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진창’이라는 대목까지 읽었다. 우리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제도적 민주주의는 늘 부패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민주주의는 없다”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묵묵히 따르는 지혜로서 이런 부패를 용인하고 시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민주주의의 부패와 그를 제거하려는 우파의 캠페인 사이의 악순환을 깨버리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의 대안을 공식화하는 그런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실재계 사막>, 148~149쪽) 간단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의 부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정식화할 것인가, 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물론 그 ‘대안’이란 것을 어디서 찾느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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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지젝은 이 대목에서 ‘러시아적 동일성(Russian identity)’ 같은 ‘반동적인’ 개념에서 해방적 잠재성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러시아적 동일성’ 혹은 ‘러시아적 정체성’이란 말은 러시아가 유럽과는 다른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한 관념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시가 표도르 츄체프(1803~1873)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이다. 한국어 번역과 영어 번역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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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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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 특이성은 러시아어에서도 발견되는데, 지젝은 서구의 한 가지 용어에 대응하는 러시아어 단어가 두 개씩 있는 사례를 든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의미가 가미된 ‘절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가령 ‘진실(truth)’에 대응하는 러시아어 단어는 ‘이스찌나(istina)’와 ‘프라우다(Pravda)’ 두 가지가 있다(구소련 공산당의 기관지명이기도 한 ‘프라우다’는 ‘프라브다’라고 읽는 게 맞지만 ‘프라우다’로 통용됐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적는다). ‘이스찌나’는 사실에 부합한다는 의미, 곧 일상적 의미의 진실이란 뜻이고, ‘프라우다’는 대문자 진실(Truth), 곧 절대적 진실/진리를 가리킨다.
‘자유(freedom)’를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도 두 가지가 있다. ‘스보보다(svoboda)’는 기존의 사회질서 안에서 통상적인 선택의 자유를 뜻하고, ‘볼랴(volja)’는 좀 더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 절대적인 충동(drive)으로서의 자유, 자기 파괴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러시아인들이 유럽인들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너희는 ‘스보보다’를 가졌지만, 우리는 ‘볼랴’를 갖고 있다.”
‘국가(state)’를 가리키는 말도 두 가지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행정 기관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은 ‘고수다르스트보(gosudarstvo)’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권력 기관을 뜻할 때는 ‘제르자바(derzhava)’를 쓴다. 영어의 ‘지식인(intellectuals)’과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의 구분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데, 인텔리겐치아는 사회 개혁의 특별한 사명에 헌신하는 식자층을 가리킨다(19세기의 식자층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정도의 지식 계급을 뜻했다). 지젝이 보기엔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도 같은 맥락에서 노동 계급과 구별된다. ‘노동 계급(working class)’이 단순히 사회적 존재의 한 범주를 뜻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진정한 혁 명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도 마찬가지의 구분법을 보여주는데, 지젝은 이것을 러시아어 개념쌍에 적용한다. 그런 경우 ‘프라우다’는 ‘진리의 사건’이고, ‘볼랴’는 ‘자유의 사건’이다. ‘이스찌나’와 ‘프라우다’가 일치하리라는 존재론적 보장은 없다. 그 사이엔 틈새가 있다. 그 틈새를 표시하는 러시아어 단어에 ‘아보스(awos)’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아마도’이지만, ‘우리의 운에 따르는(on our luck)’ 어떤 것을 가리킨다. 레닌이 자주 인용한 나폴레옹의 말로는 “우리는 공격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on attaque, et puis on verra)"가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의 흥미로운 특징은 위험을 무릅쓰는 적극적인 태도인 의지주의에 더욱 근본적인 숙명론을 결합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1쪽) 일단 저지르고 나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태도다. 여기서 ‘의지주의’는 ‘voluntarism’의 번역이다. ‘주의주의’라고도 옮기는데, 지성보다는 자발성과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 나폴레옹-레닌의 문구는 그러한 의지주의와 근본적인 숙명론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결합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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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가 정확히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어찌 될 것인가? 그것은 오늘날의 전 세계적인 ‘자발적 이데올로기’가 갖는 두 가지 얼굴처럼 서양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의 숙명론과의 사이에서 우리가 분열되어 있는 것과 같다.(<실재계 사막>,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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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없지만, ‘그것은’이 가리키는 것은 ‘오늘날’이다. 서양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의 숙명론 사이에서 분열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게 필요한 자세는 의지주의와 숙명론의 그러한 결합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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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이 드는 사례, 정확히 반례는 네덜란드의 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 핌 포르튠(Pim Fortuyn)의 죽음이다. 그는 2002년 5월초, 자신이 20퍼센트 정도 득표할 것으로 예상된 선거 2주 전에 살해됐는데, 지젝은 이 죽음이 그가 우파 포퓰리스트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론 매우 관용적인 자유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라고 본다. 우파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의 체현자였던 그의 죽음은 그러한 결합의 곤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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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불운한 포르튠의 정반대를 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을까? 즉 인간의 얼굴을 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유투사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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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인간의 얼굴을 한 파시스트(Fascist with a human face)’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유투사(freedom fighter with an inhuman face)’가 지향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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