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재계 사막>의 3장 ‘9․11 이후의 행복’을 읽어볼 차례다. 키워드는 물론 ‘행복’이다. 정신분석에서 행복은 ‘욕망의 배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정확히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를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본다.

일단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충족되어선 안 된다. 과도한 소비는 불행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바닥나는 물건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을 때 만족감이 높아진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일이 잘못됐을 때 비난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당(黨)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모든 건 ‘그들’ 잘못이었다. 끝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진 않은 조건으로 ‘다른 장소(Other Place)’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동유럽인들에겐 소비 천국으로서 서구가 그 다른 장소였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그곳을 그들은 꿈꾸었고 때로 방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은 결국 욕망에 의해 끝장나고 만다. 욕망은 그들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도록 부추겼고 결국은 절대 자수가 예전보다 덜 행복한 체제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화된 동유럽의 실상이다.  

 


 

행복은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존재의 범주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불확정적이며 불일치적이다. 그것은 이교도적 개념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건 이교도들이다. 종교적 경험과 정치 활동이 행복의 최고 형태로 간주된다. 지젝은 전 세계를 돌며 행복의 복음을 전하는 데 성공을 거둔 달라이 라마가 특히 미국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이야말로 행복의 추구를 제일의 관심사로 삼고 있는 제국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행복’은 쾌락원칙에 속하며, 행복을 잠식하는 것은 쾌락원칙 너머에 대한 요구이다.

다시, 라캉적 의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주체 자신의 욕망의 결과와 충분히 대면하지 못한 그의 무능력과 준비 부족에 의지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행복의 대가는 주체가 그의 욕망의 모순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17~118쪽). ‘욕망의 모순’이라고 한 건 ‘inconsistency of desire’의 번역이다. 욕망의 불일치, 혹은 욕망과의 불일치라고 옮길 수 있을까.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체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것은 최악의 일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행복이다. 지젝이 드는 예는 이런 것이다.   

 

   
 

오늘날 좌파가 분명히 충족시킬 수 없는 요구로서 자본주의 체제에 불평공세를 퍼붓고 있을 때(완전고용! 복지국가를 유지하라! 이민자들에게 완전한 권리를!), 그것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인 도발을 게임하는 것인데, 주인으로서는 들어줄 수 없게 되어 그의 무능을 폭로하게 될 그런 요구를 해대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 체제가 이런 요구들을 들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부가하여 그것들을 입 밖에 내는 사람들도 그것들이 실현되길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실재계 사막>, 118쪽)

 
   

  

 

그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인 68혁명의 모토, “현실주의자가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이다. 냉소적이고 악의적인 의미로 다시 읽자면 이렇게 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좌파 학자인 우리들은 비판적으로 보이길 원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체제가 우리에게 제공한 특권을 마음껏 즐기자. 이 체제에 불가능한 요구로 불평공세를 퍼붓자. 우리는 이런 모든 요구들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다는 것과 우리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119~120쪽) 이것은 ‘강단 좌파’에 대한 짓궂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름의 진실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저항’이다. 소수적 성과 인종, 생활양식의 ‘다중’의 시학이 중심화된(자본화된) 신비한 권력에 저항한다. 물론 한국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에서 우파 생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저항한다. 그렇듯 저항이 오늘날 규범이 되었다면, 바로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지배적인 관계에 실질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담론 출현의 장애물 아닌가, 라고 지젝은 묻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러한 패권주의적 태도의 핵심을 공략하는 것이다. 거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란 개념이다. 지난 세기의 교훈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어떤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지난 마지막 세기의 강의는 정확히 대타자의 근본적인 타자성의 한계가 아닐까? 우리는 대타자를 우리의 적으로, 허위 지식의 소유자로, 기타 등등으로 환원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항상 그 혹은 그녀 속에는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절대자가 들어 있다.(<실재계 사막>, 130쪽)

 
   

 

인용문의 첫 문장은 “[I]s not the lesson of the last century that (...) we should respect a certain limit - the limit, precisely, of the Other's radical Otherness?”를 옮긴 것이다.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닌가?” 정도로 다시 옮길 수 있다. 이 교훈의 의미는 다음 회에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성좌(배치)와 관련하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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