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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의 무리들로 구성된 광경(혹은 등산처럼 엄청난 노력과 자기 통제를 요구하는 스포츠에 대한 찬사)이 ‘원조 파시스트’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무지를 감춰주는 애매한 연상을 표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실재계 사막>,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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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의 무리들로 구성된 광경’이란 것은 매스게임처럼 수천 명의 신체가 일체가 되어 잘 조직된 동작을 펼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걸 ‘원조 파시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혹은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단지 자신의 몽매한 무지만을 드러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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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리, 곧 이소룡의 쿵푸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대로, 자기 단련은 가진 것이 오직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즉 그것은 순수한 노동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반면에 “지나친 자유에 탐닉하는 자발성과 ‘될 대로 되라’는 태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고, 그런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한테는 오직 그들의 단련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에 ‘나쁜’ 신체 단련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적인 트레이닝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적인 가능성의 실현이라는 주관적인 경제의 일부인 조깅과 보디빌딩이다.” 즉 도장에서 권투나 합기도를 배우는 것과 조깅은 같은 체력 단련이라 하더라도 종류가 다르다. 지젝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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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체에 대한 강박사고가 실용적 정치의 ‘성숙’으로 가는 전(前)좌파 근본주의자들의 통과 가운데 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그것은 제인 폰다로부터 조쉬카 피셔한테로 가는 것인데, 두 가지 발달단계 사이에 있는 ‘잠복기’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집중으로 나타난다.(<실재계 사막>,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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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간판급 여배우인 제인 폰다는 ‘좌파적’ 정치 활동으로도 유명한데, 언젠가부터 ‘피트니스’ 전도사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는 듯싶다. 독일의 전 외부장관 요쉬카 피셔(‘조쉬카 피셔’는 오기다)는 국내에도 소개된 <나는 달린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이들은 모두 젊은 시절 ‘급진적 좌파’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현재는 보다 온건하고 실용적인 노선으로 전향했다. 그 후자를 가리키는 말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maturity' of pragmatic politics)’다. 물론 이때의 ‘성숙함’이란 본인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지젝의 비아냥거림을 담은 말이다. “제인 폰다로부터 조쉬카 피셔로 가는 것”이란 말은 “제인 폰다에서 요쉬카 피셔까지(from Jane Fonda to Joschka Fisher)”를 엉뚱하게 옮긴 것이다. 폰다에서 피셔까지 과거 급진적 좌파의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를 주장하면 자신의 입장을 옮겨갈 때, 그 사이 ‘잠복기’에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심이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정리해보자. 대중적 퍼포먼스, 혹은 집체 공연에 어떤 ‘원형적 파시즘’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파시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파시즘’이라는 명명 자체이며, 그러한 명명 이후에 발생하는 특수한 접합 효과일 따름이다. 또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자발성과 과도한 자유 속에 탐닉하는 ‘방임적’ 태도는 그것을 제공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이다. 곧 있는 자들의 것이고 여유 있는 자들의 것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단지 그들의 기율만을 가지고 있다. 자기 몸의 기율적 단련이야말로 부르주아 중산층의 조깅이나 보디빌딩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에 부친 발문에서 지젝이 들고 있는 사례를 보자. 때는 1920년 11월 7일, 혁명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러시아혁명은 구력 10월 25일에 일어났으며 신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1월 7일이다). 이날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년 전의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겨울궁전 습격’이 공연되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 학생, 그리고 예술가들이 허름한 죽과 차, 얼린 사과들을 먹으면서 밤낮으로 준비한 공연이었다. 공연의 연출은 말레비치나 메이에르홀드 같은 당대 최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군 장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대다수 군인들은 실제로 1917년 사건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으며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 극심한 식량난 속에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 중이기도 했다. 한 동시대인은 이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역사가는 어떻게 가장 잔혹하고 난폭한 혁명 내내 러시아 전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를 기록할 것이다.” 형식주의 이론가였던 슈클로프스키는 “삶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체가 연극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어떤 기초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적 예술지상주의와 무관하면서도 삶이 예술을 모방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집단성과 기율은 단지 흘러간 과거의 일일까? 지젝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피어싱에서부터 복장 도착.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야말로 정치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이 결합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피어싱이나 옷 바꿔 입기에서부터 플래시몹 같은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례로, 2006년 5월 벨로루시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한 네티즌이 이에 항의하는 표시로 수도 민스크의 광장에 나와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플래시몹 제안을 인터넷에 올렸다. 벨로루시 경찰은 이에 과민 반응하여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 몇 사람을 잡아갔다. 하지만 단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면서 일은 더욱 커졌다. 더욱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