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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쟈핑와 지음, 김윤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작가 쟈핑와는 400쪽이 너끈히 넘도록 인생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위트가 넘치고 담백하게 친구 자랑(!)을 하는 에세이들을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다 보면 그의 사귐에 놀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쟈핑와의 친구 사귐에는 경계도, 나이도, 생사도, 겉치레도 없다.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으며, 동갑내기뿐만 아니라 훨씬 어린 사람도 훌쩍 나이 많은 사람도 개의치 않으며,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도 상관없으며, 무엇보다 겉으로 화려하고 요란하기보다 안으로 깊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속정 많은 오지랖도 넓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책도, 부모도, 스승도, 편집자도, 한 번도 살아 만나보지는 못한 싼마오도 모두 손익을 따지지 않고 친구이다. 인생에 작든 크든 교감을 나누고 짧은 순간이든 긴 시간이든 동반자로 함께해 온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전부 그에게는 친구라는 소중한 호칭으로 그윽한 묵향처럼 떠돈다.
쟈핑와의 『친구』는 ‘친구’라는 주제를 미리 정해 두고 그에 맞는 글을 적정 분량으로 계획적으로 써낸 책(소위 기획서)이 아니다. 이 책은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문, 머리말, 수필 등 다양한 장르로 무려 24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모아 주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은 묵직한 중수필집이다.”(※옮긴이의 말) 쟈핑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한 편 한 편 써두었던 글들을 차근차근 다시 읽어 나가고 적절히 나누면서 문득 자신의 인생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풍성하게 수놓아준 글 속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친구’라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모두 내 모난 성격 탓으로 돌렸다. 언뜻 손가락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얼굴들을 꼽아봐도 열 손가락 더는 넘어가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 연락해 오며 제법 자주 만나 수다를 떨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말을 좀 아낄걸’ 하는 생각 드는 일 없이 별로 부끄럽지 않은 친구들을 말한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고 나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위로받고 싶은 친구들을 말한다. 요사이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하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이는 여리고 외로움을 많이 타 아무 사람에게나 자기 마음을 잘 내보이고 기꺼이 그 마음 한 자락을 쉽게 내어준다. 내가 그이 곁에서 지켜보기에 그래 보이는데, 늘 삶이 순탄하지 않다. 사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그이의 이런 모습들이 슬슬 속상하고 가슴 아픈 단계를 뛰어넘어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또 한 번 팔짝 까무러쳐도 모자란 일을 겪었다. 보통의 남들 살아오는 길을 같이 정석 삼아 무난히 평범하게 걸어온 내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친구고 뭐고 여기서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고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그이가 진짜 내 친구였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말로 ‘친구’라고 부른다고 정말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입 밖으로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내 몸속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묵직하고 육중한 마음길이 저절로 열려야 비로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마음길은 손익을 따지는 머릿속 계산기 같은 이성을 하찮게 덮어버린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다고나 할까. 이렇게 마음길을 따라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친구’로 넓게 포용한다면 내게도 친구가 아주 많다. 엄마, 아빠, 동생들, 남편, 책들, 책 속 인물들, 반짝이는 햇살, 꽃들, 나무들, 토끼들, 고양이들, 그들, 그들, 또 그들까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모두가 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를 따스하게 감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