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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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리 내어 읽기’를 얼마나 오래도록 잊은 채 지내왔는지. 다니엘 페낙이 『소설처럼』에서 열변을 토하며 ‘소리 내어 읽을 권리’를 외치는 부분을 (그럼에도) 눈으로만 읽으면서 문득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소리 내어 읽기’에 대한 갈망이 불쑥 치솟았다. 어린 시절에 책, 더 정확히는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눈으로만 까만 문자들의 뒤꽁무니를 좇기 바빴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툭하면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내었다. 책 속 내레이션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인물들의 대사까지 혼자서 전부 도맡으면서 연기(!)했다. 특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너무나 로맨틱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러면서 혼자 있는 심심한 시간들을 채웠다. 어릴 적에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쉼 없이 입 밖으로 내뱉던 소리들은 이제 어디로 다 사라져버렸을까. 지금은 나밖에 듣는 이 없어도 홀로 소리 내는 일이 머쓱하기만 하다. 몇 마디 소리 내어보다가도 금세 말끝이 흐려져버린다.
 
다니엘 페낙은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자신이 이해한 만큼, 공감한 만큼, 감동받은 만큼 듣는 이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전혀 공감하지도,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한 채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참담하고 곤혹스러운 속내까지 고스란히 들킨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책 속 누구에게도 온전히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채 제3자로 관음증 환자처럼 관찰하기만 한다. 마치 책 속 인물들은 오로지 무대에서, 나는 오로지 객석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조금도 다가서지 못한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가끔은 책 속 인물들이 녹슨 태엽을 달고 끼익끼익 불안하게 서걱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차마 소리 내어 읽기 두려운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메마른 머리로 이해만 겨우 하여 진심으로 공감하지도 못하고 계산적으로 감동할 지점을 허둥지둥 찾는 나를 들킬까 봐.
 
무심한 남편은 있지만 아기도 직업도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마리 콩스탕스 G는 기차게 멋진 목소리와 담당 교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높은 텍스트 이해력을 밑천으로 “젊은 여성, 가정 방문하여 책을 읽어드립니다. 문학 서적, 문헌, 기타 서적”이라는 자극적인(!) 광고를 내고 ‘책 읽어주는 여자’로 나선다. 소리가 잘 울리는 푸른 방에서 귓가로 되돌아오는 자기 목소리에 만족하며 낭송 연습을 해보고 그녀를 찾은 사람들에게 그녀가 고른, 혹은 그들이 원하는 책을 읽어준다. “무엇보다도 말이 빚어내는 소리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소리에서 온갖 의미가 솟아난다는 사실을” 마리 콩스탕스는 일찌감치 속속들이 파악했던 것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그녀는 소리와 그것이 빚어내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하는 연극을 한 적이 있다. 그녀가 목을 울려 근사한 소리로 빚어내는 까만 글자들의 행렬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을 전하여 듣는 이를 통째로 뒤흔든다.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는 짧고 함축적이며 자극적이고 관능적인 소설이다. 그것은 자신이 읽은 대로 ‘소리 내어 읽기’에 주저함이 없는 마리 콩스탕스의 매혹적인 목소리로 더욱 증폭된다. 그녀의 부끄럼 없는 목소리는 듣는 이를, 그리고 그녀가 책 읽어주는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를 휘감고 붉은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내가 상상하는 마리 콩스탕스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도 마력의 힘을 지니고 내려앉는다. 마리 콩스탕스처럼 푸른 방도, 기차게 멋진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릴 적 놀이를, 어릴 적 소리를, 어릴 적 공감 능력을 되찾는 연습을 조금씩 해야겠다. 아, 연습이 필요할 정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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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8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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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티븐 킹의 귀환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붙은 『듀마 키』는 팬이라면 기대와 함께 걱정도 했던 작품이다. 이야기의 귀재라 불리며 주옥 같은 작품들을 쏟아냈던 시절에 비하면 요즈음의 스티븐 킹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들이 영화화된 이후 블록버스터 소설이라 불리며 영화를 염두에 두고 창작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스티븐 킹이 돌아왔다. 말 그대로 왕의 귀환이다. 유독 이 작품에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관심과 기대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듀마 키』는 자신이 당했던 교통사고 체험을 작품 속에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 이채롭다. 사고 이후 인생관, 예술관의 변화를 그림이라는 또 다른 예술의 한 분야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잘나갔던 건축 사업가인 에드거는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 수많은 재산까지 가지고 있던 남자였지만 현장에서의 교통사고로 인해 뇌가 손상되고, 한쪽 팔을 잃고, 아내와의 이혼으로 재산은 물론 가족과도 헤어지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에드거에게 주치의는 새로운 생활과 몰두할 것을 찾으라고 한다. 그의 말에 따라 플로리다 해안가의 듀마 키라는 섬으로 떠나 그림을 그리며 자살을 잠시 보류한 에드거는 자신에게 그림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드거의 그림이 실제로 현실이 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재능을 이용한 에드거는 친구의 병을 고쳐주고 살인마 같은 사회의 악을 처단한다. 하지만 희망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의 숨겨진 정서와 재능은 사실은 공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림의 사악한 힘은 갈수록 강해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스티븐 킹은 공포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작가이다. 킹을 유명하게 해줬던 작품들의 면면만 살펴보아도 폐쇄된 공간에서의 극한의 공포, 초자연적인 존재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한 공포, 평범한 상황에서 조금씩 커져가는 공포 등이 그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그려진 것이 많다. 수많은 좀비 떼들이나 잔혹한 연쇄살인마처럼 직접적으로 공포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스티븐 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부진했던 이유도 이처럼 직접적으로 공포를 이야기했기 때문은 아닐까. 주변의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살짝 엿보이는 복선 등이 어우러져 긴장감이 점점 커지고 근원적인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하는 것이 스티븐 킹의 방법이다. 『듀마 키』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는 듯 킹 특유의 상상력과 환상적인 모습으로 무장하고 되돌아온 것 같아 읽는 내내 반가웠다. 아쉬웠던 점은 공포의 매개가 되는 그림이 시각적인 부분이 큰 것이어서 글로는 그 이미지를 읽어내기가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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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 / 하늘연못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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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라는 제목은 화려했던 영광을 되새겨보는 것 같아 기대를 품게 하는 동시에 약간은 서글프다. 솔직히 말하자. 골든에이지, 황금 시대라는 제목은 현재 미스터리는 퇴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현대에서 미스터리-특히 본격물이라 불리는 장르는 신작을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첨단 과학기술로 증거를 찾는 시절에 탐정의 직관과 추리-홈즈의 번뜩이는 재기와 포와로의 회색 뇌세포, 이 그리운 이름들이라니!-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결국 현대의 미스터리는 사회파와 하드보일드가 주를 이루며 진화하고 있다.

황금 세대의 미스터리 중편이라고 하지만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에서 낯익은 작가라곤 『월장석』으로 유명한 윌리엄 윌키 콜린스와 『독화살의 집』에서 활약한 프랑스 탐정 아노를 창조한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 정도이다. 작가들 소개와 그 시기에 따르면 황금세대에 활약했던 작가들이라기보다 그 이전의 세대, 미스터리가 태동할 무렵에 활약했던 작가들이다. 그런 이유일까. 이 책의 작품들은 익숙하진 않지만 다양한 형태의 미스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3층 살인 사건」은 러브 미스터리라고 할까. 극작가라는 작가의 직업 덕분인지 작품 내내 연극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뒷부분의 이야기 전개는 지금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산뜻한 구성이다. 미국 최초의 법정 소설이라는 「데드 얼라이브」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약점이 된 듯하다. 이것저것 섞다 보니 오히려 밀도가 약해진 느낌이다. 엘러리 퀸이 선정한 가장 중요한 추리소설 125편의 리스트에 선정된 「안개 속에서」는 대가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개인적으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며 마지막의 유쾌한 반전까지 읽는 재미가 있던 작품이다. 「버클 핸드백」은 특이하게도 탐정 역할을 하는 간호사가 등장하여 새로움을 준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구성을 살펴보는 것도 큰 재미다. 「세미라미스 호텔 사건」은 프랑스인 탐정 아노와 조수 콤비가 등장하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구성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평이한 작품이다.

‘골든에이지’라는 화려한 제목을 보고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을 듯한 작품집이다. 추리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낯선 작가들과 유명한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은 밋밋해 보일 만한 작품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 세대 개척기의 여러 작가들의 각기 다른 형식의 작품들을 담백한 맛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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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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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가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멍한 눈으로 대나무 잎을 씹고 있는, 약간은 코믹한 듯한 노란색 표지를 가진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맛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육식동물이었던 팬더가 미각을 느껴 신에게 벌을 받아 육식만 할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만 남은 채로 대나무 잎을 먹게 되었다. 팬더와 인간, 유일하게 맛을 추구하는 동물이며 끝없는 욕구로 신의 분노를 산 팬더 같은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금단의 팬더』에는 충격적인 반전이나 범인이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범인 찾기는 어렵지 않을 터, 이 책은 범인 찾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맛있는 음식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과 수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미식가라고 한다. 그리고 신에 도달하고 싶은 요리를 만들어내고 싶은 요리사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광기에 가득 찬 욕망에 사로잡혀 끝없는 그 대가는 파멸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의 사제인 루이 뱅상, ‘퀴진 드 듀(신의 요리)’라는 레스토랑의 오너이며 신의 미각을 가진 나카지마, 맛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추구하는 신의 요리사 이니구시, 이 금단의 유전자를 가진 세 사람과 대비되게 순수하게 맛을 추구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요리사인 코타를 내세워 인간의 욕망을 넘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지켜야 할 절제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이 책의 대화는 대부분 사투리로 이루어져 있다. 책에 의하면 간사이 지방의 억양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사투리로 대체한 것 같은데 ‘뭐라꼬?’, 오빠야, ~ 먹고 싶다 아이가’ 같은 대화들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간사이 지방의 억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투리려니 하고 상상하고 읽는 것과 실제로 우리나라 사투리를 보는 것은 느낌이 매우 다르다. 미국 흑인이 ‘괜찮아유~’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나에게는 이 사투리가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고 작품에 대한 몰입을 떨어뜨렸다.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래 맛에 대한 추구는 계속 이어져왔다. 고기를 구워 먹고 향신료를 사용하고 갖가지 요리법을 개발해 끊임없는 맛을 추구했다.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군침을 흘릴 만한 수많은 재료와 요리가 등장하지만 양식에 대한 경험이 없어 그 맛을 짐작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의 요리’ 같은 것은 절대 보고도, 먹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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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 박상우 산문집
박상우 지음 / 시작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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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설가 박상우가 말하는 ‘근원자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나 있던가. “진정한 나를 찾고 있는 사람들, 진성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여기, 내가 얻은 작은 일상의 공간을 바친다”는 그의 책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를 읽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사에 좋고 싫음이 분명해 나는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으로 나를 규정지었다. 이건 좋아하고 저건 싫어하니 나는 이렇다든가, 또 저건 좋아하고 이건 싫어하니 나는 저렇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근원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망상자아’를 ‘나’라고 착각해 온 셈이다.
 
지금, 여기에서 즐거워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되도록 싫어하는 것은 피하고 좋아하는 것만 취하며 서른 해를 넘게 살아왔다. 입버릇처럼 ‘나’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려 무진장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재미 삼아 “나는 말초적인 즐거움만 찾아”라고 말하면서. 문득 그렇게 습관처럼 되뇌던 말이 한마디 한마디 모여 나를 후려치는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어 내렸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책 무더기, 홍차 잎캔들, 어젯밤 날 새도록 게임에 열중하다가 마침내 지쳐 이불 위에 내팽개쳐둔 패드, 클래식 음반들, 수틀과 색실들, 제각각인 컵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것들은 내가 지금도 좋아하거나, 한때 열광적으로 빠져들었지만 지금은 시들해진 관심사의 파편들이다. 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어제 좋아했던 것을 오늘 싫어할 수도 있고, 어제 싫어했던 것을 오늘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으로 바라보던 ‘나’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되면 또 달라질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박상우가 말하는 ‘근원자아’가 아닐까?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에는 박상우가 “내가 나를 부르는 곳, 내가 나를 만나는 곳, 내가 나를 되찾는 곳”이 단아하고 고요하며 명상적인 글과, 또한 그만큼 멋진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의 사진 찍는 솜씨가 뛰어나서 그런지, 그의 글 솜씨가 더욱 뛰어나서 그런지, 그 장소들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그곳에 진정 변함없이 중심을 올곧게 잡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망상자아라도 그 또한 나의 일부이니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의 망상자아에 지치면 근원자아를 찾아 나서고 싶다. 그때는 꼭 혼자여야 한다. 내가 모르는 나와 마주할 날, 아마도 나는 가장 큰 시름 속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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