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날 주체성의 주된 자유주의 방식이 호모 사커(Homo sucker)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실재계 사막>, 136)라는 구절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패러디한 것이 ‘Homo sucker’이니 운을 맞추기 위해서 ‘호모 서케르’라고 부르겠다(역자는 둘 다 ‘호모 사커’라고 음역해놓았다). ‘sucker’란 말이 원래 무얼 빨아대는 사람, 곧 ‘흡수자’를 뜻하는 만큼, ‘빨아대는 인간’ ‘빨판적 인간’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나는 오늘날 지배적인 자유주의의 주체성 양식이 ‘호모 서케르’라고 말하고 싶다(I can risk the claimm that the predominant liberal mode of subjectivity today is Homo sucker)”.

호모 서케르는 어떤 인간인가? “타인들을 착취하고 조작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이 젖먹이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인간이다. 요컨대 타인을 착취하고 빨아먹으려고 하지만, 결국엔 그 자신이 먹잇감이 되고 마는 인간이란 얘기다. “우리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들에 대한 그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지적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냉소주의가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해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도에서 지젝은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다. 첫째 “우리는 대타자를 ‘믿을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 변형시키면서 그 또는 그녀한테 우리가 유지할 수 없는 순진한 신뢰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37쪽). 둘째 “우리가 그 적에게 미리 어떤 영토를 부여해주기는커녕 ‘본래부터’ 그 적에게 속해 있던 것처럼 보인다는 그런 관념에 대해서도 싸워야 한다”(139쪽).

다시 풀어보자. 첫 번째 교훈으로, 우리가 지탱할 수 없는 믿음을 대타자에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믿음을 대타자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서 자살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살이란 행위 자체를 수단으로 그 믿음을 입증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내 자신이 죽음으로써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게 되겠죠.” 실상은 생각보다 복잡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로 지젝은 소련의 작가동맹 의장이었던 작가 알렉산드르 파데예프를 든다. <궤멸>을 쓴 원조 스탈린주의자(arch-Stalinist)인데, 그는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듣고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흐루시초프가 폭로한 스탈린 체제의 부정과 부패가 과연 그에겐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정황상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내용이 그에겐 하등 새로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믿고 있었던 것은 ‘대타자’다. 그 대타자, 곧 사회주의의 공적인 외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버린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영 그 자체의 ‘수행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절망은 그 환영이 붕괴에 대한 절망이자 그에 대한 충실성의 제스처다. 지젝이 제시한 다른 사례에 견주자면, 그는 “자신의 정직한 무지의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자살했다”.  

 


 

두 번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지젝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알랭 바디우는 그런 서부극을 윤리적 용기의 위대한 장르라고 칭송했다. 그러한 용기의 사례로 지젝이 드는 것은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유마행 3시 10분 열차>다(제임스 맨골드 감독에 의해 <3:10 투 유마>(2007)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영화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한 농부(반 헤플린)가 가뭄 때 가축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200달러 때문에 현상금이 붙은 악당 보스(글렌 포드)를 호텔에서 유마행 호송열차까지 에스코트하는 일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기로 했던 이들은 보스를 구하려는 일당이 호텔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두 떠나버린다. 악당은 농부를 회유하기도 하고 위협도 해보지만 농부는 꿋꿋이 자기 일만 충실히 수행한다. 이미 역을 떠난 기차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악당과 농부는 보스를 구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부하들과 마주친다. 농부에겐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순간 악당은 돌연 그에게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날 믿으시오! 우리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립시다!”

마지막 악당의 말은 “Trust me! Let's jump on the wagon together!”를 옮긴 것인데, 마차에 같이 올라타자는 뜻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시련을 겪어내고 있던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악당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농부의 성실함에 설복되어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다.” 지젝은 바로 이런 상황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나 제3세계의 군중들이 그들의 혁명적인 임무를 비겁하게 저버리고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방법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진보적인’ 서양의 지식인들이다.(<실재계 사막>, 141쪽)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는 표현은 ‘판결을 내리다’란 뜻이다. 그것은 우월한 식견과 지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정작에 시험에 드는 인물은 그 지식인들 자신이다.  

 

   
 

1980년대 말에 유고슬라비아 서민들이 매혹적인 민요에 빠졌다고 해서 비난하는 안락하고 높은 보수를 받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급진적 좌파’라는 불쾌한 인물을 들어보자. 실제로 시험을 치르고 후기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오해로서 그 시험에 비참하게 실패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급진적인 좌파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서민들’은 ‘유고슬라비아 대중(the Yugoslav masses)’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매혹적인 민요’는 ‘ethnic siren songs’를 옮긴 것인데, ‘사이렌의 노래’란 유혹을 뜻하므로 ‘민족주의의 유혹’ 정도의 뜻이 아닌가 한다. 곧 1980년대 말 유고의 대중들이 민족주의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고 안락의자에 앉아 맹비난하며 개탄하는 유럽의 급진 좌파야말로 정작 시험대에 오른 처지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에 벌어진 내전에 대해서 오판을 저질렀다. 이러한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다. 9·11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항상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결여돼 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 비판의 내용은 다음 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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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대목이지만 부정확하게 옮겨진 곳이 많아서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인 명령들을 떠맡는다든지, ‘신중하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기능하고는 있지만 그는 아버지가 되기, 기타 등등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정한 흐름의 아이러니하고/반성적인 언급에 그 자신의 기능을 곁들이고 있다.(<실재계 사막>, 134쪽)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내가 이런 걸 꼭 해야 돼?”라면서도 마지 못하는 척하는 것, 그것이 냉소주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전적으로 수임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게 떠맡지 않으면서도 수행한다.”

인용문의 뒷문장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끔 번역돼 있는데, 아버지 되기, 곧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걸 예로 든다면, 일단 아버지로서의 역할, 아버지의 기능은 수행하되, 거기에다 온갖 불만과 투정을 덧붙인다는 말이다. “내가 아버지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수작이야?!”라는 식의 ‘아이러니하고/반성적인 언급’을 덧붙인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아버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내가 진짜 때려치우고 말지!” 등 한국 사회의 상투적 불평은 이런 냉소주의의 대표적 발현이다(물론 진짜로 그만두고 때려치운다면 사정은 달라지지만, 알다시피 그런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젝은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슈렉>(2001)을 든다. “최근의 꿈작업을 애니메이션한 블록버스터 <쉬렉>이 이런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을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라는 번역문은 역자가 <쉬렉>(이하 <슈렉>)을 보지 않았을 뿐더러 영화에도 무관심하다는 걸 보여주는데, ‘꿈작업’이라고 옮긴 ‘Dreamworks’는 알다시피 영화사 ‘드림웍스’를 가리킨다. “드림웍스의 최근작 블록버스터 <슈렉>은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지배적 기능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도로 다시 옮길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도 번역본만 참조하자면 많은 교정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동화의 줄거리(주인공과 그의 코믹한 조력자가 용을 패배시키고 공주를 구한다)가 “장난스런 브레히트풍의 ‘외생성’이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때, ‘외생성(外生性, extraneation)’이란 생경한 말은 맥락상 ‘생소화’나 ‘소격효과’, 혹은 더 일반적으로 ‘낯설게하기’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다.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에게 “웃으세요!(Laugh!)” “정숙!(Respectful silence!)”이라고 ‘자발성’을 유도하는 지시사항이 하달되는 게 그런 사례다.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글로벌 에티켓’을 안내하는 전단지 내용도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겁먹지 말고 Hello하라, 지하철에서는 통화도 소곤소곤, 지나가다 부딪혔을 땐 미안합니다, 쓰레기는 휴지통에’ 같은 사항을 시민들이 숙지하자는 것인데, 물론 <슈렉>과 마찬가지로 코미디에 해당한다.

지젝은 <슈렉>에 나오는 몇 가지 사항을 더 나열하는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급변의 옷’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틀기(politically correct twists)’를 뜻한다. ‘정치적 올바름(PC)’이란 기준을 적용해서 비틀었다는 얘기다. 가령, 슈렉과 피오나가 키스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신한 것은 추한 도깨비이며, 통통한 평범한 소녀로 변신한 것이 아름다운 공주이다”라는 번역문은 엉뚱한 ‘변신’ 이야기다(‘prince’가 ‘공주’로 바뀌었으니!). 사소한 대목이지만 원문은 “it is not the ugly ogre who turns into a beautiful prince, it is the beautiful princess who turns into a plump ordinary girl”이다. <슈렉>을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영화에선 “못생긴 괴물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주가 뚱뚱하고 흔한 소녀로 변했다”. 남녀 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선 그걸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덧붙여 <슈렉>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과 대중문화에 대한 풍자와 여러 가지 뒤집기도 시도한다. 하지만 지젝의 평가는 냉정하다.  

 

   
 

우리는 이런 전치와 재기입을 ‘전복’이 가능한 것으로 너무 쉽게 칭송하는 대신에, 또한 <슈렉>을 또 하나의 ‘저항장소’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이런 모든 전치를 통하여 동일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전치와 전복의 진정한 기능은 정확히 전래의 이야기를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35쪽)

 
   

 

요점은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하지만 <슈렉>이 보여주는 건 다르다. 영화 피날레에 흐르는 노래는 몽키스의 1960년대 히트곡 <나는 신자다(I'm a believer)>를 다시 부른 것이다. 즉 슈렉 버전의 ‘나는 신자다’. 지젝이 보기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자가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계속해서 실행에 옮기면서,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의 밑에 깔려 있는 구조로서 그런 믿음에 의지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고 있다.”(135쪽) 믿음에 대한 냉소주의적 조롱은 따라서 그 믿음과 적대적이지 않다. 차라리 공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조롱은 우리의 믿음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버팀목이다. “거지같은 나라!”라는 푸념이 우리를 계속 이 땅에 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은 과거 동독의 상황을 예로 든다. 좋았던 시절에도 동독에서는 한 사람이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신념과 지성, 그리고 정직성이 그 세 가지다. 신념과 지성을 가진 인간은 정직하지 않았고, 지적이고 정직한 인간이라면 신념이 부족했으며, 신념을 갖고 있는 정직한 인간에겐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라고 지젝은 묻는다.  

 

   
 

만일 당신이 패권주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동시에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은 어리석든가 혹은 타락한 냉소자다.”(<실재계 사막>, 136쪽)

 
   

 

“동시에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you cannot be both intelligent and honest)”라는 표현은 두 가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확한 번역이다. 부분부정이므로 “당신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정직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당신이 지적이라면 정직하지 않을 테고, 정직하다면 지적이지 않을 테다. 그래서? (1)지배 이데올로기를 믿는 정직한 ‘멍청이’거나 (2)그걸 믿는 똑똑하지만 ‘타락한 냉소주의자’일 거라는 얘기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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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11-04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지간한 친구는 읽으면 친근해 지는데, 지젝은 왜 만나도 친밀감이 전혀 안 생기는 걸까요? 수염이 넘 많아서 그런가?

마우스 2011-01-1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에서 위로 두번째 줄에
(2) 그걸 믿지 않는 똑똑하지만 타락한 냉소주의자 아닌가요?
 


 

‘타자성의 존중’이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공리라는 생각에 대한 지젝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알랭 바디우에 대한 인용이다.    

 

   
 

저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공식이 선과 악의 그 어떤 신중한 정의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특히 강조해야겠군요. 이런 경우에 ‘타자에 대한 존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적과 전쟁 중일 때라든가, 어떤 사람 때문에 여자한테서 잔인하게 버림을 받을 때, 평범한 예술가의 작품을 판정해야 할 때, 과학이 반계몽주의파와 마주할 때, 등등이죠. 매우 흔히 유해한 것, 악이 되는 것, 그런 것이 ‘타자들에 대한 존중’이 됩니다. 특히나 주관적으로 정당한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 타인들에 대한 저항이 되거나 혹은 타인들에 대한 증오가 될 때입니다.(<실재계 사막>, 129~130쪽)

 
   

  

 

번역문은 직독직해식인데, 바디우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주 유해하며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특히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동’일 때 그렇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교전 중인 상황에서 타자를 존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다른 남자 때문에 사정없이 차였을 때 타자를 존중한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그럴 땐 타인들에 저항하고,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동 아닌가? 이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은 바디우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그의 논리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증오나 거짓으로 치장된 지혜 같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를 단순히 그런 범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그 혹은 그녀 속에는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절대자가 들어 있다.” 즉 각자는 어떤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걸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지난 21회분의 마지막 대목에서 ‘limit of the Other's radical Otherness’를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라고 옮겼는데(번역본에서는 ‘대타자의 근본적인 타자성의 한계’), 여기서 ‘limit’를 그냥 ‘한계’라고 옮기는 건 의미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극한’이 더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심연(abyss)’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래서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이라는 어떤 극한을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니던가?”로 정정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즉 그러한 근본적 타자성을 존중하지 않고 바디우처럼 ‘주관적으로 정당한 행동’을 옹호할 경우에 도달하게 되는 결과는 20세기 전체주의의 과오를 다시 답습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디우는 공산주의의 테러를 곧바로 지지하지 않느냐, 는 것이 바디우의 ‘타자성 존중’ 비판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지젝은 바로 그런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시즘을 예로 들자면, “과연 우리는 히틀러의 인격이 그의 모든 악한 행위 밑에 숨겨두고 있는 근본적인 타자성의 심연에 대해 존중해줘야 하는가?”(131쪽) 즉 ‘타자성의 존중’이란 맥락에서 히틀러의 인격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타자성’ 또한 존중해야 한다면 이 또한 자가당착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통일과 평화가 아닌 칼과 분할을 가져오게 되었는지 그의 유명한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나치 그들의 인간성을 포함하여 다름 아닌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무자비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그들과 싸워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홀로코스트에 관해 흔히 인용된 유대인의 말(“누군가가 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하면 그는 인간성 전체를 구하는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보충되어야 한다. 즉 “누군가가 인간성의 단 하나의 진정한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간성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31쪽)

 
   

 

인용문에서 ‘인간성’은 ‘humanity’의 번역인데, ‘인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용이할 듯싶다. 곧 “누군가 인류의 진정한 단 하나의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정한 윤리적 시험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듯 희생자들을 구하려는 태도뿐만 아니라 그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려는 일에도 걸려 있다.   

 

 

화제를 조금 바꿔서 나이트 샤밀란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2000)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이 이렇게 설정돼 있는 영화다. “필라델피아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발생한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하여 131명이 현장에서 즉사한 대형 사고였지만 놀랍게도 한 명의 생존자가 발견된다. 바로 대학교 풋볼 스타디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데이비드 던이다. 데이비드는 대학 시절 영웅처럼 떠오르던 스타 선수였으나, 자동차 사고로 선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다. 놀라운 것은 그때의 사고에서도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났다는 점이다.”(시놉시스 참조)

그러니까 내용만 보자면, 유치하고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다. 하지만 형식적으론 잘 만들어진 심리극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지젝은 주인공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의 호명, 상징적 임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본다. 그의 아들이 총으로 쏴서 아버지가 진짜 무적이고 불사신인지 확인하고 싶어 할 때 그는 거절한다. 어째서인가?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진짜로 자신이 불굴의 존재라는 사실이 입증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지젝은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동일한 딜레마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불사조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키르케고르와 바디우를 연결해봐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동물이 자신의 인생을 생식과 쾌락추구라는 어리석은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진실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틀림없이 상처를 주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 나타내는 우리의 후기 이데올로기 세계에서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다.(<실재계 사막>, 133~134쪽)

 
   

 

인용문에서 ‘그러나’란 접속어는 불필요하다. 그리고 ‘진실’은 ‘진리(Truth)’로, ‘후기 이데올로기 세계’는 ‘소위 탈이데올로기적 세계’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다. 다시 옮기면, “인간이란 동물이 자기 삶을 단지 생식과 쾌락추구의 어리석은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진리를 위한 복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외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소위 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이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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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의 교훈’을 넘어가기 전에 지젝의 ‘혁명론’을 정리한다. 이 연재의 보폭을 조정할 때 가끔씩 쓰고 있는 일종의 ‘간주곡’이다. 더불어 그건 이제 ‘잊힌 혁명’이 돼가고 있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잠시 상기해보고 싶어서다. 구력으로 10월 25일에 일어났기에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혁명 이후 채택된 신력으로 러시아 혁명일은 11월 7일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조차 이미 수년 전에 국경일에서 제외되었다.

지젝의 전 방위적 ‘이론투쟁’은 간단히 도식화하자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라는 이행의 궤적을 그린다. 이러한 이행의 중요한 계기는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새로운 사유가 아닐까 싶은데, 이 경우 레닌은 “마르크스는 괜찮아, 하지만 레닌은 뭐야?”라고 할 때의 레닌이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에서 지젝은 한마디로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다시 따져 묻는다. 그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용인된다.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달라. 지국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이미 지난 회에 오늘날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저항’의 태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항’과 ‘관용’은 이미 지배적 태도에 포함돼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관용은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유지되며, 이것이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입장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키는데,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 혹은 과잉 근본주의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 현상이다. 즉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 즉 ‘정치경제학’에 대한 통찰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즉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포는 미덕의 발현체이며,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이 조국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혁명적 폭력’ 혹은 ‘공포정치’가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긴박한 상황적 요구에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에게서 혁명적 폭력은 정확히 전쟁과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지젝은 덧붙이는데, 실제로 루이 16세는 체포되기 며칠 전에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프랑스와 유럽 국간들 간의 대전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왕은 애국자연하면서 프랑스 군대를 이끌다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고 그의 권력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평화로운’ 루이 16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유럽을 전쟁으로 내몰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렇게 바꿔서 질문한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그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지적한 대로 자코뱅의 급진적 테러는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히스테리적인 행동화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진다. “여성의 자기-조직화에서부터 모든 늙은이가 평화와 존엄 속에서 말년을 보내는 공동체 가족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응축된 열광적인 활동”이 진정한 혁명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진정한 혁명의 순간은 1917~18년의 봉기도 아니고 이어진 내전 상황도 아닌, 1920년대 초반에 새로운 일상생활의 의례들을 창안하려고 했던 강력한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그것을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라는 것이 요점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한다. 사실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쩌둥 자신에 의해서 소요 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한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가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시각이다. 따라서 마오의 사례에서도 얻게 되는 교훈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베케트)이다.

정리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지젝이 보기에 양자는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 형태는 거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지젝은 <국가의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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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재계 사막>의 3장 ‘9․11 이후의 행복’을 읽어볼 차례다. 키워드는 물론 ‘행복’이다. 정신분석에서 행복은 ‘욕망의 배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정확히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를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본다.

일단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충족되어선 안 된다. 과도한 소비는 불행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바닥나는 물건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을 때 만족감이 높아진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일이 잘못됐을 때 비난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당(黨)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모든 건 ‘그들’ 잘못이었다. 끝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진 않은 조건으로 ‘다른 장소(Other Place)’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동유럽인들에겐 소비 천국으로서 서구가 그 다른 장소였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그곳을 그들은 꿈꾸었고 때로 방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은 결국 욕망에 의해 끝장나고 만다. 욕망은 그들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도록 부추겼고 결국은 절대 자수가 예전보다 덜 행복한 체제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화된 동유럽의 실상이다.  

 


 

행복은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존재의 범주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불확정적이며 불일치적이다. 그것은 이교도적 개념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건 이교도들이다. 종교적 경험과 정치 활동이 행복의 최고 형태로 간주된다. 지젝은 전 세계를 돌며 행복의 복음을 전하는 데 성공을 거둔 달라이 라마가 특히 미국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이야말로 행복의 추구를 제일의 관심사로 삼고 있는 제국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행복’은 쾌락원칙에 속하며, 행복을 잠식하는 것은 쾌락원칙 너머에 대한 요구이다.

다시, 라캉적 의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주체 자신의 욕망의 결과와 충분히 대면하지 못한 그의 무능력과 준비 부족에 의지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행복의 대가는 주체가 그의 욕망의 모순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17~118쪽). ‘욕망의 모순’이라고 한 건 ‘inconsistency of desire’의 번역이다. 욕망의 불일치, 혹은 욕망과의 불일치라고 옮길 수 있을까.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체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것은 최악의 일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행복이다. 지젝이 드는 예는 이런 것이다.   

 

   
 

오늘날 좌파가 분명히 충족시킬 수 없는 요구로서 자본주의 체제에 불평공세를 퍼붓고 있을 때(완전고용! 복지국가를 유지하라! 이민자들에게 완전한 권리를!), 그것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인 도발을 게임하는 것인데, 주인으로서는 들어줄 수 없게 되어 그의 무능을 폭로하게 될 그런 요구를 해대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 체제가 이런 요구들을 들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부가하여 그것들을 입 밖에 내는 사람들도 그것들이 실현되길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실재계 사막>, 118쪽)

 
   

  

 

그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인 68혁명의 모토, “현실주의자가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이다. 냉소적이고 악의적인 의미로 다시 읽자면 이렇게 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좌파 학자인 우리들은 비판적으로 보이길 원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체제가 우리에게 제공한 특권을 마음껏 즐기자. 이 체제에 불가능한 요구로 불평공세를 퍼붓자. 우리는 이런 모든 요구들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다는 것과 우리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119~120쪽) 이것은 ‘강단 좌파’에 대한 짓궂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름의 진실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저항’이다. 소수적 성과 인종, 생활양식의 ‘다중’의 시학이 중심화된(자본화된) 신비한 권력에 저항한다. 물론 한국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에서 우파 생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저항한다. 그렇듯 저항이 오늘날 규범이 되었다면, 바로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지배적인 관계에 실질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담론 출현의 장애물 아닌가, 라고 지젝은 묻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러한 패권주의적 태도의 핵심을 공략하는 것이다. 거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란 개념이다. 지난 세기의 교훈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어떤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지난 마지막 세기의 강의는 정확히 대타자의 근본적인 타자성의 한계가 아닐까? 우리는 대타자를 우리의 적으로, 허위 지식의 소유자로, 기타 등등으로 환원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항상 그 혹은 그녀 속에는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절대자가 들어 있다.(<실재계 사막>, 130쪽)

 
   

 

인용문의 첫 문장은 “[I]s not the lesson of the last century that (...) we should respect a certain limit - the limit, precisely, of the Other's radical Otherness?”를 옮긴 것이다. “대타자의 타자성이 갖는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 아닌가?” 정도로 다시 옮길 수 있다. 이 교훈의 의미는 다음 회에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성좌(배치)와 관련하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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