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재계 사막>의 4장으로 넘어갈 차례다. 번역본에는 ‘호모 사커(Homo sucker)로부터 호모 사커(Homo sacer)에게로’라고 제목이 붙어 있지만, 여기서는 ‘호모 서케르에서 호모 사케르로’로 읽기로 하겠다. ‘호모 사케르’는 물론 아감벤의 저작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와 그 일련의 연작을 통해서 통용되게 된 용어다(‘호모 서케르’에 대해서는 25회 참조).

서두에서 지젝은 서방의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 갖는 문제점을 체스터턴의 <정통>(오소독시)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참고하여 비판한다. 거기서 체스터턴은 “종교에 대한 위장혁명적인 비판의 근본적인 교착 상태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번역문은 어색하면서 부정확한데, ‘종교에 대한 위장혁명적인 비판’은 ‘pseudo-revolutionary critics of religion’을 옮긴 것이다. ‘종교에 대한 유사-혁명적 비판가들’이 빠진 곤경(교착 상태)을 체스터턴이 신랄하게 몰아붙였다는 얘기다.  

 

   
 

그들은 종교를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압제의 힘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호전적인 종교에서 그들은 자유 그 자체를 버리고, 따라서 정확히 그들이 방어하길 원했던 것을 희생시키라고 강요당한다. 그러니까 종교에 대한 무신론자의 이론적 및 실천적 거부의 궁극적인 희생물은 (침착하게 그의 삶을 계속하는) 종교가 아니라, 소위 그에 의해 위협 당했던 자유 그 자체다. 종교적인 참조를 잃어버린 극단적인 무신론자의 세계는 평등주의의 테러와 횡포가 가득한 어두운 세계이다.(<실재계 사막>, 153~154쪽)

 
   

 

인용문에서 ‘호전적인 종교에서’는 ‘종교와 싸우면서(in fighting religion)’로 옮겨져야 한다.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자유를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와 투쟁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잃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라는 게 체스터턴이 말하는 무신론의 역설이다. 테러와의 전쟁 역시도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개시됐지만, 알다시피 그 과정에서 희생물이 된 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시민적 자유였다.  

 

 

가령, 테러 용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된 공항 검색과 알몸스캐너 검색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 전날인 24일을 미국의 시민단체에서 ‘전국 알몸스캔 거부의 날’로 지정하고 대규모 시위에 나선 것은 과연 테러와의 전쟁에서 무엇이 위험에 처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를 위한 전쟁의 희생물이 자유라는 역설이다.

알몸스캔 거부 운동 참여자들은 공항 검색대에서 검색을 받을 때 스캐너 검색을 거부하고 경찰 입회하에 몸수색을 받는 방식으로 보안 검색을 변경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몸 수색은 과연 안전하며 덜 위협적인가? 미교통보안청(TSA)의 알몸스캔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동영상 패러디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다.  

 

 

총 6분 15초짜리 이 비디오의 중간부에 이르면 “어떤 검색을 받게 되느냐”는 여성의 질문에 “보안요원은 당신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어 더듬을 수도 있다”는 뻔뻔스런 성적 모욕의 말을 서슴지 않는 보안요원의 말까지 나온다. 여성 승객은 “왜 이것을 하느냐”라고 묻자 TSA 보안요원은 “더 기분 좋은 여행을 위해서”라고 말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 “성적 학대를 당할지 모르니 녹음해도 되겠느냐”라고 묻자 보안요원은 “이를 기록하면 체포당할 수 있다”라고 협박한다. 심지어 이 보안요원은 “당신은 강간당한다고 주장하는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다”라고까지 억지주장을 펴기까지 한다. 결국 이 여성이 “기차를 타고 가겠다”라고 하자 “검사를 거부하면 1000달러를 내야 한다”라고 알려준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어도 일단 공항에 들어온 이상 “검사를 거부하면 1000달러를 내야 한다”라는 규정을 꼬집었다. 보안요원은 돈이 없다는 여성에게 “TSA 보안담당자로 취직하면 된다”라고 말한다.(<지디넷코리아> 2010년 11월 24일)

체스터턴의 역설을 이어받자면, “만일 ‘테러분자들’이 타자의 사랑을 위해 이 세상을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사들은 무슬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 세계를 파괴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실재계>, 155~156쪽) 인간의 존엄성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합법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하는 논객들의 태도 또한 이러한 역설의 사례다. 더불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삶이나 바꾸자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지젝은 이런 경우에도 비판이론의 오래된 교훈을 상기시켜줄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교훈인가?  

 

   
 

우리가 기계적인/객관적인 ‘소외시키는’ 공개교환의 맹공격에 대비하여 진정으로 내밀한 사생활 영역을 보존하려고 할 때, 완전히 객관적으로 ‘상품화된’ 영역으로 되어가는 것은 사생활 그 자체이다. 오늘날 사생활로의 철수가 의미하는 것은 최근의 문화산업에 의해 보급된 개인적인 진정성의 공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개발을 위한 수강과 가장 최근의 문화적인 패션과 기타 패션을 따르는 일로부터 조깅과 보디빌딩에 이르기까지다.(<실재계 사막>, 156~157쪽)

 
   

 

인용문의 요점은 무엇이든 교환의 대상이 되는 무자비한 공적 교환 체계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생활로 철수’할 때 정작 희생되는 것은 사생활 자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적인 진정성은 자기 계발을 위한 강좌들의 수강에서부터 조깅과 보디빌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상품화’돼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당신만의 안락과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아파트 광고들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다. “사생활로의 철수가 갖는 궁극적인 진실은 텔레비전 쇼에서 행해지는 내밀한 비밀의 공개적인 자백이다”라는 지적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다. 갖은 고백과 사생활의 폭로가 매일같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사생활의 비밀이 보호되는 사회라는 말은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구호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역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젝은 상품화의 속박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집단성의 창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은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에서 얻은 교훈이 적절해 보인다. 즉 강렬하고 충족시켜주는 개인적인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커플이 주변 세상을 모두 잊고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은 채 둘이서 함께 밖에 있는 제3의 지점(둘이서 함께 투쟁하고 둘이서 함께 관여되어 있는 대의)을 바라보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7쪽)

 
   

  

 

“주변 세상을 모두 잊고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사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같은 영화도 떠올려준다. 영화에서 밀실의 사랑은 대의(the Cause)를 상실한 무력감의 탈출구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제3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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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진창’이라는 대목까지 읽었다. 우리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제도적 민주주의는 늘 부패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민주주의는 없다”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묵묵히 따르는 지혜로서 이런 부패를 용인하고 시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민주주의의 부패와 그를 제거하려는 우파의 캠페인 사이의 악순환을 깨버리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의 대안을 공식화하는 그런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실재계 사막>, 148~149쪽) 간단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의 부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정식화할 것인가, 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물론 그 ‘대안’이란 것을 어디서 찾느냐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지젝은 이 대목에서 ‘러시아적 동일성(Russian identity)’ 같은 ‘반동적인’ 개념에서 해방적 잠재성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러시아적 동일성’ 혹은 ‘러시아적 정체성’이란 말은 러시아가 유럽과는 다른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한 관념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시가 표도르 츄체프(1803~1873)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이다. 한국어 번역과 영어 번역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 특이성은 러시아어에서도 발견되는데, 지젝은 서구의 한 가지 용어에 대응하는 러시아어 단어가 두 개씩 있는 사례를 든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의미가 가미된 ‘절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가령 ‘진실(truth)’에 대응하는 러시아어 단어는 ‘이스찌나(istina)’와 ‘프라우다(Pravda)’ 두 가지가 있다(구소련 공산당의 기관지명이기도 한 ‘프라우다’는 ‘프라브다’라고 읽는 게 맞지만 ‘프라우다’로 통용됐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적는다). ‘이스찌나’는 사실에 부합한다는 의미, 곧 일상적 의미의 진실이란 뜻이고, ‘프라우다’는 대문자 진실(Truth), 곧 절대적 진실/진리를 가리킨다.

‘자유(freedom)’를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도 두 가지가 있다. ‘스보보다(svoboda)’는 기존의 사회질서 안에서 통상적인 선택의 자유를 뜻하고, ‘볼랴(volja)’는 좀 더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 절대적인 충동(drive)으로서의 자유, 자기 파괴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러시아인들이 유럽인들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너희는 ‘스보보다’를 가졌지만, 우리는 ‘볼랴’를 갖고 있다.”

‘국가(state)’를 가리키는 말도 두 가지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행정 기관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은 ‘고수다르스트보(gosudarstvo)’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권력 기관을 뜻할 때는 ‘제르자바(derzhava)’를 쓴다. 영어의 ‘지식인(intellectuals)’과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의 구분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데, 인텔리겐치아는 사회 개혁의 특별한 사명에 헌신하는 식자층을 가리킨다(19세기의 식자층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정도의 지식 계급을 뜻했다). 지젝이 보기엔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도 같은 맥락에서 노동 계급과 구별된다. ‘노동 계급(working class)’이 단순히 사회적 존재의 한 범주를 뜻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진정한 혁 명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도 마찬가지의 구분법을 보여주는데, 지젝은 이것을 러시아어 개념쌍에 적용한다. 그런 경우 ‘프라우다’는 ‘진리의 사건’이고, ‘볼랴’는 ‘자유의 사건’이다. ‘이스찌나’와 ‘프라우다’가 일치하리라는 존재론적 보장은 없다. 그 사이엔 틈새가 있다. 그 틈새를 표시하는 러시아어 단어에 ‘아보스(awos)’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아마도’이지만, ‘우리의 운에 따르는(on our luck)’ 어떤 것을 가리킨다. 레닌이 자주 인용한 나폴레옹의 말로는 “우리는 공격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on attaque, et puis on verra)"가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의 흥미로운 특징은 위험을 무릅쓰는 적극적인 태도인 의지주의에 더욱 근본적인 숙명론을 결합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1쪽) 일단 저지르고 나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태도다. 여기서 ‘의지주의’는 ‘voluntarism’의 번역이다. ‘주의주의’라고도 옮기는데, 지성보다는 자발성과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 나폴레옹-레닌의 문구는 그러한 의지주의와 근본적인 숙명론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결합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를 읽는다.  

 

   
 

이런 자세가 정확히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어찌 될 것인가? 그것은 오늘날의 전 세계적인 ‘자발적 이데올로기’가 갖는 두 가지 얼굴처럼 서양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의 숙명론과의 사이에서 우리가 분열되어 있는 것과 같다.(<실재계 사막>, 151~152쪽)

 
   

 

원문에는 없지만, ‘그것은’이 가리키는 것은 ‘오늘날’이다. 서양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의 숙명론 사이에서 분열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게 필요한 자세는 의지주의와 숙명론의 그러한 결합이라는 얘기다.  

 

 

지젝이 드는 사례, 정확히 반례는 네덜란드의 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 핌 포르튠(Pim Fortuyn)의 죽음이다. 그는 2002년 5월초, 자신이 20퍼센트 정도 득표할 것으로 예상된 선거 2주 전에 살해됐는데, 지젝은 이 죽음이 그가 우파 포퓰리스트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론 매우 관용적인 자유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라고 본다. 우파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의 체현자였던 그의 죽음은 그러한 결합의 곤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따라서 우리는 불운한 포르튠의 정반대를 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을까? 즉 인간의 얼굴을 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유투사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52쪽)

 
   

 

요컨대 ‘인간의 얼굴을 한 파시스트(Fascist with a human face)’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유투사(freedom fighter with an inhuman face)’가 지향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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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농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빌 클린턴이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비비 네탄야후를 방문했다. 네탄야후의 집무실에 놓인 이상하게 생긴 전화를 발견하고서 클린턴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분과 통하는 전화라고 했다. 그게 부러웠던 클린턴은 백악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비용이 얼마나 들던 그런 전화를 놔달라고 정보기관에 요구했다. 2주 후에 전화는 개통이 됐지만 요금이 너무 비쌌다. 1분에 200만 달러라는 것이다. 클린턴이 화가 나서 네탄야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정적으로 ‘우리’가 ‘당신네’를 지원까지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비싼 전화를 쓸 수 있느냐고. 네탄야후의 대답은 이랬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우리 유대인들이 걸면 시내 통화예요!”

이 농담에는 소련 버전도 있단다. 닉슨이 브레즈네프를 방문했을 때 예의 그 특별한 전화를 봤다. 브레즈네프는 그게 지옥과 직통으로 연결돼 있는 전화라고 일러준다. 닉슨도 똑같이 전화를 설치했다가 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브레즈네프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자 브레즈네프 왈, “소련에서는 시내 통화예요.”

이에 대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런 것이야말로 오늘날 악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신(진리, 정의, 민주주의, 혹은 다른 절대적 가치)과 연결돼 있다고 믿으면서 상대방은 지옥(악의 제국 혹은 악의 축)과 직접 연결돼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러한 절대화에 반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모두 상대적이며 역사적인 우연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따라서 결정적인 해법이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이면서 실용적인 해법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젝은 이런 입장이 보여주는 것은 허위적인 자세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그가 참고하는 것은 체스터턴의 이런 비판이다.  

 

   
 

어느 길모퉁이에서도 우리는 그가 틀릴 수도 있다고 미친 듯이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여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의 의견이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날마다 마주치게 된다. 물론 그의 의견은 반드시 옳은 것이거나 혹은 그것은 그의 의견이 아니다.(<실재계 사막>, 146쪽)

 
   

 

그러니까 누군가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그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경우엔 ‘수행적 모순’이다. 자기 말을 자기가 되삼키는 식이니까. 즉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의견도 아니다. 그런 걸 두고 체스터턴은 ‘불경스럽다(blasphemous)’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 해체주의적 수사학에도 그래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발언 위치를 상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반대로 그런 발언 위치를 특권화하기에 ‘불경스럽다’. 지젝은 ‘근본주의자’의 투쟁과 고통을 자유민주주의자의 잔잔한 평화와 비교해보라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얄궂게도 안전한 주관적 위치로부터 완전한 모든 관련성, 즉 ‘독단적인’ 모든 편들기를 버리게 된다.” ‘완전한 모든 관련성’은 ‘every full-fledged engagement’를 옮긴 것인데, ‘모든 전면적 개입’ 정도로 옮기는 게 낫겠다. 비유컨대, 한쪽 발만 적당히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다 담그는 것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자는 그러한 개입을 어느 한쪽 주장에 대한 ‘독단적인 편들기’ 정도로 폄하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어떤 요소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란 그 요소 자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엮어지고 전용되는 연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은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결합체다. 그럴 경우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는 ‘민주주의’와 같지 않다. 민주주의는 때로 덫이고 함정이며 속임수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연쇄 속에서 주인-기표 행세를 하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주된 정치적 물신, 즉 기본적인 사회적 적대의 부인이 된다. 선거상황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일시적으로 중지되고, 사회단체는 번호를 매길 수 있는 순수한 다수로 환원되며, 여기서 적대도 역시 중지된다.(<실재계 사막>, 147쪽)

 
   


 

 

“선거 상황에서 사회적 위계질서가 중지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는 노숙자도 재벌 2세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평소에 뻣뻣하던 정치인들도 연신 유권자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큰절을 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선거 시즌마다 보게 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엄연한 ‘사회적 위계질서’가 이때만큼은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으로 우리가 ‘주인’이며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모두가 ‘평등’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대립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다” 같은 착각 말이다. 그것이 사회의 기본적 적대에 대한 부인이며, 그러한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 ‘물신(fetish)’ 곧 ‘물신적 태도’다.

‘사회단체’는 ‘사회체(socal body)’를 엉뚱하게 옮긴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그것이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pure multitude)’으로 환원된다는 것. 계급적 의미를 갖지 않는 다수라는 의미의 ‘다중’이라면 거기엔 더 이상 적대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머릿수’만 있을 뿐이다. 지젝은 미국과 프랑스의 선거를 예로 든다. 가령 십여 년 전 미국의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는 KKK단원이었던 데이비드 듀크 후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부패한 민주당원이었다고 한다. KKK단원을 뽑을 수는 없었으므로 차량마다 “사기꾼에게 투표하자―이건 중요한 일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고.  

 


  

2002년 5월 프랑스 대선에서도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부패 혐의를 받고 있던 현직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결선 투표에서 맞붙었다. 르펜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써 붙인 구호가 “증오보다는 차라리 사취가 낫다!”였다(한국식 버전은 “무능력자보다는 사기꾼이 낫다!”였을까?). 이런 것이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부패한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캠페인이 결과적으로는 포퓰리즘적 극우파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지젝은 이탈리아에서 부패한 구(舊) 정치 세력을 몰아낸 ‘클린 핸드(clean hands)’ 캠페인이 베를루스코니를 권좌에 앉히는 결과를 낳았고, 오스트리아에선 극우파 하이더가 ‘반부패’란 명분으로 자신의 권력 쟁취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불유쾌한 초자아의 보충도 없는 법질서라는 생각이 그렇듯이 ‘정직한 민주주의’란 생각은 착각이다. 민주주의 기획의 부수적인 왜곡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그 말 속에 기입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는 민주진창(deomcrassoille)이다. 민주주의적인 정치질서는 그 특성상 부패에 물들기 쉽다.(<실재계 사막>, 148쪽)

 
   

 

‘불유쾌한 초자아’는 지젝이 자주 쓰는 ‘obscene superego’를 옮긴 것인데, 보통 ‘외설적 초자아’라고 옮긴다. 모든 법질서에는 외설적 초자아가 들러붙어 있다는 의미에서, ‘외설적 초자의 보충이 없는 법질서’라는 개념은 환상이다. 바로 그렇듯이 ‘정직한 민주주의’라는 것도 환상이다. 민주주의에는 항상 부패가 뒤따른다. 그래서 ‘민주진창’이다!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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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시즘이다.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란 없으며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파시즘’이란 명명 자체라는 주장까지 지난 회에 살펴봤다. 지젝은 그러한 맥락에서 ‘훈련(discipline)’이 ‘원조 파시즘’적 특징을 포함한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천의 무리들로 구성된 광경(혹은 등산처럼 엄청난 노력과 자기 통제를 요구하는 스포츠에 대한 찬사)이 ‘원조 파시스트’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무지를 감춰주는 애매한 연상을 표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실재계 사막>, 144쪽)

 
   

 

‘수천의 무리들로 구성된 광경’이란 것은 매스게임처럼 수천 명의 신체가 일체가 되어 잘 조직된 동작을 펼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걸 ‘원조 파시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혹은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단지 자신의 몽매한 무지만을 드러내줄 뿐이다.  

 

 

브루스 리, 곧 이소룡의 쿵푸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대로, 자기 단련은 가진 것이 오직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즉 그것은 순수한 노동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반면에 “지나친 자유에 탐닉하는 자발성과 ‘될 대로 되라’는 태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고, 그런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한테는 오직 그들의 단련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에 ‘나쁜’ 신체 단련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적인 트레이닝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적인 가능성의 실현이라는 주관적인 경제의 일부인 조깅과 보디빌딩이다.” 즉 도장에서 권투나 합기도를 배우는 것과 조깅은 같은 체력 단련이라 하더라도 종류가 다르다. 지젝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강박사고가 실용적 정치의 ‘성숙’으로 가는 전(前)좌파 근본주의자들의 통과 가운데 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그것은 제인 폰다로부터 조쉬카 피셔한테로 가는 것인데, 두 가지 발달단계 사이에 있는 ‘잠복기’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집중으로 나타난다.(<실재계 사막>, 145쪽)

 
   

  

 

할리우드의 간판급 여배우인 제인 폰다는 ‘좌파적’ 정치 활동으로도 유명한데, 언젠가부터 ‘피트니스’ 전도사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는 듯싶다. 독일의 전 외부장관 요쉬카 피셔(‘조쉬카 피셔’는 오기다)는 국내에도 소개된 <나는 달린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이들은 모두 젊은 시절 ‘급진적 좌파’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현재는 보다 온건하고 실용적인 노선으로 전향했다. 그 후자를 가리키는 말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maturity' of pragmatic politics)’다. 물론 이때의 ‘성숙함’이란 본인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지젝의 비아냥거림을 담은 말이다. “제인 폰다로부터 조쉬카 피셔로 가는 것”이란 말은 “제인 폰다에서 요쉬카 피셔까지(from Jane Fonda to Joschka Fisher)”를 엉뚱하게 옮긴 것이다. 폰다에서 피셔까지 과거 급진적 좌파의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를 주장하면 자신의 입장을 옮겨갈 때, 그 사이 ‘잠복기’에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심이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정리해보자. 대중적 퍼포먼스, 혹은 집체 공연에 어떤 ‘원형적 파시즘’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파시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파시즘’이라는 명명 자체이며, 그러한 명명 이후에 발생하는 특수한 접합 효과일 따름이다. 또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자발성과 과도한 자유 속에 탐닉하는 ‘방임적’ 태도는 그것을 제공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이다. 곧 있는 자들의 것이고 여유 있는 자들의 것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단지 그들의 기율만을 가지고 있다. 자기 몸의 기율적 단련이야말로 부르주아 중산층의 조깅이나 보디빌딩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에 부친 발문에서 지젝이 들고 있는 사례를 보자. 때는 1920년 11월 7일, 혁명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러시아혁명은 구력 10월 25일에 일어났으며 신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1월 7일이다). 이날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년 전의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겨울궁전 습격’이 공연되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 학생, 그리고 예술가들이 허름한 죽과 차, 얼린 사과들을 먹으면서 밤낮으로 준비한 공연이었다. 공연의 연출은 말레비치나 메이에르홀드 같은 당대 최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군 장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대다수 군인들은 실제로 1917년 사건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으며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 극심한 식량난 속에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 중이기도 했다. 한 동시대인은 이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역사가는 어떻게 가장 잔혹하고 난폭한 혁명 내내 러시아 전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를 기록할 것이다.” 형식주의 이론가였던 슈클로프스키는 “삶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체가 연극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어떤 기초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적 예술지상주의와 무관하면서도 삶이 예술을 모방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집단성과 기율은 단지 흘러간 과거의 일일까? 지젝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피어싱에서부터 복장 도착.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야말로 정치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이 결합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피어싱이나 옷 바꿔 입기에서부터 플래시몹 같은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례로, 2006년 5월 벨로루시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한 네티즌이 이에 항의하는 표시로 수도 민스크의 광장에 나와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플래시몹 제안을 인터넷에 올렸다. 벨로루시 경찰은 이에 과민 반응하여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 몇 사람을 잡아갔다. 하지만 단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면서 일은 더욱 커졌다. 더욱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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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지는 것은 파시즘에 대한 지젝의 재평가다. 보다 정확하게는 파시즘이란 딱지를 남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란 이름으로 나치즘(국가사회주의 혹은 민족사회주의)과 공산주의(스탈린이즘)를 동급으로 비난하고 동일시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함축한다(<전체주의가 어쨌다구?>와 <레닌 재장전>에 실린 지젝의 글을 참고해볼 수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로 지젝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예로 든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1911년 이래로 그의 주요 이론 선언이 되는 <화성악>의 제2부에서 표면적으로는 후기 나치의 반유대주의 세월을 상기시켜주는 조성음악에 대한 저항을 발전시킨다. 즉 조성음악은 ‘병들고’ ‘변질된’ 세계가 되어 클린싱 솔류션이 필요하게 되었다. 음조체계는 ‘근친교배와 근친상간’을 따르게 되었다. 낭만적인 코드는 반음 준 7도 음정으로서 ‘양성구유적’이고 ‘떠돌이’이며 ‘코스모폴리탄’이고(……). (<실재계 사막>, 142쪽)

 
   

  

 

‘후기 나치의 반유대주의 세월’은 ‘late Nazi anti-Semitic tracts’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tracts’는 팸플릿(소책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성음악에 대한 쇤베르크의 반대와 비판이 반유대주의 문건에서 보이는 문구들을 연상시켜준다는 것이다. ‘클린싱 솔류션’은 말 그대로 ‘cleansing solution’을 음역한 것이다. 조성음악은 병들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청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과 문구가 구세주-계시적인 태도(메시아적-묵시록적) 태도가 혹 나치의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을 떠올려주는가? 최종 해결책이란 알다시피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듯 쇤베르크의 반(反)조성음악까지도 나치의 최종 해결책을 낳은 ‘더 깊은 정신적 상황’을 구성한다는 시각을 비판한다. 그런 결론이야말로 우리가 피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이다.  

 

   
 

나치즘을 역겹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마지막 해법의 수사학이 아니라, 그에 부여하는 구체적인 전환이다. 이런 식의 분석에서 또 다른 대중적인 화제는 수천 명의 무리들이 잘 훈련된 동장들(퍼레이드, 스타디움에서의 집단 퍼포먼스, 등등)을 내보이는 집단 안문의 소위 ‘원조 파시스트’의 특성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을 사회주의에서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갖지 ‘전체주의’ 간의 “더욱 공고한 일치단결”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게 된다.(<실재계 사막>, 142~143쪽)

 
   

 

‘마지막 해법’, 곧 ‘최종 해결책’의 수사학이란 쇤베르크의 조성음악 비판과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묶어주는 문구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최종 해결책의 문제는 그런 수사학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전환’에 있다. ‘구체적인 전환’은 ‘concrete twist’를 옮긴 것이다. ‘구체적인 왜곡’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낫겠다. 조성음악이 병들었다고 비난하는 것과 유대인을 ‘병들었다’는 이유로 집단학살하는 것은 결코 등가적인 일이 될 수 없다. 훈련된 제식 동작과 열병 퍼포먼스만을 증거로 나치즘과 스탈린이즘을 싸잡아서 ‘전체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오류이다. 그것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그러한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부터 파시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좌파나 우파에 의해 도용되기를 기다리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 집단 퍼포먼스의 원래의 발생장소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를 훔쳐서 도용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치즘이었다.(<실재계 사막>, 143쪽)

 
   

 

 

즉 ‘집단 퍼포먼스’ 자체는 파시즘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립적인 것이어서 좌파나 우파에 의해 이용(전유)되는 것도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퍼포먼스’, ‘파시즘적 퍼포먼스’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한 퍼포먼스 자체는 노동자 운동의 요소였던 것인데, 그것을 파시즘에서 가져다가 오용한 것일 따름이다. 순서가 그렇다. 그런데 본말이 전도돼 집단 퍼포먼스 자체가 파시즘에 고유한 것으로 규정되고 비판받는 상황이 초래됐다. 따라서 이 문제를 파악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적인 역사주의 계보학이 아니라 니체식 계보학이다. 역사주의 계보학은 사안의 근원과 영향 관계 등을 따져 묻는다. 파시즘이 탄생하면, 그러한 현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원조 파시즘’을 찾아서 그 책임을 묻는 식이다. 니체식 계보학은 ‘원조’의 오용과 왜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단절’을 강조한다. ‘원조’라는 건 그런 오용․왜곡이 그 부정적 결과를 소급하여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    

 

   
 

‘원조 파시스트’의 어떠한 구성요소도 파시스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을 파시스트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그들의 특별한 표명이다. 혹은 그것을 스티븐 제이 굴드의 용어로 말하면, 이런 모든 구성요소들이 파시즘에 의해 ‘과도하게 선택되어’ 있다. 바꿔 말해서 ‘발육 중인 파시즘’(Fascism avant la lettre)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구성요소들로부터 진정한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자 그 자체(지명)이기 때문이다.(<실재계>, 144~145쪽)

 
   


저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용어 ‘ex-apted’가 ‘과도하게 선택된’이라고 옮겨졌는데, ‘exaptation’은 ‘굴절적응’이라고 옮긴다. 예컨대,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해 진화했지만 나중에는 헤엄치는 데 사용됐다. 진화 과정에서 용도가 굴절된 것이다. ‘발육 중인 파시즘’이란 말은 엉뚱한데, ‘문자 이전의 파시즘’, 곧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을 뜻한다. 파시즘이란 말이 생기기 이전에 나타난 그와 유사한 현상을 ‘원조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요점은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파시즘’이란 명명 자체이기 때문에,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란 속임수이거나 물타기다. 따라서 우리는 집단 퍼포먼스나 신체 단련 같은 것을 ‘원조 파시즘’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그것은 허위 개념의 전형적 사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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