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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미로
엠마 캠벨 웹스터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영국, 그것도 빅토리아시대부터 더 이전, 18~19세기 이야기에 꼼짝없이 빠져드는 습성이 있는 나로서는, 책 한 권으로 그것도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설득』, 『엠마』, 그 외의 초기 작품들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매혹적인 장점으로 다가왔다.
엠마 캠벨 웹스터의 『제인 오스틴의 미로』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제인 오스틴’의 후광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즈데이 넥스트 시리즈로 익숙해진 재스퍼 포드의 멋들어진 추천사까지 나를 유혹했으니, 『제인 오스틴의 미로』가 쳐놓은 덫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으리라. (제인 오스틴은 이미 옛날 옛적에 고인故人 이 되셨으니 내가 그 덫에 걸리는 데 직접적으로 일조한 바는 없지만, 재스퍼 포드는 크게 책임을 져야 한다. 맙소사, 신뢰할 만한 작가라고 생각한 그가 설마 주례사를 할 줄이야…….)
하지만 진작 눈치 챘어야 한다. 이번 여행이 만족스러우려면, 최소한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유기적으로 재구성돼야 하며, 여기에 반드시 후세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곁들여져야 하고, 탄탄한 스토리와 짜임새 있는 구성은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소설’다워야 한다는 것을. ‘제인 오스틴’의 이름을 빌려 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면 그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졌어야 했다는 것을.
엠마 캠벨 웹스터의 『제인 오스틴의 미로』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럴 때 그렇게(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식의 질문에 ‘예’ 혹은 ‘아니오’나 그 밖에 주어진 간단한 대답 중 하나를 선택해 거미줄처럼 펼쳐진 질문들에 모두 답하고 나면 ‘A형, B형, C형……’의 결과에 이르는, 잡지 속 심심풀이 테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빌려 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선한(?) 시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로 여행의 첫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지겨워졌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틀을 빌려 왔으면, 틀 안의 알맹이는 제대로 채웠어야 했다. 작가가 제시한 몇 가지 대답들 중 하나를 독자가 선택하여, 작가의 손바닥 안에서 독자가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라지만, 제인 오스틴의 그 많은 소설들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알맞게 엮어 나가기만 하다니(그 외의 부분들도 ‘누구는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의 진행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가슴 떨리는 섬세한 심리 묘사도, 제인 오스틴 시대의 풍속이나 자연 묘사도, 긴장감도 눈 씻고 찾아봐도 못 찾겠다. 게다가 꽤나 자주 오르락내리락 보태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하는 “두뇌 점수, 자신감 점수, 행운 점수, 재능 점수, 인맥 점수”의 결과는?
상당히 초반에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끝을 봐버린 나는 이제 대놓고 내가 선택한 길뿐만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길도 샅샅이 훑게 되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책장을 앞으로, 뒤로 뒤적뒤적하는 일에 싫증이 나버렸다. 잡지 속 심심풀이 테스트는 간단하기라도 하지, 이 책의 몰입하기 어려운 줄거리 진행은 주저리주저리 길기만 하여 읽기가 성가셨다.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는데도 『제인 오스틴의 미로』에 관심이 생긴다면, 로맨스는커녕 너무 일찍 파탄에 이른 엘리자베스의 심통쯤으로 생각해 주길. 이 책의 끝부분에 있는 “인용된 인명, 지명 및 상황”은 유익했음도 아울러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