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삶의 모순과 철학의 위안
김시천 지음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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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는다고 하니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기본적으로 나는 마음의 위안 따위를 경계하는 입장이라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태도는 성서를 읽는다는 평범한 교인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위해 성서를 읽는다. 문제는 그런 독해가 심각한 오독의 가능성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기 위해 읽기. 그런 읽기는 특정 부분만 닳고 닳도록 주무른다. 마치 관광지에서 특정 부위로 유명한 동상을 만지는 것처럼. 복을 바라는 저 손길!

 

흥미롭게도 그런 신앙인들은 교회 밖에서도 발견된다. 동양철학이라는 분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유가'에 경도된 사람들은 주희의 주석을 보석처럼 받드는 반면, '도가'에 경도된 이들은 주석 따위는 별로 상관치도 않고 생태니 자유니 하는 말을 멋대로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공통점은 자구 해석에 집착한다는 점인데 이는 마치 성서에 한 점 오류가 없음을 주장하는 저 신앙인들에 비견할만하다. 그러니 역사니, 해석이니, 문헌 비평이니 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만한 게 아니다.

 

《노자》를 좀 공부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대중들이 그토록 《노자》를 사랑하면서도 그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삼키기 쉬운 유동식 마냥 잘 가공된 《노자》에 젖었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노자》의 본 모습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노자》가 사실은 권력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을 제공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벽창호가 되어 버리곤 한다.

 

대체 왜 이런 것일까? 그것은 이른바 '동양 철학'을 소비하는 특정한 버릇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연, 자유, 평등, 생태... 이런 개념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읽을 길은 없을까? 나에게는 저 말들이 내용없는 껍질처럼 느껴진다. 마치 십자가 아래 부르짖는 공허한 소리들 처럼. 그런면에서 이른바 노장철학이라는 것을 대중적으로 소비하는 데 기독교적 관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여러 곳에서 발표한 논문을 묶어서 한 권의 책이라기 보다는 논문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나름 한 권의 책 구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나 아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장점이 많은 책이다. 《노자》와 《장자》를 공부한다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은 뒤 《노자》나 《장자》를 읽을 욕망이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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