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날 주체성의 주된 자유주의 방식이 호모 사커(Homo sucker)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실재계 사막>, 136)라는 구절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패러디한 것이 ‘Homo sucker’이니 운을 맞추기 위해서 ‘호모 서케르’라고 부르겠다(역자는 둘 다 ‘호모 사커’라고 음역해놓았다). ‘sucker’란 말이 원래 무얼 빨아대는 사람, 곧 ‘흡수자’를 뜻하는 만큼, ‘빨아대는 인간’ ‘빨판적 인간’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나는 오늘날 지배적인 자유주의의 주체성 양식이 ‘호모 서케르’라고 말하고 싶다(I can risk the claimm that the predominant liberal mode of subjectivity today is Homo sucker)”.

호모 서케르는 어떤 인간인가? “타인들을 착취하고 조작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이 젖먹이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인간이다. 요컨대 타인을 착취하고 빨아먹으려고 하지만, 결국엔 그 자신이 먹잇감이 되고 마는 인간이란 얘기다. “우리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들에 대한 그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지적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냉소주의가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해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도에서 지젝은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다. 첫째 “우리는 대타자를 ‘믿을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 변형시키면서 그 또는 그녀한테 우리가 유지할 수 없는 순진한 신뢰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37쪽). 둘째 “우리가 그 적에게 미리 어떤 영토를 부여해주기는커녕 ‘본래부터’ 그 적에게 속해 있던 것처럼 보인다는 그런 관념에 대해서도 싸워야 한다”(139쪽).

다시 풀어보자. 첫 번째 교훈으로, 우리가 지탱할 수 없는 믿음을 대타자에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믿음을 대타자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서 자살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살이란 행위 자체를 수단으로 그 믿음을 입증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내 자신이 죽음으로써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게 되겠죠.” 실상은 생각보다 복잡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로 지젝은 소련의 작가동맹 의장이었던 작가 알렉산드르 파데예프를 든다. <궤멸>을 쓴 원조 스탈린주의자(arch-Stalinist)인데, 그는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듣고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흐루시초프가 폭로한 스탈린 체제의 부정과 부패가 과연 그에겐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정황상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내용이 그에겐 하등 새로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믿고 있었던 것은 ‘대타자’다. 그 대타자, 곧 사회주의의 공적인 외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버린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영 그 자체의 ‘수행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절망은 그 환영이 붕괴에 대한 절망이자 그에 대한 충실성의 제스처다. 지젝이 제시한 다른 사례에 견주자면, 그는 “자신의 정직한 무지의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자살했다”.  

 


 

두 번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지젝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알랭 바디우는 그런 서부극을 윤리적 용기의 위대한 장르라고 칭송했다. 그러한 용기의 사례로 지젝이 드는 것은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유마행 3시 10분 열차>다(제임스 맨골드 감독에 의해 <3:10 투 유마>(2007)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영화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한 농부(반 헤플린)가 가뭄 때 가축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200달러 때문에 현상금이 붙은 악당 보스(글렌 포드)를 호텔에서 유마행 호송열차까지 에스코트하는 일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기로 했던 이들은 보스를 구하려는 일당이 호텔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두 떠나버린다. 악당은 농부를 회유하기도 하고 위협도 해보지만 농부는 꿋꿋이 자기 일만 충실히 수행한다. 이미 역을 떠난 기차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악당과 농부는 보스를 구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부하들과 마주친다. 농부에겐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순간 악당은 돌연 그에게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날 믿으시오! 우리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립시다!”

마지막 악당의 말은 “Trust me! Let's jump on the wagon together!”를 옮긴 것인데, 마차에 같이 올라타자는 뜻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시련을 겪어내고 있던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악당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농부의 성실함에 설복되어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다.” 지젝은 바로 이런 상황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나 제3세계의 군중들이 그들의 혁명적인 임무를 비겁하게 저버리고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방법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진보적인’ 서양의 지식인들이다.(<실재계 사막>, 141쪽)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는 표현은 ‘판결을 내리다’란 뜻이다. 그것은 우월한 식견과 지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정작에 시험에 드는 인물은 그 지식인들 자신이다.  

 

   
 

1980년대 말에 유고슬라비아 서민들이 매혹적인 민요에 빠졌다고 해서 비난하는 안락하고 높은 보수를 받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급진적 좌파’라는 불쾌한 인물을 들어보자. 실제로 시험을 치르고 후기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오해로서 그 시험에 비참하게 실패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급진적인 좌파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서민들’은 ‘유고슬라비아 대중(the Yugoslav masses)’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매혹적인 민요’는 ‘ethnic siren songs’를 옮긴 것인데, ‘사이렌의 노래’란 유혹을 뜻하므로 ‘민족주의의 유혹’ 정도의 뜻이 아닌가 한다. 곧 1980년대 말 유고의 대중들이 민족주의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고 안락의자에 앉아 맹비난하며 개탄하는 유럽의 급진 좌파야말로 정작 시험대에 오른 처지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에 벌어진 내전에 대해서 오판을 저질렀다. 이러한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다. 9·11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항상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결여돼 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 비판의 내용은 다음 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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