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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아라비안 나이트
리처드 F. 버턴 지음, 김원중.이명 옮김, 마르크 샤갈 그림 / 세미콜론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아라비안나이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라고도 불리는 『천일야화千一夜話』는 아랍어로 적힌 방대한 설화 모음집이다. 세기를 거듭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현명한 여인 셰헤라자드는 잔혹한 샤리야르 왕에게 천 일하고도 하루 더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과 인도까지 광활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샤리야르 왕은 왕비의 부정을 목격하고 더없이 잔혹하게 돌변한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일 여인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처녀를 하룻밤에 한 명씩 불러들여 다음 날 동틀 녘이면 무참히 살해한다. 샤리야르 왕의 피의 잔치를 멈추게 하는 것은 권력도, 무기도, 돈도, 천상의 미모도 아니다. 바로 셰헤라자드의 서사, 즉 이야기다.
천 밤하고도 하룻밤을 더 이야기를 하면서 셰헤라자드는 생명을 얻고 샤리야르 왕은 광폭해진 마음을 잠재우고 피비린내를 씻고 위안과 평안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권력과 무기와 돈의 정점에서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했던 왕도 마침내 새 생명과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구한다. 그것은 바로 셰헤라자드의 이야기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온갖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빼놓으면 이야기도 남지 않는다. 셰헤라자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샤리야르 왕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들을 생명수 혹은 정화수처럼 한 방울씩 천하룻밤 동안 나누어 마신 것이다.
셰헤라자드의 이야기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샤리야르 왕처럼 화가 마르크 샤갈도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 벨라의 죽음 앞에 혼자 남겨진 슬픔과 고통을 위무받고 싶었던 것일까. 『천일야화』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의뢰를 받고도 처음에는 거절했던 샤갈은 목숨처럼 아꼈던 아내 벨라의 사후에야 다시 이 작업에 몰두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를 통해 귀한 석판화 13점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용구처럼 샤갈을 수식해 주는 ‘색채의 마술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몽환적이고 환상적링 분위기에 그 아름다운 빛깔이라니, 내가 언제나 샤갈에 매혹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꿈결을 걷게 해주는 샤갈의 그림들은 300여 편에 이르는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들 중에서 그가 직접 고르고 고른 네 가지 사랑 이야기를 황홀하게 어루만진다.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가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생의 사랑이었던 아내 벨라를 애도하고 아직 살아 숨 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호흡 하나하나를 어루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석판화를 제작하는 동안 샤갈이 빠져들었던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도 시간을 초월하여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