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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서영 옮김 / 명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친구들과 발리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드디어 떠난다는 감격에 젖은 우리들은 발리행 비행기에서 발리하이라는 낯선 맥주로 자축하기로 한다. 하지만 처음 마셔보는 그 맥주의 맛은 향이 매우 강해서 끝까지 마시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발리 맥주 맛은 왜 이래? 하고 실망한 우린 다시 익숙한 이름의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며칠이 지나자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비릿한 듯 느껴졌던 발리하이 맥주가 너무 맛있어진 것이다. “한국음식엔 한국 맥주죠!”라는 요리사 밍 차이의 말은 진리였던 것이다. 그 곳의 바람과 그곳의 음식에는 발리하이가 너무나도 제격이었다. 결국 우린 오는 비행기 안에서 발리하이를 너무 맛나게 마셔대며 더 사가지고 가야하지 않을까 하고 까지 고민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에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은 그가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한 얘기인데, 첫번째 부분은 그리스의 수도원 지역인 아토스 반도를, 두번째 부분은 터키 전역을 지프를 몰고 여행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자는 물론 암컷 짐승까지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그리스 정교의 성지 아토스 반도의 수도원은 손님을 맞으면 달콤한 그리스 커피와 소주 같이 독한 술인 우조, `이가 빠지고 턱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달디단 루크미라는 과자를 준다. 처음엔 전혀 먹지 못하던 하루키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삼총사를 그리워하게까지 된다. 피곤한 하루일수록 이 삼총사는 맛나게 느껴지는 거랄까. 운동을 심하게 하거나 한 날이면 몸에서 당분을 원하는 게 느껴지듯, 하루종일 괴퍅한 날씨와 험한 길에서 시달리고 들어온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절판된(도대체 이 책을 왜 다시 찍어내지 않을까 하고 모두가 의아해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은 독자라면, 시니컬한 하루키의 표현 하나하나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천염천>은 책값에 비해서 너무 얇고 짧은 데다가 문체마저 건조해서 처음엔 실망을 안겨주지만, 그 모든 실망을 한큐에 보상해주는 것 같은 부분이 몇 개 나온다.
유난히 군인이 많은 나라 터키의 국경지대를 지나다가 심각한 검문을 당하는 하루키 일행, “당신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는 한마디에 전세는 역전된다. 의외로 활짝 웃으면서 장교가 허락했기 때문. 그뿐 아니라 가라데 유단자인 일행이 가라데를 4년 동안 연습해왔다는 병사의 자세를 교정해주기까지 하는데, 이걸 두고서 하루키 왈, `본고장에서 온 일본인이 가라데 기본자세를 잡아준다는 것은 마치 미시시피 출신의 흑인에게 블루스 기타 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알란 라드에게 권총을 빨리 쏘는 법을 배우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는 감동에 겨워 몸을 떨고 있다’라고. ^^
그는 말한다. 여행의 본질이라는 것은 공기를 마시는 일이 아닐까, 하고. 터키의 공기는 그 어느 곳과도 다른 뭔가 특수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고 나는 대답한다. 서울의 탁하면서도 정겨운 공기는 파리의 매캐하면서도 뭔가가 들어있는 듯한 공기와 분명 다르다. 뉴욕의 복잡하면서도 들뜨는 공기와 발리의 행복하고도 달콤한 공기의 맛이 다르듯.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떠나는 게 아닐까. 먼 곳의 공기의 다른 감촉을 혀끝에 느끼고, 그 기억을 뇌에 저장하고, 돌아와서 그 감촉을 머릿 속에서 되새기곤 또 다른 출발을 계획하는 게 아닐까. 하루키 덕분에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물론, 아토스 반도는 성전환 전에는 가지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