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즐무어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6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장말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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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무어 살인사건》을 읽었습니다. 포와로도 마플 양도 등장하지 않지만 즐겁게 후딱 읽어버렸습니다. 제가 추리소설을 읽을때 늘 범인을 추측해 보는데 여지껏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었습니다만... 드디어 맞췄습니다. 하하하. ㅡㅡ;
안타까운 것은 범인이 누군지 알아맞춘 게 추리보다는(분명한 힌트가 있었는데도) 추리소설을 여러 권 읽은 데서 오는 감으로 맞춘 것이라는 거지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식 추리소설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려는 주인공과 행복한 결말.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겁습니다.

P.S - 추리소설의 감상을 쓰는 것은 다분히 조심스럽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라도 눈치 빠른 분들은 쉽게 결말을 알아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리뷰에 대한 유치한 핑계거리 같군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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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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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이 이토록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적이 있을까. 심윤경은 먼저 ‘작가의 말’에서 우리의 너덜거리는 인생을 이야기한다.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자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인연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졌고, 생의 흔적은 먹고 내버린 파리 껍질처럼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 마리 호랑거미처럼 조심조심 발 디딜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내가 살아가는 이 덥고 끈적끈적한 세상을 한없이 쿨하게 냉소하는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본인이 썼는지 한국인이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몇몇 쿨한 소설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일말의 모욕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달의 제단》은 서안 조씨 종가 효계당의 너무나 쿨하지 못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서안 조씨의 종손으로서 가문의 영광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데 일생을 바친 할아버지의 아집과 집착,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차종손 조상룡의 반쪽짜리 정체성과 자학에 이르는 자괴감은 끊임없이 질척거렸다. 소설 속에서는 ‘종가’라는 독특한 시공간을 설정해 두었지만, 작가 심윤경의 말처럼 우리네 인생과 세상살이도 효계당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효계당은 서안 조씨의 종갓집으로 할아버지와 상룡이 가꾸고 지켜나가야 할 성지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사실 효계당에는 임자 없이 달시룻댁과 정실 모녀만이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들의 생기 있는 움직임과 푸근한 정, 사람다운 냄새가 없으면 효계당은 적막감으로 괴괴하기 짝이 없는 공간으로 변한다. 그녀들이 없으면 할아버지와 상룡이의 허깨비, 해월당 어머니와 소산할매의 귀신이 고요히 들어앉아 효계당 지붕 위로 푸른 인광을 피워올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문을 오욕 한 점 없는 고귀한 명문가로 거듭나게 하고 싶은 열망으로 오로지 종손으로서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 열망은 단 한순간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비로,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비로, 무엇보다 서안 조씨의 종손이 아닌 진정한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했다. 평생을 서안 조씨 조상들의 귀신을 머리에 이고 ‘종손’이라는 허깨비로 산 것이다.

조상룡도 ‘반쪽짜리 차종손’이라는 허깨비로 살아간다. 자신의 태생을 두고 끊임없이 자학하면서 ‘차종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그는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그가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던 것은 서안 조씨의 차종손이라기보다 적손이 아닌 자신의 비천한 태생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한시도 서손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할아버지와의 불화를 더욱 깊게 하고 정실에 대한 일종의 사디즘으로까지 번진다.

해월당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인정하는 유일한 며느리였지만, 이미 다른 여자를 가슴에 품은 남편의 자살을 지켜본 한 많은 청상과부로 평생을 살다가 효계당에 귀신으로 깃든다.

소산 할매는 옛 언간으로 만날 수 있는데 아들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아버지로부터 자진을 강요당한다. 유복녀를 해산하지만 그 딸마저도 시아버지가 해하자 살아갈 용기를 잃은 소산 할매는 ‘암수 나뉘고 어미가 새끼 낳는 것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는 원통한 유언을 남긴다.

아들을 낳지 못해 명문가에서 쫓겨난 달시룻댁과 그네의 병신 딸 정실은 그나마 상룡이 서안 조씨 가문의 허깨비가 아닌 상룡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상룡에게 누구도 나누어주지 않은 육친의 정으로 상룡을 보듬어준 달시룻댁이나 불임인 몸으로 상룡의 아이를 임신한 정실은 상룡이 과거가 아닌 현실에 굳건히 발 디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소산 할매를 짓밟은 그 옛적의 시아버지처럼 할아버지도 잉태한 정실을 유린한다.

《달의 제단》은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을 제단에 바친다. 효계당 사람들에 대한 이 소설은 전통이나 페미니즘 등 여러 관점에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지만, 나는 참으로 남루하고 구차하고 비루하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끝없이 질척거리는 인생의 제물이 된 효계당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되비추고 있다. 완벽히 쿨한 인생은 없다. 누구나 ‘가문’에 상응하는 뭔가에 매달려 가면을 쓰고 아등바등한다. 그것이 생을 유지해 주는 힘이나 열정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그 생에 함몰되지 말고 말간 얼굴, 말간 마음을 드러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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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동화
이탈로 칼비노 외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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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나무 동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동화’보다 동화 속에서 ‘나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보통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나무들은 이른바 우주수(宇宙樹), 혹은 세계수(世界樹)의 역할을 한다. 소설 속의 모든 것,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등장인물의 모든 행위가 바로 소설적 상관물로서의 나무에 의해 조율되는 것이다. 즉 나무는 소설 속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이 개념은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위그드라실(Yggdrasil)에 기원한다.

북유럽신화의 주신(主神) 오딘이 심었다는 위그드라실은 거대한 물푸레나무로 우주를 뚫고 자랐다고 한다. 위그드라실의 거대한 뿌리는 신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인간의 나라에 뻗어 있어 위그드라실이 모든 세계를 관장할 수 있게 해준다. ‘신들의 황혼’이라고 불리는 라그나뢰크에 위그드라실은 불꽃의 거인이 던진 횃불에 화염에 휩싸이고 세계는 멸망한다. 이처럼 우주수, 혹은 세계수로서의 나무는 세계의 생사까지 모두 관장한다. 태초에 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유구한 세월을 견뎌온 나무는 이미 신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신화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나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라니 이보다 더 굉장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기대감을 잔뜩 품었다. 전 세계(주로 서양이지만)의 구전동화뿐만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 르 클레지오, 이탈로 칼비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현대 작가들의 창작동화 속에서 ‘나무’가 어떤 우주로 탄생되었을지, 어떤 모습으로 변용되었을지 지켜보는 것은 신비로움에 휩싸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무’라는 멋진 모티프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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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거미 클럽 동서 미스터리 북스 92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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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한 독자라면 <흑거미 클럽>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의 유사성을 쉽게 감지하리라 본다. 모임에서의 문제 제기를 하는 멤버들과 그것을 해결하는 탐정역. 이 <흑거미 클럽>에서는 마플양의 역할을 모임의 급사 헨리가 맡고 있다. 게다가 헨리는 첫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해결자이다.

포와로의 '회색 뇌세포', 마플 양의 무기인 '대화'처럼 헨리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음'이 문제 해결 방식이다. 그는 멤버들의 심각한 난상 토론을 듣고 있다가 조용히 문제를 풀어낸다. 이른바 '안락의자형'의 탐정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살인 사건은 한 번 있었다-이나 꼬이고 꼬인 트릭은 없어도 헨리가 풀어내는 심심한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은 재미를 준다.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만한 작품집이다. 각 이야기에 끝에 실려 있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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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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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눈물 범벅이 되는 감동적인 소설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을 때 절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더니 은이 언니가 그해 생일선물로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주었다.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은 눈물 콧물을 억지로 짜내는 내용이나 슬픔을 자극하는 감성적인 어휘들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데도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샘에서 절로 눈물이 솟는다는 점이다. 그 눈물은 특별히 누군가 죽었다거나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고 해서 동정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작가와 깊은 공감을 나누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을 때 벅찬 가슴을 부여잡고 흘리는 눈물이다.

“아! 작은 나무…….”

이것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 머릿속에 수없이 맴돈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자신이기도 한 ‘작은 나무’는 혼혈 체로키 인디언으로 누구보다 인디언으로서의 삶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 꼬마이다. ‘작은 나무’의 꿈은 할아버지 웨일즈나 윌로 존처럼 멋진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인디언의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꿈이 어린 ‘작은 나무’가 가슴에 품기에 얼마나 고단한 꿈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웨일즈나 윌로 존, 할머니 보니 비가 ‘작은 나무’에게 심어준 꿈은 삶의 진실된 의미와 뿌리가 되어주었다.

대자연, 어머니인 대지 모노라보다 더 넉넉한 품이 있을까. 자연에 감응하는 ‘작은 나무’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공존, 즉 어울림과 조화, 그리고 순리였다. ‘작은 나무’는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배웠으며, 모노라의 품에서 진정한 행복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

웨일즈가 들려준 자연의 이치는 오히려 너무나 간단해서 깨닫기 쉽지 않은 진리였다. 보통 동물을 사냥할 때는 가장 튼실한 놈을 고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웨일즈는 그것이 얼마나 몰상식한 일인지를 알려주었다. 이 책에서 그가 ‘작은 나무’에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자연과의 행복한 공존과 공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영혼을 아름답게 정화시키는지 보여준다. 자연의 이치, 곧 순리를 따르는 그들의 삶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들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를 감싸주었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몸이면 이년치 거름 정도는 될 거야.

이번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 작은 나무야, 다음번에는 더 좋아질 거야. 또 만나자.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윌로 존도, 웨일즈도, 보니 비도, 그리고 혼자 남겨진 ‘작은 나무’조차 죽음을 순리로 경건하게 받아들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접했다고 해야 할까, 호들갑스러운 슬픔의 몸짓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죽음 앞에 눈물이 앞을 가린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대신 ‘나는 너를 이해해’라고 마음을 표현하는 체로키 인디언들. 이해할 수 있으면 사랑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그들 앞에 백인들의 잔인한 만행조차도 무색해져 버리고 주책없이 자꾸만 흐르는 내 눈물도 부끄럽다.

새벽이 올 때마다 삶 속에 죽음 있고 죽음 속에 생명 있음을 알게 되리니. 모노라의 지혜를 배우면 체로키의 영혼을 느낄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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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pge 2005-08-2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elly님 고맙습니다.^^ 저는 언제쯤이면 모노라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연두뽕 2006-03-0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였습니다. 더 많은 걸 느끼고 가요.^^

zipge 2006-03-0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두뽕 님께서 그러셨다면 정말 다행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