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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공식이 선과 악의 그 어떤 신중한 정의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특히 강조해야겠군요. 이런 경우에 ‘타자에 대한 존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적과 전쟁 중일 때라든가, 어떤 사람 때문에 여자한테서 잔인하게 버림을 받을 때, 평범한 예술가의 작품을 판정해야 할 때, 과학이 반계몽주의파와 마주할 때, 등등이죠. 매우 흔히 유해한 것, 악이 되는 것, 그런 것이 ‘타자들에 대한 존중’이 됩니다. 특히나 주관적으로 정당한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 타인들에 대한 저항이 되거나 혹은 타인들에 대한 증오가 될 때입니다.(<실재계 사막>, 129~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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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은 직독직해식인데, 바디우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주 유해하며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특히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동’일 때 그렇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교전 중인 상황에서 타자를 존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다른 남자 때문에 사정없이 차였을 때 타자를 존중한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그럴 땐 타인들에 저항하고,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동 아닌가? 이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은 바디우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그의 논리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증오나 거짓으로 치장된 지혜 같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를 단순히 그런 범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그 혹은 그녀 속에는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절대자가 들어 있다.” 즉 각자는 어떤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걸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지난 21회분의 마지막 대목에서 ‘limit of the Other's radical Otherness’를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라고 옮겼는데(번역본에서는 ‘대타자의 근본적인 타자성의 한계’), 여기서 ‘limit’를 그냥 ‘한계’라고 옮기는 건 의미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극한’이 더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심연(abyss)’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래서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이라는 어떤 극한을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니던가?”로 정정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즉 그러한 근본적 타자성을 존중하지 않고 바디우처럼 ‘주관적으로 정당한 행동’을 옹호할 경우에 도달하게 되는 결과는 20세기 전체주의의 과오를 다시 답습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디우는 공산주의의 테러를 곧바로 지지하지 않느냐, 는 것이 바디우의 ‘타자성 존중’ 비판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지젝은 바로 그런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시즘을 예로 들자면, “과연 우리는 히틀러의 인격이 그의 모든 악한 행위 밑에 숨겨두고 있는 근본적인 타자성의 심연에 대해 존중해줘야 하는가?”(131쪽) 즉 ‘타자성의 존중’이란 맥락에서 히틀러의 인격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타자성’ 또한 존중해야 한다면 이 또한 자가당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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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통일과 평화가 아닌 칼과 분할을 가져오게 되었는지 그의 유명한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나치 그들의 인간성을 포함하여 다름 아닌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무자비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그들과 싸워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홀로코스트에 관해 흔히 인용된 유대인의 말(“누군가가 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하면 그는 인간성 전체를 구하는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보충되어야 한다. 즉 “누군가가 인간성의 단 하나의 진정한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간성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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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서 ‘인간성’은 ‘humanity’의 번역인데, ‘인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용이할 듯싶다. 곧 “누군가 인류의 진정한 단 하나의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정한 윤리적 시험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듯 희생자들을 구하려는 태도뿐만 아니라 그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려는 일에도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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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조금 바꿔서 나이트 샤밀란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2000)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이 이렇게 설정돼 있는 영화다. “필라델피아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발생한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하여 131명이 현장에서 즉사한 대형 사고였지만 놀랍게도 한 명의 생존자가 발견된다. 바로 대학교 풋볼 스타디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데이비드 던이다. 데이비드는 대학 시절 영웅처럼 떠오르던 스타 선수였으나, 자동차 사고로 선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다. 놀라운 것은 그때의 사고에서도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났다는 점이다.”(시놉시스 참조)
그러니까 내용만 보자면, 유치하고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다. 하지만 형식적으론 잘 만들어진 심리극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지젝은 주인공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의 호명, 상징적 임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본다. 그의 아들이 총으로 쏴서 아버지가 진짜 무적이고 불사신인지 확인하고 싶어 할 때 그는 거절한다. 어째서인가?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진짜로 자신이 불굴의 존재라는 사실이 입증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지젝은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동일한 딜레마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불사조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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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우리는 키르케고르와 바디우를 연결해봐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동물이 자신의 인생을 생식과 쾌락추구라는 어리석은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진실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틀림없이 상처를 주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 나타내는 우리의 후기 이데올로기 세계에서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다.(<실재계 사막>,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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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서 ‘그러나’란 접속어는 불필요하다. 그리고 ‘진실’은 ‘진리(Truth)’로, ‘후기 이데올로기 세계’는 ‘소위 탈이데올로기적 세계’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다. 다시 옮기면, “인간이란 동물이 자기 삶을 단지 생식과 쾌락추구의 어리석은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진리를 위한 복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외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소위 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이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