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업은 나가르주나(=용수)의 관해서 였다. 나가르주나는 불교철학의 대표적인 공사상의 대가이다. 공사상과 공이 적용된 이후의 우리의 출발점에 대한 의미심장한 수업이였다.
먼저 공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대충은 알것 같다. 공이란 실체없음을 깨닫는 것, 간단히 얘기하면.
 만약 컵이 있다가 없어지면,  컵이 없다는 것은 컵이 있었다는 의식, 기억이 있기에 그 부재가 가능한다. 나가르주나는 집착이라는 것은 있었다는 의식, 기억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면서 세계는 이미 꽉차있다고 설파한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있었던 것에 대한 부재감, 결핍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의식과 기억이 만들어낸 집착에 불과하므로 집착을 없애면 고통은 해소된다. (제대로 내가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나가르주나는 철수가 간다에서 철수를 가는 놈이라는 본성을 가졌다고 보면 간다는 것이 중복되어 오류이고, 가지 않는 놈라고 볼 때는 간다라는 모순이 되기 때문에 둘다 말이 되지 않는 다고 한다. 둘다 철수라는 실체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개가 안친다. 비가 안온다라는 것...니체도 이를 두고 우리가 세계를 명사로 언어로 규정함으로써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집착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상 번개라는 실체는 없기 때문에 번개가 안친다라는 말은 되지 않는 것이다. 공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은 기독교는 동화적인 세계이다. 너의 고통이 언제가 나으리라는 위로, 희망의 메시지를 주면서 유아적인 세계에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불교는 차갑게 얘기한다. 있는 그대로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라고, 세상은 잔혹하고, 내 자신은 너무나 허접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잔혹하지만 그게 진실된 삶을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나의 안경이란 자신이 가진 선입견, 기억, 편견 등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내 자신을 직시할 때 이미 나자신을 버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경멸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자신감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깨트리자. 얼마나 내 자신을 바라보기 두려워하는 나는 찌질이인지... 겁쟁이에다가,, 남들한테 무시받을 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란... 끊임없은 자타를 구분해가면서 일상에서 나의 모습을 한번 보자. 스스로는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형편없기에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안도를 하고 위안을 삼는다. 끔찍한 일이다. 너무나도,,,, 자신은 눈으로 이제 바라보면서 존재의 가벼움을 찢어야 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사는 것인지 그저 너의 눈으로 보라. 타인의 눈으로 왜 자신을 보고 만족해하는가? 남들을 속일지언정 너는 너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은 이제 멈추도록... 더 더 더 허물어져라.  너는 약다. 너는 너무 약아서 덜 허물어지고 덜 고통받으려 하는 것 같다. 너를 죽여라!!!! 
음  내가 자신을 직시하면 끔찍하기 때문에 타인의 눈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어렵지만, 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야겠다.
나가르주나는  실체가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이며, 공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실체없음을 깨닫았을 때 그저 허무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체없음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도,, 가운데가 아니라..
나가르주나는 단견 즉 대상이 불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와 찰나찰나 소멸하고생성된다고 믿는 견해에 대해 둘다를 부정한다. 우리의 자아는 일정한 지속폭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중도인 것이다.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에 꽂혔었는데, 이것은 자기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허무주의, 쾌락주의 간다. 자아는 일정한 지속폭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 지금 나는 변화의 폭이 한번에 크지 않다는 것에 대해 좌절했었는데, 조금씩 변화한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할 때다.
 인중유과론은 원인속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판단할 때 원인과 결과에 지나친 인과성을 부여하거나, 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있다. 우발적인 사건을 치부하는 것이 인중무과론이다. 원인과 결과가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상견과 단견과도 일맥상통한다.  불변하지 않는 대상을 놓고 우리는 대상의 덧없음을 논한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속의 대상을 하나로 고정했기 때문이다. 대상을 불변한다고 생각하면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없고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또한 대상이 매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보면 그것 역시 허무한 일 뿐이다. 이런 허무주의를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한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이렇게 내가 노력했으니까 이런 결과를 가져올것이라는 강력한 믿음들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양극단의 믿음을 탈피하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는것,  세계는 언제나 꽉 차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재현적 사유는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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