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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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형동을 내가 알게 된 건 표지 일러스트 덕분이었다. 『바이바이 베스파』의 표지 그림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선 안에 채워진 원색들이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단조로워 보여 똑 떨어지는 그림인 것 같은데도 메마른 느낌 없이 마음을 여운과 여백으로 촉촉이 적시는 듯했다. 이 그림이 좋았다. 너무나 어리석은 착각이었지만, 만화도 같은 풍으로 그려져 있을 줄 알았다. 책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만화 그림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내 기대에 어긋나자 다소 실망감이 들었다. 거기다가 마지막 책장까지 넘기고 나서 ‘아이고야, 이 나이 먹고도 내 마음이 늘 어린애 마음인 줄 알았는데 정말 내가 어른이 다 됐나 보네’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도대체 박형동의 감성에 공감할 수가 있어야지.

『바이바이 베스파』에는 짧은 만화 다섯 편이 들어 있다. 아래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을 말들은 그저 그랬을 거라고 머리로만 짐작한 이야기들이다. 거의 흡족하지 않았어도 내가 시간을 들여 읽었고 그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있으니 이 정도만이라도 내 마음에 스치게 해주고 싶다.

낡은 여관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톰과 제리의 이야기 「톰과 제리의 사랑」. 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순전히 경험 차원에서 톰과 사랑을 나누려 하는 것뿐이라고 못 박았던 제리가 그때 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본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아마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린 이율배반적인 부인 때문이었겠지. 키스를 할 때  “혀가 왜 이렇게 까칠까칠해?”라고 거부하는 제리에게 톰이“고양이 혀는 다 그래”라고 설명해 줘야 할 만큼 극단적인 성향의 두 동물 고양이 톰과 생쥐 제리를 남녀로 상정한 것은 서로에게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첫 성性을 의미하려 했던 거겠지.

「스노우 라이딩」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계약 동거 기간이 끝나고 나눌 것은 다 나누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남은 부스럼딱지 고양이 한 마리 이야기다. 한겨울, 첫눈 오는 날에 그들은 동거 생활의 마지막 잔존물인 고양이를, 그들이 상처 입은 것처럼 피부병에 걸려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버리려고 했다가 발길을 돌이킨다. 해마다 첫눈이 내릴 때마다 자신들이 버린 고양이 생각이 날까 봐,라고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를 말하지만, 차마 그들 같은 고양이를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의 피부병이 다 나았다면 그들의 벌어진 상처도 아물었을까?

자신이 밍키라고 믿는 소녀 이야기 「밍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소녀」. ‘요술봉의 빛이 흐려져 변신 마법이 사라지면 밍키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중심 모티프다. 박형동은 어른이 된다는 것, 평범해진다는 것을 슬픈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랜드마마 피시」는 따돌림을 당하는 고적대 소녀의 이야기다. 잠이 모자라다는 소녀를 위해 스쿠터를 탄 소년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된” 물고기들의 수족관으로 데려간다. 『바이바이 베스파』에 실린 이야기들 중 가장 환상적이고 몽환적이지만 글쎄, 만화가의 여백이 너무 많다. 나에게 이야기의 시작은 터무니없이 끝으로 비약될 뿐이다.

록밴드를 그만두고 애정결핍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가장 아끼는 베스파도 팔아버리려고 마음먹은 소년 이야기 「바이바이 베스파」. 여기서도 소년과 소녀로 이루어진 빛나는 시절의 끈을 놓으면 보통 사람이 되고 어른이 된다. “어른은 말고”(여기에는 ‘보통 사람은 말고’라는 말도 숨어 있겠지) 뭔가 딴 게 되어 돌아오겠다는 소년의 뒷모습이 가련하다. 소년아, 보통 사람이 어때서? 어른이 어때서? 소년과 소녀는 소년과 소녀로, 어른은 어른으로, 보통 사람은 보통 사람으로 똑같은 무게의 다른 가치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미 보통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는 것이 싫은 적이 더 많다. 그러나 그건 ‘어른’ 자체가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 성숙, 연륜, 통찰, 이런 아름다운 말들에는 대가가 따르지만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 차곡차곡 시간을 채워온 빛나는 결실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과 그들 곁에는 스쿠터가 있다. 사실 만화 맨 뒤에 부록처럼 딸린 스쿠터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박형동의 표지풍 앙증맞은 그림들도 귀엽고. 그걸 보고 다시 돌아와 어떤 스쿠터가 만화 속 풍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나 찾아보았다. 마치 숨은그림찾기하듯이. 톰과 제리 곁에는 야마하 비노가, 동거 남녀 곁에는 시티 100이, 밍키 곁에는 토모스 클래식이, 고적대 소녀와 물고기 소년 곁에는 혼다 퓨전이, 어른 말고 다른 것이 되겠다던 소년 곁에는 피아조 베스파가 있다. 각각의 이야기에 서로 다른 스쿠터를 그려넣은 것은 왜일까? 궁금해졌다. 스쿠터는 탈 줄도, 얻어 타본 적도 없어 그 스쿠터들이 어떤 느낌과 감성을 대변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여러모로 공감하기 어려워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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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추리 게임 1 - 불의 도시 로마에서 초록도마뱀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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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해는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의 『율리시스 무어』에 흠뻑 빠져 있었다. 신비로운 마을 킬모어 코브와 시간의 문들은 나를 단번에 사로잡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게다가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배치해 놓은 사소한 장치들, 이름들, 배경 묘사 하나하나까지 모두 내 맘에 꼭 들었다.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라는 이탈리아 작가는 30대로 성큼 들어서고도 피터팬 증후군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내가 어떤 것에 흥분하고 두근거리고 설레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인도 일단 파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의 아기자기한 상상의 세계에서 신비한 모험의 첫발을 떼면 쿵쾅쿵쾅 뛰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꼭 아이들만 읽으라는 책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다른 해에 비해 힘든 일이 많았던 나에게 그 일들에서 조금 비껴나 딴생각에 몰두할 여유를 주어 고마워했던 작가,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의 신작이 나왔다. 처음 내 반응은 어땠을까? 역시 흥분했을까? 아니다, 그 반대다. 우선 ‘센추리 게임’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이 작가, 『율리시스 무어』로 재미를 보더니 ‘시간’을 또 우려먹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세상은 ‘물, 불, 흙, 공기’ 4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을 주요 장치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그다지 신선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끊임없이 차용되고 있는 고전적 요소들이 아닌가.) 이미 곱지 않은 첫인상을 받았으니 단번에 어머, 식상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내가 깜빡했다.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가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내 맘에 쏙 들게 끌어나가는지. 이탈리아 로마,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중국 상하이에서 각각 살았던 네 아이가 실수를 빙자한 거대한 계획에 의해 12월 29일 이탈리아 로마로 모여든다.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인 2월 29일이 생일인 네 아이는 한밤중의 갑작스러운 정전의 암흑 속에서 모험의 첫발을 내딛는다. 1권에는 일단 로마 소녀 엘레트라 멜로디아가 ‘불’의 능력을 가졌음을 상징하는 단서들을 잔뜩 보여주는 것에서 만족한다. (2권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로마 = 불’의 근거로 로마 황제 네로의 이야기를 해준다. ‘물, 흙, 공기’는 어떤 도시의 아이와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긴밀하게 배치할지 무척 기대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쉽긴 하다. 겨우 1권만 읽어놓고서 너무 섣부른지 모르겠지만, 적대 관계에 있는 캐릭터들이 너무나 살벌하고 잔인하며 ‘능력’이 출중하다. 『율리시스 무어』에서 오블리비아 뉴턴과 만프레드가 귀여웠다.

어찌 됐든 올해도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가 펼쳐놓은 이야기 그물망에서 허우적거리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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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코끼리
스에요시 아키코 지음, 양경미.이화순 옮김, 정효찬 그림 / 이가서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싱글맘, 싱글파파, 미혼모, 미혼부, 한부모, 편부모, 이혼……. 이런 단어들이 거론되는 것은 여전히 부모의 어떤 사정으로 아이가 부모 둘 중 하나와만 살아야 하는 상황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부모 한쪽의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부모가 선택한 이혼으로 한부모 가정이 되는 것은 아이에게 결핍이고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여겨졌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부모의 ‘이혼’은 쉬쉬하며 숨기기 바쁜 금기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이고,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인생이다. 부모와 아이는 각자의 인생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속해 있지만(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모가 이혼을 선택하면 아이는 좋든 싫든 그로 인한 변화를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도 어떻게든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더 이상 애정이 남아 있지 않는 부모가 하루도 쉬지 않고 싸우면서 아이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조성하는 것보다 부모가 각자의 길을 찾아 헤어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부모가 모두 있어도 불행한 가족의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보따리를 싸고 싶어도 자식 생각해서 꾹꾹 눌러 참고 부부 관계를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한 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해야 한다는 생각은 상식의 지위를 잃었다. 결혼보다 어려운 일이 이혼이었지만, 결혼만큼 이혼도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드라마 속 설정도, 곧잘 들려오는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도 그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한 사람의 아내여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소설이 크게 주목받고, 『싱글맘 스토리』를 쓴 신현림이나 성姓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으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한 『즐거운 나의 집』을 쓴 공지영도 더 이상 자신이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은 ‘축복’이지만 이혼은 어쨌든 ‘상처’로 남지 않을까. 부부에게도, 그들 사랑의 결실인 아이에게도 극복해야 할 변화일 것이다. 스에요시 아키코의 『노란 코끼리』도 아빠가 떠나버린 집에 엄마와 두 아이가 남아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초등학생 아들 요군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는 얼핏 유쾌한 어조로 들리지만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기계치이면서도 노란 코끼리를 닮은 자동차 운전에 도전하는 덜렁쟁이 엄마와 성인 남자 손님이 오면 아빠의 사랑이 그리워 응석부터 부리고 보는 여동생을 지켜보는 것도 요군에게는 상처로 각인된다. 물론 이야기는, 비에 젖는 아빠가 안타까워 우산을 가져다준 어린 딸에게 “우산을 빌려 가면 다시 돌려주러 와야 하니 필요 없다”고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도 요군의 가족은 상처를 보듬고 행복해지리라는 희망적인 내일을 보여준다.

꼭 뭔가를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잘 모르겠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부모 슬하에 성장했고, 결혼했지만 아직은 사랑이 변하지 않아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 상처의 깊이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다. 어릴 때 피상적으로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리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혼의 상처도 결국은 극복할 수 있는 상처라는 말도, 이혼이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는 말도, 그 어떤 말도 나는 할 수가 없다. 무엇인지 정답인지, 무엇이 최선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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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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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의 단편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 실린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첫 느낌은 불편함이다. 현실처럼 잘 포장된 그의 세계를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사실에 몸을 떨게 된다. 한 발 멀리서 뒤틀린 세계를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면 이 작가가 인간의 숨겨진 추악한 욕망을 성(性)과 폭력 같은 어두운 장치로 보여주는 데 아주 능숙하다는 사실도 함께 느껴질 것이다. 특히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를 등장시켜 성적 욕망이나 폭력적인 모습을 이성적으로 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불편한 세계를 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사용한다.

「입체기하학」에서 증조부에게 물려받은 ‘방부 처리된 페니스’는 소통의 부재를 이언 매큐언 식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페니스’를 부수고 조롱하는 아내를 입체기하학으로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나’는 희열을 느낀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17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에게 유아처럼 양육된 남자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는 17살의 아이는 결국 어머니가 애인이 생기자 버림받고 17살의 흉내를 내면서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움을 거부하고 결국 벽장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다시 한 살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타인─비록 부부일지라도─이나 사회와의 소통의 부재는 그 상대를 말살하거나 자신이 숨는 것으로 해결된다. 이언 매큐언의 이런 방식에 독자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사실은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수 있으며 더 나은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을 받아들인다.

「가정처방」에서 여동생을 ‘엄마 아빠 놀이’를 하자고 꾀어 근친상간을 하거나 「나비」에서 ‘나비’를 볼 수 있다고 아이를 속여 추행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 주인공은 호기심으로만 가득한 추악한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피를 나눈 동생이거나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소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담담한 주인공의 모습이 단지 호기심이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 잔혹하고 서글프다.

이언 매큐언이 자신의 세계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없애거나’, ‘죽이거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결과는 정상적인 사회의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불편함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서 같은 집에서 살면서 몸이 통통해지는 어미 쥐를 보고 공포를 느끼던 연인은 어미 쥐를 죽이고 미처 뱃속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발을 꿈틀대며 희망이 없이 죽어가는 새끼 쥐를 보았다. 낚시로 잡은 장어를 놓아주고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가려는 우리. 마지막 의식을 거친 우리는 다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죽이거나 놓아주는 것. 잔혹한 해결책이 싫다면 이 잔혹한 세계를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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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셰익스피어 & 컴퍼니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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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 표지조차 휘황한 책들이 하나 흐트러짐 없이 멋진 책장들에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는 대형 서점 말고, 부드러운 조명 아래 책 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 사이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책도 간간이 눈에 띄는 자그마한 서점이 좋다. 그곳에 그저 책을 기계적으로 팔기만 하는 책 장수가 아니라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서점을 찾아오는 손님과 책 이야기도 무궁무진하게 나눌 수 있는 주인이 있다면 이보다 더 환상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은실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에 나오는 ‘그러게 언니’처럼. 그러나 그런 서점을 만나기는 내 평생 앞으로도 어려울 성싶다. 결코 사교적이지 못한 내 성격 탓에 ‘그러게 언니’ 같은 주인이 있어도 모르고 지나칠 게 뻔하지만, 그런 주인은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점점 동네의 정겨운 서점들은 사라지고 헌책방도 쇠락해 가고 있다.

어릴 때 막연히 꿈꾸었던 일들 중 하나는 책방을 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읽어서 종이로 희생된 나무가 정말로 아깝지 않은 책들만 파는. (그러려면 엄청난 다독가가 되어야 하는데 나에겐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단골들에게는 내가 기른 계절별로 다양한 꽃 모종도 정으로 나누어주는. (식물을 잘 기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꿈을 꾸었다.) 손님들과 차(茶)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비사교적인 성격은 어쩌고?) 이런 모든 개인적인 어려움을 극복한다 해도 현실은 훨씬 냉엄하다. 내가 엄청난 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요즘 세상에 그런 책방을 차리는 것은 재정적으로 파산하는 지름길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의 책방은 뭘 모르는 소싯적에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장래’였지만 뭘 조금은 알게 된 지금은 ‘꿈 중의 꿈(夢)’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꿈꾸던 책방보다 더 비현실적인 서점이 지구의 어디선가는 버젓이 굴러가고 있다. 위대한 시인 월트 휘트먼의 아들이라는 오해를 즐거워하는 조지 휘트먼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가 나의 무기력한 체념과 용기 없는 의지력과 스스로 죽인 꿈을 비웃으며 건재하고 있다. 그저 책과 이야기와 차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갈 곳 없는 부랑아들에게 책장 사이의 침대를 나누고 생활을 나누고 커피와 쿠키와 파이를 나누고 휴식과 낭만과 꿈과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는데도 말이다. 누구에게는 비현실적인 꿈을 용감하게 실험하여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바꾸어놓은 조지 휘트먼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는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로망, 꿈의 서점이 아닐까.

조지 휘트먼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취하라’,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는 모토로 열었던 현재 파리의 책방은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같은 쟁쟁한 거물 작가들이 드나들었던 실비아 비치의 책방, 1대 ‘셰익스피어 & 컴퍼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2대 ‘셰익스피어 & 컴퍼니’다. 1대의 문학사적 후광까지 더해져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동경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셰익스피어 & 컴퍼니’의 인간적인 정겨움은 조지 휘트먼의 노력과 이 책의 작가인 제레미 머서를 포함하여 그곳을 잠시나마 안식처로 삼았던 무수한 사람들이 남기는 흔적들을 통해 2대에서 더욱 짙어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셰익스피어 & 컴퍼니’가 ‘책으로 읽기만 해야 하는 간접경험이나 대리 만족’이 아니라 ‘언젠가 꿈처럼 스며들 수도 있는 미래’라고 욕심 부린다. 아마도 그때는 짧은 자서전을 쓰게 하고 사회주의 서적과 고전들을 강제로 날마다 한 권씩 탐독하게 하고 괴팍하고 변덕 심하지만 여성에게는 다정한 듯한 낭만적인 조지 할아버지 말고, 그의 아름다운 딸 실비아 비치가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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