유학대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에 그 결과가 『孔子與當代中國』(陳來, 甘陳 주편, 2008)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유학관련 토론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식인들의 최근 움직임에 내가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에서와 달리 중국에서는 학계의 주류 비주류를 통틀어 우리의 주목을 받을 만한 주요 지식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여기서 이름을 거명하면 다 알만한 그런 사람들, 예컨대 간양(甘陽), 천라이(陳來), 왕샤오꽝(王紹光), 왕샤오밍(王曉明), 왕푸런(王富仁) 등등 좌파적이거나 비판적 지식인들조차 이 문제의 토론에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여기서 다시 신문화운동 시기로 우리의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그때의 신문화운동을 뒤집어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서구에서 들어온 근대 지식에 압도되어 민간학 또는 국학이 위축되었고 이후 100년 내내 한번도 그것을 여유 있게 성찰해보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신유학자들이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단순히 서구에 대한 즉자적 반발의 차원이었는지 등등. 지금 다시 그들이 새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의 차원을 넘어 그 안에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 글에서 그 일단만을 소개하면 신유학자들이 유학을 서양철학의 수용을 통해 현대화한 것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사유방법이 다른 동서 철학 체계상에서 서양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중국의 사유를 다 설명해낼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중국의 유명 학자 정지아동(鄭家棟) 같은 사람은 2004년 일본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석상에서 20세기에 형성된 언어체계와 논술방식으로서의 ‘중국철학’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의 역사적 문맥과 정신적 토양에 진정으로 접합가능한가를 물은 적이 있다. 즉 ‘중국철학’은 진정 중국의 혼백을 가지고 오늘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환경과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 오리지널한 회답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단순히 서양철학의 위조품이나 추수자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의 이러한 쟁점들과 논의의 맥락은 지금 이 시점에서 중국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동아시아를 구상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문제제기는 귀담아 들어야 하는 대목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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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探究]<34> '독창적 짝퉁' 만들어내는 현대판 '수호지의 영웅들' 

중국 최대의 유행어 '산자이(山寨)'를 아시나요? 

지금 중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산자이(山寨)'다. 작년 12월 3일 중국 국영 CCTV가 2분간에 걸쳐 '산자이 문화'를 소개하면서 그 이름이 공식화되었으며 중국인들은 2008년을 '산자이의 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핫이슈가 되었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란 무엇인가? 산자이 문화의 출발은 중국 남부 광뚱(廣東) 지방의 '해적판 핸드폰' 제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행위를 마치 <수호지>에 등장하는 산적패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산촌에 세워놓은 '산채(山寨)'에 비유하면서 이들 '산채'가 마치 독립적이고 폐쇄적이며 세상과 격리되어 있음을 상징하듯 '산자이'도 이른바 '주류'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풀뿌리' 문화와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선이 4개인 '아디도스'

중국에서 이른바 '산자이 문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산자이 현상'은 존재해왔다. 즉 해적판, 짝퉁, 표절 등의 행위가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산자이 현상'은 모방, 희화, 풍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산자이 아디다스'는 선이 3개가 아니라 4개가 되듯이, '산자이 콜라', '산자이 mp3' 등 종류와 내용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산자이 문화'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자이 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인들의 모호한 문화 융합 현상이 나타난다.

2003년을 기점으로 당시 중국 남부의 광저우(廣州), 선쩐(深圳) 등지의 작은 공방들이 전자제품의 복제품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외국 유명메이커 핸드폰의 외관 복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복제품들은 IT기술의 발전에 비례하여 원 제품에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면서 '복제'와는 구별된 '복제+창조'의 새로운 형태의 전자제품들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러한 '산자이 현상'이 확산되자 이른바 '정품(주류문화)'에 대한 '산자이(풀뿌리문화)'의 '창신' 능력을 강조하면서 '산자이현상'이 '산자이문화'로 새롭게 진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침내 2008년 말부터 '산자이 문화', '산자이 기계', '산자이 공장', '산자이 유명스타'처럼 '산자이'가 홍수를 이루면서 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의 복제능력처럼 '주류문화'에 대한 변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지럽게 핀 꽃이 점차로 사람들의 눈을 미혹시키는(亂花漸欲迷人眼)'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한 예로 2007년 '산자이 핸드폰' 판매 댓수는 1억 5천만대로 전체 중국 핸드폰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산자이 현상은 시장경제에서는 필연적이다. '산자이'의 진화는 초기의 '현상'에서 '산업'으로 변하였고, '산업'이 다시 '문화'로 진화되는 중국만의 현상으로 정착되었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복제품'이나 '해적판' 등을 통해 주류문화를 풍자하는 대중의 새로운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산자이 문화'의 본질을 '모방성, 신속성, 대중화'로 규정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전통산업을 파괴하고 '산자이 문화'를 기초로 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산자이 문화'는 일종의 '하위문화'이자 '부차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 다양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반문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류문화'를 보완하는 형식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주류'에 대한 '풍자'가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문화로 발전했다고 해석을 내 놓기도 한다. 소자본 계층에 의해 생산되며 빈곤층에 의해 소비되는 새로운 문화가 바로 '산자이 문화'다.

사실 '산자이 현상'이 '산자이 문화'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방송매체가 제공하였다. 중국 중앙방송이 작년 '춘지에(春節)'때 방영한 '춘지에 완후이(春節晩會)'을 모방한 '산자이 춘완(山寨春晩)'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부터 '산자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작년 한 해 중국의 인터넷을 달구었던 '산자이 춘완'에 대한 관심 고조는 '주류' 프로그램의 '매년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식상 때문이었다. 베이징 근교 스징산(石景山)에 '산자이 디즈니랜드'가 버젓이 정식 영업을 하고 있으며 '산자이 류더화(山寨劉德華)', '산자이주제룬(山寨周杰倫)' '산자이 학교' 등등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산자이 현상'은 산업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금년 3월 정치협상회의 11기 2차 회의에서 정협 위원인 전 중국 중앙방송 아나운서이자 배우인 니핑(倪平)은 중국 정부가 법률과 행정 규제를 통해 '산자이 현상'을 강력한 단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청소년과 국가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묵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산자이 현상'을 다양한 문화의 한 형태로 중국의 특수한 표현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인사들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출판을 총괄하고 있는 류빈(劉斌) 중국신문출판총서서장은 '산자이 문화'가 대중들의 창조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한편 '산자이 현상'을 '짝퉁', 혹은 '해적판'의 의미를 넘어 '주류문화'와 '풀뿌리문화'의 대결형태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산자이 문화'가 이처럼 범람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취약한 법률의식의 전통과 관계가 있다. 중국인들의 속담에 '빨간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불법이라도 대중이 함께 하면 괜찮다는 논리다. 더욱이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후진국이 선진국의 문화를 '베끼는' 일이 '병가의 상사'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베꼈고, 영국은 네덜란드를 베꼈으며, 미국이 영국을 베꼈고, 일본은 미국을 베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선진국도 모두 이러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중국의 '베끼기'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논리다.

둘째, '포용성'과 '다양성'을 용인하는 문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국 문화에는 저변에 '포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흐름이 있다.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문화전통과 13억 인구와 56개 민족, 968만 평방킬로미터라는 방대한 지역, 중국인들에게 '단일성'은 오히려 어색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산자이현상'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산자이 문화'를 "민간 문화의 하나이며 다만 과거와 다른 특징은 새로운 전파수단과 새로운 매체의 형식을 빌어 전파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개혁 개방정책 실시이후 지역과 계층 간의 빈부차이에 대한 '위안'과 무관하지 않다. 산자이제품은 소득이 낮아 중저가의 제품을 선호하는 광범한 대중들의 소비패턴연관돼 있다. 예를 들면 5,000위엔이 넘는 정품을 산자이 제품일 경우 500위엔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저소득층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혁개방의 수혜자인 '주류' 사회에 대한 '풀뿌리'들의 대체 만족감은 정치안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08년부터 시작된 '산자이 문화'는 새로운 문화 조류로 민중들의 보편적인 심리상태 즉 반 주류, 반 이데올로기, 반 엘리트주의라는 풀뿌리 의식과도 관계가 깊다. 말하자면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대로 입장과 관점 및 생활방식이 있기 때문에 정부나 권위 같은 것은 필요 없으며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의식이다. 이 역시 개혁개방 30년이 가져온 필연적인 사상 해방 결과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산자이 문화'는 실제로 '외국 제품' 보다는 오히려 중국 국내 업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따라서 '산자이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한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산자이 문화'는 '주류문화'가 아닌 하위문화이자 부차적 문화임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산자이 문화'는 표면적으로 사회현상이지만 그 형성과 발전에는 필연성과 합리성, 그리고 긍정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류문화에 진입하지 못한 문예작품, 문예형식들이 민간의 문화유산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산채'로 물러나서 소위 '포위망을 뚫고서' 주류문화를 모방을 통해 이를 이용하고 전복시켜야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부차적 문화의 발양에서 분명한 것은 주류문화의 원형이 없이 발전과 붐이 조성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중국의 유명한 화가였던 치바이스(齊白石)의 말이 생각난다. "나를 배우는 자는 살아남지만 나를 베끼는 자는 죽는다(學我者生, 似我者死)"라는 경구를 중국인들은 잊지 말기 바란다.

 



/한인희 대진중국학과 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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