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지는 것은 파시즘에 대한 지젝의 재평가다. 보다 정확하게는 파시즘이란 딱지를 남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란 이름으로 나치즘(국가사회주의 혹은 민족사회주의)과 공산주의(스탈린이즘)를 동급으로 비난하고 동일시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함축한다(<전체주의가 어쨌다구?>와 <레닌 재장전>에 실린 지젝의 글을 참고해볼 수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로 지젝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예로 든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1911년 이래로 그의 주요 이론 선언이 되는 <화성악>의 제2부에서 표면적으로는 후기 나치의 반유대주의 세월을 상기시켜주는 조성음악에 대한 저항을 발전시킨다. 즉 조성음악은 ‘병들고’ ‘변질된’ 세계가 되어 클린싱 솔류션이 필요하게 되었다. 음조체계는 ‘근친교배와 근친상간’을 따르게 되었다. 낭만적인 코드는 반음 준 7도 음정으로서 ‘양성구유적’이고 ‘떠돌이’이며 ‘코스모폴리탄’이고(……). (<실재계 사막>, 142쪽)

 
   

  

 

‘후기 나치의 반유대주의 세월’은 ‘late Nazi anti-Semitic tracts’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tracts’는 팸플릿(소책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성음악에 대한 쇤베르크의 반대와 비판이 반유대주의 문건에서 보이는 문구들을 연상시켜준다는 것이다. ‘클린싱 솔류션’은 말 그대로 ‘cleansing solution’을 음역한 것이다. 조성음악은 병들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청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과 문구가 구세주-계시적인 태도(메시아적-묵시록적) 태도가 혹 나치의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을 떠올려주는가? 최종 해결책이란 알다시피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듯 쇤베르크의 반(反)조성음악까지도 나치의 최종 해결책을 낳은 ‘더 깊은 정신적 상황’을 구성한다는 시각을 비판한다. 그런 결론이야말로 우리가 피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이다.  

 

   
 

나치즘을 역겹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마지막 해법의 수사학이 아니라, 그에 부여하는 구체적인 전환이다. 이런 식의 분석에서 또 다른 대중적인 화제는 수천 명의 무리들이 잘 훈련된 동장들(퍼레이드, 스타디움에서의 집단 퍼포먼스, 등등)을 내보이는 집단 안문의 소위 ‘원조 파시스트’의 특성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을 사회주의에서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갖지 ‘전체주의’ 간의 “더욱 공고한 일치단결”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게 된다.(<실재계 사막>, 142~143쪽)

 
   

 

‘마지막 해법’, 곧 ‘최종 해결책’의 수사학이란 쇤베르크의 조성음악 비판과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묶어주는 문구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최종 해결책의 문제는 그런 수사학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전환’에 있다. ‘구체적인 전환’은 ‘concrete twist’를 옮긴 것이다. ‘구체적인 왜곡’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낫겠다. 조성음악이 병들었다고 비난하는 것과 유대인을 ‘병들었다’는 이유로 집단학살하는 것은 결코 등가적인 일이 될 수 없다. 훈련된 제식 동작과 열병 퍼포먼스만을 증거로 나치즘과 스탈린이즘을 싸잡아서 ‘전체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오류이다. 그것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그러한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부터 파시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좌파나 우파에 의해 도용되기를 기다리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 집단 퍼포먼스의 원래의 발생장소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를 훔쳐서 도용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치즘이었다.(<실재계 사막>, 143쪽)

 
   

 

 

즉 ‘집단 퍼포먼스’ 자체는 파시즘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립적인 것이어서 좌파나 우파에 의해 이용(전유)되는 것도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퍼포먼스’, ‘파시즘적 퍼포먼스’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한 퍼포먼스 자체는 노동자 운동의 요소였던 것인데, 그것을 파시즘에서 가져다가 오용한 것일 따름이다. 순서가 그렇다. 그런데 본말이 전도돼 집단 퍼포먼스 자체가 파시즘에 고유한 것으로 규정되고 비판받는 상황이 초래됐다. 따라서 이 문제를 파악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적인 역사주의 계보학이 아니라 니체식 계보학이다. 역사주의 계보학은 사안의 근원과 영향 관계 등을 따져 묻는다. 파시즘이 탄생하면, 그러한 현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원조 파시즘’을 찾아서 그 책임을 묻는 식이다. 니체식 계보학은 ‘원조’의 오용과 왜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단절’을 강조한다. ‘원조’라는 건 그런 오용․왜곡이 그 부정적 결과를 소급하여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    

 

   
 

‘원조 파시스트’의 어떠한 구성요소도 파시스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을 파시스트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그들의 특별한 표명이다. 혹은 그것을 스티븐 제이 굴드의 용어로 말하면, 이런 모든 구성요소들이 파시즘에 의해 ‘과도하게 선택되어’ 있다. 바꿔 말해서 ‘발육 중인 파시즘’(Fascism avant la lettre)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구성요소들로부터 진정한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자 그 자체(지명)이기 때문이다.(<실재계>, 144~145쪽)

 
   


저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용어 ‘ex-apted’가 ‘과도하게 선택된’이라고 옮겨졌는데, ‘exaptation’은 ‘굴절적응’이라고 옮긴다. 예컨대,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해 진화했지만 나중에는 헤엄치는 데 사용됐다. 진화 과정에서 용도가 굴절된 것이다. ‘발육 중인 파시즘’이란 말은 엉뚱한데, ‘문자 이전의 파시즘’, 곧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을 뜻한다. 파시즘이란 말이 생기기 이전에 나타난 그와 유사한 현상을 ‘원조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요점은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파시즘’이란 명명 자체이기 때문에,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란 속임수이거나 물타기다. 따라서 우리는 집단 퍼포먼스나 신체 단련 같은 것을 ‘원조 파시즘’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그것은 허위 개념의 전형적 사례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