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인문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대학원을 간다.?아니면 이렇게 인문학강좌들으러 다닌다. ?대학원을 간다면 학위까지 받아서 아예 이것만 하고 싶다는 것이다.이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강의를 계속 듣는 것은 직장과 가정 분리된 삶이 계속되기에 나는 불편하다. 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이 불편함이 정리되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열정이 많은 것은 아니고,,,

기억은 중요하다.  똑같은 행동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기억이 없기 때문인가, 있기 때문인가. 뒤늦게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때 나는 망각을 한것인가. 아니면 내 신체의 흔적들이 무의식적인 조종을 한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기억에 문제와 같은 층위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제대로된 질문을 구성한다는 것. 생각을 좀 많이 혹은 정리를 해야한다.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비슷할 뿐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 그 세계를 이해하는 또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있다. 그 세계들 사이를 부유할 뿐 그 섬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게 인간일까. 사람이 경우에 따라서 똑같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냥 비슷할 뿐 이해와 공감. 취향 다만 비슷할 뿐이다. 비슷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사람은 욕심을 낸다. 동일하고 싶어서. 하지만 가당치않다. 그 욕심을 버리면 그나마 분노하지 않을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음시간이면 끝.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안팎으로 족족 죽여라! 중국 유교사상의 완전한 안티 임제스님을 배웠다.  

무위진인  우리를 검열하는 것들을 무화시키고 죽여버려라. 임제스님은 너무나 통렬하게 외친다. 일상의 내모습은 페르소나의 갇혀 답답해 하고 있지만, 그것을 벗어버리는 순간의 자유를 난 대체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오래 노예의 몸의 살다가 그 자유가 두려운 것은 아닌가.  

페르소나를 무조건 벗고 살지는 못한다. 내공이 쌓이면 점점 그 가면의 두께는 얇아지겠지. 내가 더 많이 튀어나오겠지.  일상의 관계 속은 허위의 관계들은  정리하자.  

자기욕망에서 타인의 것을 제거한 나머지의 자기욕망을 발견하기. 그 타자의 욕망도 또 다른 타자의 욕망인 것들. 내 욕망의 끝. 욕망의 들여다 보았을때 너무나 보잘것 없다고 느껴진다.  그 욕망의 덩어리에서 좀더 타인의 것을 제거 하고 나면 내 욕망조차 비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내욕망인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 그동안 시간 중에서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나를 부수면서 제작하기. 내 육체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자의식을 버리기전에 자의식이나 똑바로 보는일부터.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 내가 걷는 것이 길이 된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걸어갈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왕충- 우발성을 강조했던 중국의 유물론자
왕충은 한나라시절의 학자로 동중서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동중서는 춘추번로 ‘왕도통상’ 저작에서 왕은 하늘 아래에서 땅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꿈꾸었던 왕으로 동중서의 논리의 위험성을 파악하여 동중서의 주장은 후세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왕충은 종교적 사유에서 가장 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기우제라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동물세계에 문명이 없는 것은 동물은 문명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동물세계에는 종교가 필요없다. 동물세계에서는 기우제가 없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인간 뿐이다. 그만큼 인간은 나약하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늘이 인간의 정성을 받아들여서 비가올때까지 정성을 쏟는 것이다. 인간은 제물을 바쳐서 비가 오면 우리의 정성이 통했다고 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정성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인간은 불안감으로 그냥 비를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우제는 종교적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재 우리 기독교정신도 기도를 통해서 성사가 되면 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하고, 성사가 되지 않을 때는 나의 정성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 논리 안에서는 그 바깥의 것은 받아들여질 수 가 없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사유를 강력히 거부했던 왕충은 사건은 우발적인 마주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력여하, 원인과 결과로서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걸어가면서 교차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영영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고, 마주칠 수도 있는 법이다.
세계를 보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발성(contingency) 와 필연성(neccessity)일 것이다. 왕충은 당연 우발성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할 때, 인간은 우발적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마주친다(遇)는 것은 능력을 미리 닦아 두는 것도 아니고, 유세할 내용을 미리 갖추아 두는 것도 아니지만 군주의 마음에 우연히 맞게 되기 때문에 마주친다고 한 것이다. 만약 군주의 마음을 헤아려 유세할 내용을 조절하여 존귀한 지위를 얻었다면, 이것은 잰다라고 하진 마주친다고 하지는 않는다. ”  왕충은 마주친다는 것이 미리계획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며 미리 계획된 것에 의하여 마주치는 것은 잰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고 세상일이라는 것이 모두 우연히 발생하고 마주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왕충은 우리가 어떤 길을 갈때 방향성을 가지고 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인 것 같다. 어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도와 노력이 내재된 채로 갈 것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면 서 만나게 되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안고 걸어가야만 한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선한 길을 가라는 것이 왕충의 충고이다. 이 충고는 반대로 원인에도 우리가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결과에 따른 무수한 원인을 추적하고 아니면 인연과 운명을 강조하면 결과를 껴안지 못한다. 원인, 운명보다는 앞서는 것이 우연한 교란현상이 아닐까. 어차피 세상은 나의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냥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왕충에 충고이다. 
 

眞人事 大川命이란 말도 있다. 최선은 다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자신을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찌질한 내 모습, 나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고 한다.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는 것은 그대로 결과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왕충의 사상은 흡사 공사상하고 비슷한 모습을 띤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공사상은 세상일의 결과와 원인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왕충이 우발성의 철학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유하게 만든다. 공사상이 어떤 측면으로는 더 넓은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방법 중에 하나, 우발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수업은 나가르주나(=용수)의 관해서 였다. 나가르주나는 불교철학의 대표적인 공사상의 대가이다. 공사상과 공이 적용된 이후의 우리의 출발점에 대한 의미심장한 수업이였다.
먼저 공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대충은 알것 같다. 공이란 실체없음을 깨닫는 것, 간단히 얘기하면.
 만약 컵이 있다가 없어지면,  컵이 없다는 것은 컵이 있었다는 의식, 기억이 있기에 그 부재가 가능한다. 나가르주나는 집착이라는 것은 있었다는 의식, 기억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면서 세계는 이미 꽉차있다고 설파한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있었던 것에 대한 부재감, 결핍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의식과 기억이 만들어낸 집착에 불과하므로 집착을 없애면 고통은 해소된다. (제대로 내가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나가르주나는 철수가 간다에서 철수를 가는 놈이라는 본성을 가졌다고 보면 간다는 것이 중복되어 오류이고, 가지 않는 놈라고 볼 때는 간다라는 모순이 되기 때문에 둘다 말이 되지 않는 다고 한다. 둘다 철수라는 실체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개가 안친다. 비가 안온다라는 것...니체도 이를 두고 우리가 세계를 명사로 언어로 규정함으로써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집착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상 번개라는 실체는 없기 때문에 번개가 안친다라는 말은 되지 않는 것이다. 공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은 기독교는 동화적인 세계이다. 너의 고통이 언제가 나으리라는 위로, 희망의 메시지를 주면서 유아적인 세계에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불교는 차갑게 얘기한다. 있는 그대로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라고, 세상은 잔혹하고, 내 자신은 너무나 허접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잔혹하지만 그게 진실된 삶을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나의 안경이란 자신이 가진 선입견, 기억, 편견 등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내 자신을 직시할 때 이미 나자신을 버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경멸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자신감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깨트리자. 얼마나 내 자신을 바라보기 두려워하는 나는 찌질이인지... 겁쟁이에다가,, 남들한테 무시받을 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란... 끊임없은 자타를 구분해가면서 일상에서 나의 모습을 한번 보자. 스스로는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형편없기에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안도를 하고 위안을 삼는다. 끔찍한 일이다. 너무나도,,,, 자신은 눈으로 이제 바라보면서 존재의 가벼움을 찢어야 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사는 것인지 그저 너의 눈으로 보라. 타인의 눈으로 왜 자신을 보고 만족해하는가? 남들을 속일지언정 너는 너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은 이제 멈추도록... 더 더 더 허물어져라.  너는 약다. 너는 너무 약아서 덜 허물어지고 덜 고통받으려 하는 것 같다. 너를 죽여라!!!! 
음  내가 자신을 직시하면 끔찍하기 때문에 타인의 눈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어렵지만, 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야겠다.
나가르주나는  실체가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이며, 공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실체없음을 깨닫았을 때 그저 허무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체없음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도,, 가운데가 아니라..
나가르주나는 단견 즉 대상이 불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와 찰나찰나 소멸하고생성된다고 믿는 견해에 대해 둘다를 부정한다. 우리의 자아는 일정한 지속폭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중도인 것이다.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에 꽂혔었는데, 이것은 자기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허무주의, 쾌락주의 간다. 자아는 일정한 지속폭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 지금 나는 변화의 폭이 한번에 크지 않다는 것에 대해 좌절했었는데, 조금씩 변화한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할 때다.
 인중유과론은 원인속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판단할 때 원인과 결과에 지나친 인과성을 부여하거나, 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있다. 우발적인 사건을 치부하는 것이 인중무과론이다. 원인과 결과가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상견과 단견과도 일맥상통한다.  불변하지 않는 대상을 놓고 우리는 대상의 덧없음을 논한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속의 대상을 하나로 고정했기 때문이다. 대상을 불변한다고 생각하면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없고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또한 대상이 매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보면 그것 역시 허무한 일 뿐이다. 이런 허무주의를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한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이렇게 내가 노력했으니까 이런 결과를 가져올것이라는 강력한 믿음들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양극단의 믿음을 탈피하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는것,  세계는 언제나 꽉 차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재현적 사유는 멈추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업을 듣고 나서 생각나는 대로 정리한다.

묵자는 보편적 사랑인 겸애를 강조하였고, 양주는 위아. 공자는 차별적 사랑 인을 강조하였다. 묵자의 겸애와 달리 양주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터럭하나도 뽑지 않는다고 하였다. 개체의 삶을 긍정하는 위아의 정신을 강조했다. 모두가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천하가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장자는 타인과의 연결을 중지했던 학자다. 장자는 공자의 ‘서’정신을 비판한다. 공자의 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라, 또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 배려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와 남이 똑같다는 유아론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나와 남의 욕망이 다를 진대 이것을 같다고 판단하는 자체가 폭력적이다. 장자는 노나라왕과 바다새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를 비판하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코드로 맞추어야 한다. 장자는 조삼모사 에피소드를 통해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의 태도로 타인의 대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대답을 하고 있다. 타인이 오케이 할때까지 타인의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기, 나 자신을 버리기... 이것은 그러면 겸애의 사랑과 어떻게 다를까. 자신을 놓고 타인과 하나로 숨쉬기가 가능할까. 그리고 그 사랑을 타인이 받아들이면 좋은것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 그것이 과연 최선일까.. ?? 잊고 연결하기. 타자와의 소통은 일단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시작해야한다는것이 장자에게 가장 크게 배울점 같다. 하지만 사랑은... ?? 내가 나의 욕망을 버리고 그를 위해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짜 목숨을 건 비약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복불복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 비약. 내가 그를 위해서 희생하고 나의 욕망을 죽이고 그에게 아무리 맞춘다.. 그것은 어쩌면 그런 희생이 타자와 나를 불행하게 하는 씨앗이라면 나의 넘쳐나는 사랑조차도 자제해야 하는 것이 장자가 말한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나를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비범한 일이기도 하고,,,

근데,, 자신을 버린다는 것에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까지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걸까??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정확하게 모르겠다. 자의식을 버린다는 것은 조금 알겠는데.. 
 

요즘 관심있는 공사상도 실체없음. 우리에게 자성이 없음을 인지하는 것이 공사상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자신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타인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의심심장하게 섬세한 감각을 갖고서 반응을 해야될까.. 그럼 그 피로함은 어찌하나. 그래도 비약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되지 않나. (지금 이순간 좀 더 사유가 진행되야하는데,, 또 어물쩡 넘어가네...)

공부하면서 깊게 길을 내가면서 공부하자. 너무 욕심내지 말고 느리게 공부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