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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셰익스피어 & 컴퍼니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 표지조차 휘황한 책들이 하나 흐트러짐 없이 멋진 책장들에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는 대형 서점 말고, 부드러운 조명 아래 책 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 사이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책도 간간이 눈에 띄는 자그마한 서점이 좋다. 그곳에 그저 책을 기계적으로 팔기만 하는 책 장수가 아니라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서점을 찾아오는 손님과 책 이야기도 무궁무진하게 나눌 수 있는 주인이 있다면 이보다 더 환상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은실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에 나오는 ‘그러게 언니’처럼. 그러나 그런 서점을 만나기는 내 평생 앞으로도 어려울 성싶다. 결코 사교적이지 못한 내 성격 탓에 ‘그러게 언니’ 같은 주인이 있어도 모르고 지나칠 게 뻔하지만, 그런 주인은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점점 동네의 정겨운 서점들은 사라지고 헌책방도 쇠락해 가고 있다.
어릴 때 막연히 꿈꾸었던 일들 중 하나는 책방을 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읽어서 종이로 희생된 나무가 정말로 아깝지 않은 책들만 파는. (그러려면 엄청난 다독가가 되어야 하는데 나에겐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단골들에게는 내가 기른 계절별로 다양한 꽃 모종도 정으로 나누어주는. (식물을 잘 기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꿈을 꾸었다.) 손님들과 차(茶)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비사교적인 성격은 어쩌고?) 이런 모든 개인적인 어려움을 극복한다 해도 현실은 훨씬 냉엄하다. 내가 엄청난 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요즘 세상에 그런 책방을 차리는 것은 재정적으로 파산하는 지름길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의 책방은 뭘 모르는 소싯적에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장래’였지만 뭘 조금은 알게 된 지금은 ‘꿈 중의 꿈(夢)’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꿈꾸던 책방보다 더 비현실적인 서점이 지구의 어디선가는 버젓이 굴러가고 있다. 위대한 시인 월트 휘트먼의 아들이라는 오해를 즐거워하는 조지 휘트먼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가 나의 무기력한 체념과 용기 없는 의지력과 스스로 죽인 꿈을 비웃으며 건재하고 있다. 그저 책과 이야기와 차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갈 곳 없는 부랑아들에게 책장 사이의 침대를 나누고 생활을 나누고 커피와 쿠키와 파이를 나누고 휴식과 낭만과 꿈과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는데도 말이다. 누구에게는 비현실적인 꿈을 용감하게 실험하여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바꾸어놓은 조지 휘트먼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는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로망, 꿈의 서점이 아닐까.
조지 휘트먼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취하라’,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는 모토로 열었던 현재 파리의 책방은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같은 쟁쟁한 거물 작가들이 드나들었던 실비아 비치의 책방, 1대 ‘셰익스피어 & 컴퍼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2대 ‘셰익스피어 & 컴퍼니’다. 1대의 문학사적 후광까지 더해져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동경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셰익스피어 & 컴퍼니’의 인간적인 정겨움은 조지 휘트먼의 노력과 이 책의 작가인 제레미 머서를 포함하여 그곳을 잠시나마 안식처로 삼았던 무수한 사람들이 남기는 흔적들을 통해 2대에서 더욱 짙어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셰익스피어 & 컴퍼니’가 ‘책으로 읽기만 해야 하는 간접경험이나 대리 만족’이 아니라 ‘언젠가 꿈처럼 스며들 수도 있는 미래’라고 욕심 부린다. 아마도 그때는 짧은 자서전을 쓰게 하고 사회주의 서적과 고전들을 강제로 날마다 한 권씩 탐독하게 하고 괴팍하고 변덕 심하지만 여성에게는 다정한 듯한 낭만적인 조지 할아버지 말고, 그의 아름다운 딸 실비아 비치가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