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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상징적인 명령들을 떠맡는다든지, ‘신중하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기능하고는 있지만 그는 아버지가 되기, 기타 등등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정한 흐름의 아이러니하고/반성적인 언급에 그 자신의 기능을 곁들이고 있다.(<실재계 사막>,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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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내가 이런 걸 꼭 해야 돼?”라면서도 마지 못하는 척하는 것, 그것이 냉소주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전적으로 수임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게 떠맡지 않으면서도 수행한다.”
인용문의 뒷문장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끔 번역돼 있는데, 아버지 되기, 곧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걸 예로 든다면, 일단 아버지로서의 역할, 아버지의 기능은 수행하되, 거기에다 온갖 불만과 투정을 덧붙인다는 말이다. “내가 아버지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수작이야?!”라는 식의 ‘아이러니하고/반성적인 언급’을 덧붙인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아버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내가 진짜 때려치우고 말지!” 등 한국 사회의 상투적 불평은 이런 냉소주의의 대표적 발현이다(물론 진짜로 그만두고 때려치운다면 사정은 달라지지만, 알다시피 그런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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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젝은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슈렉>(2001)을 든다. “최근의 꿈작업을 애니메이션한 블록버스터 <쉬렉>이 이런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을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라는 번역문은 역자가 <쉬렉>(이하 <슈렉>)을 보지 않았을 뿐더러 영화에도 무관심하다는 걸 보여주는데, ‘꿈작업’이라고 옮긴 ‘Dreamworks’는 알다시피 영화사 ‘드림웍스’를 가리킨다. “드림웍스의 최근작 블록버스터 <슈렉>은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지배적 기능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도로 다시 옮길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도 번역본만 참조하자면 많은 교정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동화의 줄거리(주인공과 그의 코믹한 조력자가 용을 패배시키고 공주를 구한다)가 “장난스런 브레히트풍의 ‘외생성’이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때, ‘외생성(外生性, extraneation)’이란 생경한 말은 맥락상 ‘생소화’나 ‘소격효과’, 혹은 더 일반적으로 ‘낯설게하기’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다.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에게 “웃으세요!(Laugh!)” “정숙!(Respectful silence!)”이라고 ‘자발성’을 유도하는 지시사항이 하달되는 게 그런 사례다.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글로벌 에티켓’을 안내하는 전단지 내용도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겁먹지 말고 Hello하라, 지하철에서는 통화도 소곤소곤, 지나가다 부딪혔을 땐 미안합니다, 쓰레기는 휴지통에’ 같은 사항을 시민들이 숙지하자는 것인데, 물론 <슈렉>과 마찬가지로 코미디에 해당한다.
지젝은 <슈렉>에 나오는 몇 가지 사항을 더 나열하는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급변의 옷’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틀기(politically correct twists)’를 뜻한다. ‘정치적 올바름(PC)’이란 기준을 적용해서 비틀었다는 얘기다. 가령, 슈렉과 피오나가 키스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신한 것은 추한 도깨비이며, 통통한 평범한 소녀로 변신한 것이 아름다운 공주이다”라는 번역문은 엉뚱한 ‘변신’ 이야기다(‘prince’가 ‘공주’로 바뀌었으니!). 사소한 대목이지만 원문은 “it is not the ugly ogre who turns into a beautiful prince, it is the beautiful princess who turns into a plump ordinary girl”이다. <슈렉>을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영화에선 “못생긴 괴물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주가 뚱뚱하고 흔한 소녀로 변했다”. 남녀 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선 그걸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덧붙여 <슈렉>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과 대중문화에 대한 풍자와 여러 가지 뒤집기도 시도한다. 하지만 지젝의 평가는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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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전치와 재기입을 ‘전복’이 가능한 것으로 너무 쉽게 칭송하는 대신에, 또한 <슈렉>을 또 하나의 ‘저항장소’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이런 모든 전치를 통하여 동일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전치와 전복의 진정한 기능은 정확히 전래의 이야기를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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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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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슈렉>이 보여주는 건 다르다. 영화 피날레에 흐르는 노래는 몽키스의 1960년대 히트곡 <나는 신자다(I'm a believer)>를 다시 부른 것이다. 즉 슈렉 버전의 ‘나는 신자다’. 지젝이 보기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자가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계속해서 실행에 옮기면서,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의 밑에 깔려 있는 구조로서 그런 믿음에 의지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고 있다.”(135쪽) 믿음에 대한 냉소주의적 조롱은 따라서 그 믿음과 적대적이지 않다. 차라리 공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조롱은 우리의 믿음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버팀목이다. “거지같은 나라!”라는 푸념이 우리를 계속 이 땅에 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은 과거 동독의 상황을 예로 든다. 좋았던 시절에도 동독에서는 한 사람이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신념과 지성, 그리고 정직성이 그 세 가지다. 신념과 지성을 가진 인간은 정직하지 않았고, 지적이고 정직한 인간이라면 신념이 부족했으며, 신념을 갖고 있는 정직한 인간에겐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라고 지젝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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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패권주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동시에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은 어리석든가 혹은 타락한 냉소자다.”(<실재계 사막>,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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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you cannot be both intelligent and honest)”라는 표현은 두 가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확한 번역이다. 부분부정이므로 “당신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정직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당신이 지적이라면 정직하지 않을 테고, 정직하다면 지적이지 않을 테다. 그래서? (1)지배 이데올로기를 믿는 정직한 ‘멍청이’거나 (2)그걸 믿는 똑똑하지만 ‘타락한 냉소주의자’일 거라는 얘기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