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농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빌 클린턴이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비비 네탄야후를 방문했다. 네탄야후의 집무실에 놓인 이상하게 생긴 전화를 발견하고서 클린턴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분과 통하는 전화라고 했다. 그게 부러웠던 클린턴은 백악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비용이 얼마나 들던 그런 전화를 놔달라고 정보기관에 요구했다. 2주 후에 전화는 개통이 됐지만 요금이 너무 비쌌다. 1분에 200만 달러라는 것이다. 클린턴이 화가 나서 네탄야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정적으로 ‘우리’가 ‘당신네’를 지원까지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비싼 전화를 쓸 수 있느냐고. 네탄야후의 대답은 이랬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우리 유대인들이 걸면 시내 통화예요!”
이 농담에는 소련 버전도 있단다. 닉슨이 브레즈네프를 방문했을 때 예의 그 특별한 전화를 봤다. 브레즈네프는 그게 지옥과 직통으로 연결돼 있는 전화라고 일러준다. 닉슨도 똑같이 전화를 설치했다가 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브레즈네프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자 브레즈네프 왈, “소련에서는 시내 통화예요.”
이에 대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런 것이야말로 오늘날 악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신(진리, 정의, 민주주의, 혹은 다른 절대적 가치)과 연결돼 있다고 믿으면서 상대방은 지옥(악의 제국 혹은 악의 축)과 직접 연결돼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러한 절대화에 반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모두 상대적이며 역사적인 우연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따라서 결정적인 해법이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이면서 실용적인 해법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젝은 이런 입장이 보여주는 것은 허위적인 자세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그가 참고하는 것은 체스터턴의 이런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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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모퉁이에서도 우리는 그가 틀릴 수도 있다고 미친 듯이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여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의 의견이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날마다 마주치게 된다. 물론 그의 의견은 반드시 옳은 것이거나 혹은 그것은 그의 의견이 아니다.(<실재계 사막>,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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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누군가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그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경우엔 ‘수행적 모순’이다. 자기 말을 자기가 되삼키는 식이니까. 즉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의견도 아니다. 그런 걸 두고 체스터턴은 ‘불경스럽다(blasphemous)’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 해체주의적 수사학에도 그래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발언 위치를 상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반대로 그런 발언 위치를 특권화하기에 ‘불경스럽다’. 지젝은 ‘근본주의자’의 투쟁과 고통을 자유민주주의자의 잔잔한 평화와 비교해보라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얄궂게도 안전한 주관적 위치로부터 완전한 모든 관련성, 즉 ‘독단적인’ 모든 편들기를 버리게 된다.” ‘완전한 모든 관련성’은 ‘every full-fledged engagement’를 옮긴 것인데, ‘모든 전면적 개입’ 정도로 옮기는 게 낫겠다. 비유컨대, 한쪽 발만 적당히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다 담그는 것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자는 그러한 개입을 어느 한쪽 주장에 대한 ‘독단적인 편들기’ 정도로 폄하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어떤 요소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란 그 요소 자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엮어지고 전용되는 연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은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결합체다. 그럴 경우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는 ‘민주주의’와 같지 않다. 민주주의는 때로 덫이고 함정이며 속임수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연쇄 속에서 주인-기표 행세를 하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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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주된 정치적 물신, 즉 기본적인 사회적 적대의 부인이 된다. 선거상황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일시적으로 중지되고, 사회단체는 번호를 매길 수 있는 순수한 다수로 환원되며, 여기서 적대도 역시 중지된다.(<실재계 사막>,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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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상황에서 사회적 위계질서가 중지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는 노숙자도 재벌 2세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평소에 뻣뻣하던 정치인들도 연신 유권자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큰절을 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선거 시즌마다 보게 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엄연한 ‘사회적 위계질서’가 이때만큼은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으로 우리가 ‘주인’이며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모두가 ‘평등’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대립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다” 같은 착각 말이다. 그것이 사회의 기본적 적대에 대한 부인이며, 그러한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 ‘물신(fetish)’ 곧 ‘물신적 태도’다.
‘사회단체’는 ‘사회체(socal body)’를 엉뚱하게 옮긴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그것이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pure multitude)’으로 환원된다는 것. 계급적 의미를 갖지 않는 다수라는 의미의 ‘다중’이라면 거기엔 더 이상 적대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머릿수’만 있을 뿐이다. 지젝은 미국과 프랑스의 선거를 예로 든다. 가령 십여 년 전 미국의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는 KKK단원이었던 데이비드 듀크 후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부패한 민주당원이었다고 한다. KKK단원을 뽑을 수는 없었으므로 차량마다 “사기꾼에게 투표하자―이건 중요한 일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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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프랑스 대선에서도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부패 혐의를 받고 있던 현직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결선 투표에서 맞붙었다. 르펜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써 붙인 구호가 “증오보다는 차라리 사취가 낫다!”였다(한국식 버전은 “무능력자보다는 사기꾼이 낫다!”였을까?). 이런 것이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부패한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캠페인이 결과적으로는 포퓰리즘적 극우파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지젝은 이탈리아에서 부패한 구(舊) 정치 세력을 몰아낸 ‘클린 핸드(clean hands)’ 캠페인이 베를루스코니를 권좌에 앉히는 결과를 낳았고, 오스트리아에선 극우파 하이더가 ‘반부패’란 명분으로 자신의 권력 쟁취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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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쾌한 초자아의 보충도 없는 법질서라는 생각이 그렇듯이 ‘정직한 민주주의’란 생각은 착각이다. 민주주의 기획의 부수적인 왜곡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그 말 속에 기입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는 민주진창(deomcrassoille)이다. 민주주의적인 정치질서는 그 특성상 부패에 물들기 쉽다.(<실재계 사막>,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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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쾌한 초자아’는 지젝이 자주 쓰는 ‘obscene superego’를 옮긴 것인데, 보통 ‘외설적 초자아’라고 옮긴다. 모든 법질서에는 외설적 초자아가 들러붙어 있다는 의미에서, ‘외설적 초자의 보충이 없는 법질서’라는 개념은 환상이다. 바로 그렇듯이 ‘정직한 민주주의’라는 것도 환상이다. 민주주의에는 항상 부패가 뒤따른다. 그래서 ‘민주진창’이다!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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