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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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국 중 하나인 미국의 50, 60년대는 황금기 그 자체였다. 물질적인 풍요로움, 생기 넘치는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 수많은 영화, 음악, 문학이 창조되고 소비되는 즐거운 시대였다. 이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인들은 대부분 그때를 추억하고 사랑한다.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도 저자의 유년 시절을 추억-추억이라고 하기엔 빌 브라이슨의 기억력이 놀랍기만 하다-하며 쓴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다 유쾌함에 웃음 짓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도 추억해 보게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온갖 사고를 치는 소년 빌 브라이슨에 나를 대입해 보기도 했으니까. 발도 닿지 않는 어른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매일 넘어져 다친 일, 겨울이면 동네 언덕에서 비료 포대를 타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 미닫이 문이 달린 흑백 텔레비전을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 등. 빌 브라이슨의 어린 시절을 읽다 보면 나도 꽤나 유쾌하고 생생한 기억들이 많았구나 싶다.

물론 이 책이 빌 브라이슨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해도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매카시즘이 전 미국을 휩쓸던 시대였던 만큼 이념의 갈등이 존재했고, 핵폭탄으로 보여지는 냉전의 분위기, 그리고 어른들만의 우울한 이야기들도 많았다. 직접 몸으로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책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의 동네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써 있던 ‘반공 멸공’ 이라는 글귀가 주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 시대가 다르고 지리적으로 아무리 멀게 있어도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다.

한없이 유쾌한 이 책을 보며 나 역시 빌 브라이슨처럼 부모님들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시절을 살았음을 느낀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이지만, 요즘 아이들이 자라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처럼 자신의 삶을 추억하면서 웃음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학교, 학원, 게임 같은 기억들로 꽉 차 있을 테니 말이다. 최신형 핸드폰이나 게임기를 샀던 것이, 가장 큰 추억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꽤나 묘하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은 어떤 것이 추억이 될까?

지하실에서 발견한 번개가 그려진 스웨터를 입으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썬더볼트 키드. 자신만의 상상력과 초능력을 더해 세계를 개척했다고 믿는 썬더볼트 키드를 보고 있자니 우리의 아이들도 이렇게 자라야 하는 게 마땅한 듯 싶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함’이다. 자서전류에 별 흥미가 없던 독자라도 이 책만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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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아라비안 나이트
리처드 F. 버턴 지음, 김원중.이명 옮김, 마르크 샤갈 그림 / 세미콜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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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나이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라고도 불리는 『천일야화千一夜話』는 아랍어로 적힌 방대한 설화 모음집이다. 세기를 거듭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현명한 여인 셰헤라자드는 잔혹한 샤리야르 왕에게 천 일하고도 하루 더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과 인도까지 광활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샤리야르 왕은 왕비의 부정을 목격하고 더없이 잔혹하게 돌변한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일 여인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처녀를 하룻밤에 한 명씩 불러들여 다음 날 동틀 녘이면 무참히 살해한다. 샤리야르 왕의 피의 잔치를 멈추게 하는 것은 권력도, 무기도, 돈도, 천상의 미모도 아니다. 바로 셰헤라자드의 서사, 즉 이야기다.

천 밤하고도 하룻밤을 더 이야기를 하면서 셰헤라자드는 생명을 얻고 샤리야르 왕은 광폭해진 마음을 잠재우고 피비린내를 씻고 위안과 평안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권력과 무기와 돈의 정점에서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했던 왕도 마침내 새 생명과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구한다. 그것은 바로 셰헤라자드의 이야기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온갖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빼놓으면 이야기도 남지 않는다. 셰헤라자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샤리야르 왕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들을 생명수 혹은 정화수처럼 한 방울씩 천하룻밤 동안 나누어 마신 것이다.

셰헤라자드의 이야기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샤리야르 왕처럼 화가 마르크 샤갈도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 벨라의 죽음 앞에 혼자 남겨진 슬픔과 고통을 위무받고 싶었던 것일까. 『천일야화』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의뢰를 받고도 처음에는 거절했던 샤갈은 목숨처럼 아꼈던 아내 벨라의 사후에야 다시 이 작업에 몰두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를 통해 귀한 석판화 13점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용구처럼 샤갈을 수식해 주는 ‘색채의 마술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몽환적이고 환상적링 분위기에 그 아름다운 빛깔이라니, 내가 언제나 샤갈에 매혹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꿈결을 걷게 해주는 샤갈의 그림들은 300여 편에 이르는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들 중에서 그가 직접 고르고 고른 네 가지 사랑 이야기를 황홀하게 어루만진다.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가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생의 사랑이었던 아내 벨라를 애도하고 아직 살아 숨 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호흡 하나하나를 어루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석판화를 제작하는 동안 샤갈이 빠져들었던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도 시간을 초월하여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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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쟈핑와 지음, 김윤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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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쟈핑와는 400쪽이 너끈히 넘도록 인생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위트가 넘치고 담백하게 친구 자랑(!)을 하는 에세이들을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다 보면 그의 사귐에 놀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쟈핑와의 친구 사귐에는 경계도, 나이도, 생사도, 겉치레도 없다.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으며, 동갑내기뿐만 아니라 훨씬 어린 사람도 훌쩍 나이 많은 사람도 개의치 않으며,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도 상관없으며, 무엇보다 겉으로 화려하고 요란하기보다 안으로 깊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속정 많은 오지랖도 넓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책도, 부모도, 스승도, 편집자도, 한 번도 살아 만나보지는 못한 싼마오도 모두 손익을 따지지 않고 친구이다. 인생에 작든 크든 교감을 나누고 짧은 순간이든 긴 시간이든 동반자로 함께해 온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전부 그에게는 친구라는 소중한 호칭으로 그윽한 묵향처럼 떠돈다.

쟈핑와의 『친구』는 ‘친구’라는 주제를 미리 정해 두고 그에 맞는 글을 적정 분량으로 계획적으로 써낸 책(소위 기획서)이 아니다. 이 책은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문, 머리말, 수필 등 다양한 장르로 무려 24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모아 주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은 묵직한 중수필집이다.”(※옮긴이의 말) 쟈핑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한 편 한 편 써두었던 글들을 차근차근 다시 읽어 나가고 적절히 나누면서 문득 자신의 인생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풍성하게 수놓아준 글 속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친구’라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모두 내 모난 성격 탓으로 돌렸다. 언뜻 손가락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얼굴들을 꼽아봐도 열 손가락 더는 넘어가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 연락해 오며 제법 자주 만나 수다를 떨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말을 좀 아낄걸’ 하는 생각 드는 일 없이 별로 부끄럽지 않은 친구들을 말한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고 나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위로받고 싶은 친구들을 말한다. 요사이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하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이는 여리고 외로움을 많이 타 아무 사람에게나 자기 마음을 잘 내보이고 기꺼이 그 마음 한 자락을 쉽게 내어준다. 내가 그이 곁에서 지켜보기에 그래 보이는데, 늘 삶이 순탄하지 않다. 사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그이의 이런 모습들이 슬슬 속상하고 가슴 아픈 단계를 뛰어넘어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또 한 번 팔짝 까무러쳐도 모자란 일을 겪었다. 보통의 남들 살아오는 길을 같이 정석 삼아 무난히 평범하게 걸어온 내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친구고 뭐고 여기서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고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그이가 진짜 내 친구였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말로 ‘친구’라고 부른다고 정말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입 밖으로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내 몸속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묵직하고 육중한 마음길이 저절로 열려야 비로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마음길은 손익을 따지는 머릿속 계산기 같은 이성을 하찮게 덮어버린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다고나 할까. 이렇게 마음길을 따라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친구’로 넓게 포용한다면 내게도 친구가 아주 많다. 엄마, 아빠, 동생들, 남편, 책들, 책 속 인물들, 반짝이는 햇살, 꽃들, 나무들, 토끼들, 고양이들, 그들, 그들, 또 그들까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모두가 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를 따스하게 감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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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이민진 지음, 이옥용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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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와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이지만 민족, 국가, 인종의 경계가 약화되면서 ‘이산散’ 혹은 ‘이산인’이라는 넓은 의미로 확장됐다. 이산인들, 즉 디아스포라들은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살아가며 경계인 혹은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이때 안팎을 구분하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민족국가의 영토”[※『디아스포라 문학』(정은경)]이지만, 사실 내가 ‘안’의 사람일 수 있는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구나 감정적으로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고향을 떠났다. 정서적인 고향(부모님)도, 물리적인 고향(공간)도 떠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직장을 잡고 가정까지 이루어 이젠 이곳이 내 생활의 중심임에도 나에게 서울은 여전히 ‘객지客地’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내 근원의 뿌리인 고향에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하고 있다. 그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이방인으로 들뜨고 경계인으로 서성거리고 스스로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한다(‘자처’는 일종의 자기 최면성의 위무다. 내가 자처하든 자처하지 않든 나는 어느새 아웃사이더로 밀쳐나 있다. 내가 아웃사이더로서 인사이더를 외면한다면,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내 의지도 물론 포함되어 있겠지만 소외감을 덜 느끼려면 그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나를 거부하기 전에 먼저 거부함으로써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방인, 경계인, 아웃사이더가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듯이. 하지만 내 근원의 뿌리로 늘 그리워하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맞춤옷을 입은 듯 들떠서 삐걱거리는 일 없이 편안히 안주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대단히 안타깝게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다. 나는 ‘고향’에서도 ‘객지’에서 생활한 흔적을 말끔히 지우지 못하고, 고향은 더 이상 ‘예전 내 고향’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나의 ‘소외감’은 언제 어디에 있든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온전한 고향 사람도, 객지 사람도 되지 못한 채 그럼에도 나는 내 미래를 꿈꾸길 포기하지 않는다.

이민진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작가 자신처럼 이민 1.5세대 여성 케이시 한을 중심으로 다양한 유형의 한인과 재미교포 사회의 모습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작가도 “내가 겪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이 책에 맘껏 담았다. 이제껏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놨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한국의 독자들에게)라고 고백했듯 그동안 가슴에 무겁게 꼭꼭 눌러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쏟아낸 것 같다. 그 이야기들은 언뜻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성장 배경을 투영한 조셉 한과 리아 조가 대표하는 이민 1세대 부모와, 케이시 한과 티나 한이 대표하는 이민 1.5세대 혹은 2세대 자식이 이루는 이민자 가정을 통해 속속들이 들여다보인다.

조셉 한과 리아 조는 새로운 삶을 찾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지만 정작 자신들은 미국 내 작은 한국인 한인 사회 안에서 맴돌며 모든 것을 바쳐 자식들을 뒷바라지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자식들이 대신 이루어주리라 기대한다. 자식들의 성공은 곧 삶의 터전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긴 부모의 선택과 결단력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니까. 그러나 케이시 한과 티나 한은 부모의 기대가 버겁고 부당하게만 느껴진다. 그녀들은 한국계(아시아계) 황인종이든 순수 백인종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주류든 비주류든, 이 모든 것을 떠나 ‘개인’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엄연히 황인종도 백인종도 존재하고, 한국인도 미국인도 존재하고, 주류도 비주류도 존재하며, 그 둘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넘어서기 힘들 만큼 크기만 하다. 엄연히 미국인이지만 한국계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식들이 미국인으로 미국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여 성공하길 원하지만 자식들에게서 미국적 정서가 아니라 한국적 정서를 기대하는 부모도 매몰차게 외면하기만은 어렵다.

그들은 고독하고 외로우며 소외감에 진저리친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하나의 ‘섬’으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숙명적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이민진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특징을 걷어내면 특정 집단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들의 열정, 집념, 야망, 꿈, 고독감, 좌절감, 소외감 등등을 생생하게 맞닥뜨릴 수 있다. 다만 그것들이 디아스포라들에게는 훨씬 극대화될 뿐. 세상의 모든 디아스포라들이 안팎, 이쪽저쪽, 이곳저곳과 같은 집단적 구별을 초월하여 ‘너’와 다른 ‘나’로 존재감의 뿌리를 내리고 ‘네 꿈’과 다른 ‘내 꿈’을 꿀 수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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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년을 만나다 세계신화총서 8
알리 스미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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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에서 사내아이를 바라는 남편을 둔 부인이 임신을 했다. 남편은 사내아이면 기르고 계집아이면 죽이겠다고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여자로 태어난 이피스는 아버지의 눈을 속여 남자아이로 길러지고 동갑내기 소녀인 이안테를 사랑하게 된다. 자신의 비밀을 괴로워하는 이피스는 여신 이시스에게 간청하게 되고, 결국 결혼식 날 신에 의해 소년으로 변하여 이안테와 행복하게 결혼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중 이피스 신화의 이야기를 빌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앤시아와 이모겐은 친남매이지만 둘은 선천적으로 다른 존재다. 이모겐은 남자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이며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위에 서고 싶어하는 평범한 다수 중 하나다. 성적으로 다수자이고 사회적으로도 다수를 지향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표본이다. 성적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에 반해 앤시아는 성적 소수자이며 권위주의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레즈비언인 동생이 못마땅한 이모겐, 자신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어 자신의 세계로 동생을 끌어들이려 하나 자신도 결국 기존 사회의 권위적이고 불합리한 현실-약자를 파괴하는 업무를 받고 상사에게 성적으로 굴욕을 당한다-에 맞서 눈을 뜨게 된다. 결국 앤시아를 이해하려는 이모겐, 이성을 사랑하는 자신과 동성을 사랑하는 동생이 전혀 다른 것이 없음을, 기존 사회의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저항하려는 동생을 받아들이고 자신도 자기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작가는 『소녀, 소년을 만나다』가 현대의 신화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어떻게 저항하는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고 변화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강자가 약자와 동등해지는 방법은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해 이기거나 강자가 약자를 이해하는 방법밖에 없다. 작가는 둘 다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실제로도 성적 소수자인 작가는 동성애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여아살해, 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능력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에도 저항한다. 첫 문장은 환상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작가는 모든 독자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모겐처럼 변하길 바라겠지만 이모겐의 변화는 신화적이라고 할 만큼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부족하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한 결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결말. 작가는 그저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할머니가 된 앤시아는 나중에 손주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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