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재계 사막>의 4장으로 넘어갈 차례다. 번역본에는 ‘호모 사커(Homo sucker)로부터 호모 사커(Homo sacer)에게로’라고 제목이 붙어 있지만, 여기서는 ‘호모 서케르에서 호모 사케르로’로 읽기로 하겠다. ‘호모 사케르’는 물론 아감벤의 저작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와 그 일련의 연작을 통해서 통용되게 된 용어다(‘호모 서케르’에 대해서는 25회 참조).

서두에서 지젝은 서방의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 갖는 문제점을 체스터턴의 <정통>(오소독시)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참고하여 비판한다. 거기서 체스터턴은 “종교에 대한 위장혁명적인 비판의 근본적인 교착 상태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번역문은 어색하면서 부정확한데, ‘종교에 대한 위장혁명적인 비판’은 ‘pseudo-revolutionary critics of religion’을 옮긴 것이다. ‘종교에 대한 유사-혁명적 비판가들’이 빠진 곤경(교착 상태)을 체스터턴이 신랄하게 몰아붙였다는 얘기다.  

 

   
 

그들은 종교를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압제의 힘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호전적인 종교에서 그들은 자유 그 자체를 버리고, 따라서 정확히 그들이 방어하길 원했던 것을 희생시키라고 강요당한다. 그러니까 종교에 대한 무신론자의 이론적 및 실천적 거부의 궁극적인 희생물은 (침착하게 그의 삶을 계속하는) 종교가 아니라, 소위 그에 의해 위협 당했던 자유 그 자체다. 종교적인 참조를 잃어버린 극단적인 무신론자의 세계는 평등주의의 테러와 횡포가 가득한 어두운 세계이다.(<실재계 사막>, 153~154쪽)

 
   

 

인용문에서 ‘호전적인 종교에서’는 ‘종교와 싸우면서(in fighting religion)’로 옮겨져야 한다.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자유를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와 투쟁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잃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라는 게 체스터턴이 말하는 무신론의 역설이다. 테러와의 전쟁 역시도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개시됐지만, 알다시피 그 과정에서 희생물이 된 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시민적 자유였다.  

 

 

가령, 테러 용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된 공항 검색과 알몸스캐너 검색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 전날인 24일을 미국의 시민단체에서 ‘전국 알몸스캔 거부의 날’로 지정하고 대규모 시위에 나선 것은 과연 테러와의 전쟁에서 무엇이 위험에 처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를 위한 전쟁의 희생물이 자유라는 역설이다.

알몸스캔 거부 운동 참여자들은 공항 검색대에서 검색을 받을 때 스캐너 검색을 거부하고 경찰 입회하에 몸수색을 받는 방식으로 보안 검색을 변경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몸 수색은 과연 안전하며 덜 위협적인가? 미교통보안청(TSA)의 알몸스캔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동영상 패러디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다.  

 

 

총 6분 15초짜리 이 비디오의 중간부에 이르면 “어떤 검색을 받게 되느냐”는 여성의 질문에 “보안요원은 당신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어 더듬을 수도 있다”는 뻔뻔스런 성적 모욕의 말을 서슴지 않는 보안요원의 말까지 나온다. 여성 승객은 “왜 이것을 하느냐”라고 묻자 TSA 보안요원은 “더 기분 좋은 여행을 위해서”라고 말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 “성적 학대를 당할지 모르니 녹음해도 되겠느냐”라고 묻자 보안요원은 “이를 기록하면 체포당할 수 있다”라고 협박한다. 심지어 이 보안요원은 “당신은 강간당한다고 주장하는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다”라고까지 억지주장을 펴기까지 한다. 결국 이 여성이 “기차를 타고 가겠다”라고 하자 “검사를 거부하면 1000달러를 내야 한다”라고 알려준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어도 일단 공항에 들어온 이상 “검사를 거부하면 1000달러를 내야 한다”라는 규정을 꼬집었다. 보안요원은 돈이 없다는 여성에게 “TSA 보안담당자로 취직하면 된다”라고 말한다.(<지디넷코리아> 2010년 11월 24일)

체스터턴의 역설을 이어받자면, “만일 ‘테러분자들’이 타자의 사랑을 위해 이 세상을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사들은 무슬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 세계를 파괴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실재계>, 155~156쪽) 인간의 존엄성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합법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하는 논객들의 태도 또한 이러한 역설의 사례다. 더불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삶이나 바꾸자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지젝은 이런 경우에도 비판이론의 오래된 교훈을 상기시켜줄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교훈인가?  

 

   
 

우리가 기계적인/객관적인 ‘소외시키는’ 공개교환의 맹공격에 대비하여 진정으로 내밀한 사생활 영역을 보존하려고 할 때, 완전히 객관적으로 ‘상품화된’ 영역으로 되어가는 것은 사생활 그 자체이다. 오늘날 사생활로의 철수가 의미하는 것은 최근의 문화산업에 의해 보급된 개인적인 진정성의 공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개발을 위한 수강과 가장 최근의 문화적인 패션과 기타 패션을 따르는 일로부터 조깅과 보디빌딩에 이르기까지다.(<실재계 사막>, 156~157쪽)

 
   

 

인용문의 요점은 무엇이든 교환의 대상이 되는 무자비한 공적 교환 체계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생활로 철수’할 때 정작 희생되는 것은 사생활 자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적인 진정성은 자기 계발을 위한 강좌들의 수강에서부터 조깅과 보디빌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상품화’돼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당신만의 안락과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아파트 광고들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다. “사생활로의 철수가 갖는 궁극적인 진실은 텔레비전 쇼에서 행해지는 내밀한 비밀의 공개적인 자백이다”라는 지적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다. 갖은 고백과 사생활의 폭로가 매일같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사생활의 비밀이 보호되는 사회라는 말은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구호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역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젝은 상품화의 속박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집단성의 창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은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에서 얻은 교훈이 적절해 보인다. 즉 강렬하고 충족시켜주는 개인적인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커플이 주변 세상을 모두 잊고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은 채 둘이서 함께 밖에 있는 제3의 지점(둘이서 함께 투쟁하고 둘이서 함께 관여되어 있는 대의)을 바라보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7쪽)

 
   

  

 

“주변 세상을 모두 잊고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사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같은 영화도 떠올려준다. 영화에서 밀실의 사랑은 대의(the Cause)를 상실한 무력감의 탈출구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제3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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