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의 교훈’을 넘어가기 전에 지젝의 ‘혁명론’을 정리한다. 이 연재의 보폭을 조정할 때 가끔씩 쓰고 있는 일종의 ‘간주곡’이다. 더불어 그건 이제 ‘잊힌 혁명’이 돼가고 있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잠시 상기해보고 싶어서다. 구력으로 10월 25일에 일어났기에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혁명 이후 채택된 신력으로 러시아 혁명일은 11월 7일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조차 이미 수년 전에 국경일에서 제외되었다.
지젝의 전 방위적 ‘이론투쟁’은 간단히 도식화하자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라는 이행의 궤적을 그린다. 이러한 이행의 중요한 계기는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새로운 사유가 아닐까 싶은데, 이 경우 레닌은 “마르크스는 괜찮아, 하지만 레닌은 뭐야?”라고 할 때의 레닌이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에서 지젝은 한마디로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다시 따져 묻는다. 그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용인된다.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달라. 지국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이미 지난 회에 오늘날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저항’의 태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항’과 ‘관용’은 이미 지배적 태도에 포함돼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관용은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유지되며, 이것이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입장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키는데,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 혹은 과잉 근본주의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 현상이다. 즉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 즉 ‘정치경제학’에 대한 통찰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즉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포는 미덕의 발현체이며,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이 조국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혁명적 폭력’ 혹은 ‘공포정치’가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긴박한 상황적 요구에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에게서 혁명적 폭력은 정확히 전쟁과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지젝은 덧붙이는데, 실제로 루이 16세는 체포되기 며칠 전에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프랑스와 유럽 국간들 간의 대전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왕은 애국자연하면서 프랑스 군대를 이끌다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고 그의 권력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평화로운’ 루이 16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유럽을 전쟁으로 내몰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렇게 바꿔서 질문한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그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지적한 대로 자코뱅의 급진적 테러는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히스테리적인 행동화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진다. “여성의 자기-조직화에서부터 모든 늙은이가 평화와 존엄 속에서 말년을 보내는 공동체 가족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응축된 열광적인 활동”이 진정한 혁명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진정한 혁명의 순간은 1917~18년의 봉기도 아니고 이어진 내전 상황도 아닌, 1920년대 초반에 새로운 일상생활의 의례들을 창안하려고 했던 강력한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그것을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라는 것이 요점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한다. 사실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쩌둥 자신에 의해서 소요 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한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가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시각이다. 따라서 마오의 사례에서도 얻게 되는 교훈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베케트)이다.
정리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지젝이 보기에 양자는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 형태는 거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지젝은 <국가의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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