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랜덤 - 마법에 걸린 떠돌이 개 이야기
J.R.R 톨킨 지음, 크리스티나 스컬 & 웨인 G. 해몬드 엮음, 박주영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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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랜덤』은 판타지 문학의 대가, 톨킨이 해변에서 작은 바둑강아지 인형을 잃어버려 상심한 둘째 아들 마이클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지어낸 귀여운 이야기다. 애초에는 아들의 바둑강아지 인형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들려주려고 말로 시작한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점점 상상의 날개를 달아 복잡한 세계를 이루고, 급기야 글로 집필되고, 톨킨 사후에 출간됐는지는 엮은이 서문에 흥미롭게 나와 있다.

톨킨의 상상에 의하면, 마이클의 강아지 인형은 원래 ‘로버’라는 이름의 진짜 강아지였는데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장난감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장난감으로 변한 로버는 장난감 가게에 진열되어 있다가 팔려 잠깐 마이클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로버는 제 모습을 되찾기 위해 마이클을 떠나 다시 모험을 나선 것이다. 꿈처럼 환상적인 이야기로 아들의 상실감을 메워주려는 톨킨의 따뜻한 부정에 절로 웃음 짓게 되는 순간이다.

웅장하고 장엄하며 치밀하고 복잡한 세계를 구축한 『반지의 제왕』에 비하면, 『로버 랜덤』은 단순한 플롯의 아기자기한 소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뒤편에 제법 길게 수록된 주석을 살며시 들춰봐도 금세 알 수 있듯이 이야기 곳곳에 차용해 온 신화, 전설, 명작 동화의 모티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숨어 있다. 무엇보다 마법에 걸린 로버가 해변에서 에디스 네스빗의 모래요정을 만나는 장면은 깜찍하기 그지없다. 로버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들르게 되는 달의 정원(아이들이 잠자면서 자기 꿈을 가지고 모여드는 곳), 바닷속 인어들의 왕국도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친근한 세계를 빌어다가 조각 퍼즐 맞추듯, 로버가 종횡무진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 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나간 톨킨의 시선은 다정한 장난꾸러기 같다.

『로버랜덤』은 생전에 톨킨이 완성작으로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 아니다. 엮은이 서문에 따르면, 톨킨은 한창 로버랜덤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 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로버랜덤』을 다듬을 수 있었다면……, 그의 완성작 『로버랜덤』을 읽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아마도 나의 빈약한 상상 너머의 이야기가 펼쳐질 텐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톨킨의 조각난 이야기들을 엮어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준 엮은이가 고맙다. 또 매혹적인(지금도 그 점이 모자라지는 않지만) 완성작『로버랜덤』을 조금이나마 짐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엮은이 서문과 주석은 이 책에서 빼버리면 아쉬울 만큼 매력적인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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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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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 특히 추리소설에서 클래식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원한이나 복수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도 있겠고, 치밀한 범죄자가 탐정에게 도전하는 사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고전이라면 역시 유언장에 남겨진 유산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가족간의 이야기가 으뜸이 아닐까.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누가미 일족』 역시 이런 고전적인 이야기 방식을 따르면서 발생하는 사건 속에 범인의 트릭과 탐정의 해결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원한 고등학생이며 늘 사건 현장을 참혹하게 만들고 마는 김전일(긴다이치 하지메)이 틈만 나면 부르짖는 할아버지 긴다이치 고스케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중적인 인기가 대단했던 작품이다. 더 말해 무얼 할까. 이 작품은 재미있다. 어리숙한 더벅머리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매력과 요코미조 세이시가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이누가미 일족의 인간관계와 살인을 둘러싼 트릭을 즐기고 있자면 어느새 결말이 다가온다.

이누가미 사헤 옹은 유언장에 자식들을 배제한 채 은인의 손녀인 다마요에게 배다른 손자들과 결혼할 것을 전제로 유산을 남긴다. 다마요가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전쟁 중에 얼굴을 다쳐 고무가면을 쓰고 있는 스키케요와 스케타케와 스케모토 등 다른 손자들은 다마요와 결혼하거나 다마요가 없어져야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스키케요의 경쟁자들은 살해되고 가면을 쓴 스키케요가 진짜인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지문 대조를 통해 결국 스키케요는 진짜로 밝혀진다. 그리고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유언장에도 두 번째 수혜자로 언급된 사헤 옹의 또 다른 자식인 시마즈가 나타나고 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요코미코 세이시의 작품을 읽다 보면 존 딕슨 카,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의 영향(다른 작가지만 이름까지 바꾸며 애드거 앨런 포를 경배하고 있는 에도가와 란포는 말할 것도 없다)을 받은 부분을 찾을 수가 있는데, 대가들의 자양분을 흡수해 자신과 일본의 색깔을 보여주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과거나 지금에나 열악한 국내의 장르문학 현실이 아쉽기도 하다. 국내에 번역되어 있어서 구해 읽은 요코미코 세이시의 작품은 『이누가미 일족』, 『악마의 공놀이 노래』, 『팔묘촌』, 『옥문도』, 『혼징살인사건』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읽은 『이누가미 일족』과 『혼징살인사건』(함께 있는 나비부인 살인사건)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각기 다른 트릭과 이야기가 매력적이니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다른 책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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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
이주향 지음 / 시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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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주향 철학교수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성서를 포함한 고전 명작 속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사랑’을 다양한 테마로 다각도에서 변주한다. 달콤한 명상적 문체로 사랑이 발휘하는 위대한 영향력을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 짧은 글으로 깊은 사색을 이끌어낸다. ‘철학’을 하는 사람의 책답게 문장 하나하나 곰곰이 돌이켜보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래서 금방 읽어낼 줄 알았던 책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열다섯 명의 커플들을 3개월에 걸쳐 촬영하여 15컷을 하나로 만든” 김아타의 사진(※표지사진)처럼, 이주향 철학교수도 모두 31편의 명작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지만 결국 근원적인 ‘사랑’로 통하는 서른세 쌍의 남녀를 찾아내어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은 태초의 사랑 하나를 형상화한다. 그녀가 원래 사랑은 이래, 라고 황홀하게 들려주는 순결한 사랑의 고귀한 모습은 감히 난 그를 사랑해, 라고 입에 담기가 무안할 정도이지만, 태초 이래 가벼운 사랑의 빈말들이 난무하는 오늘날까지도 사랑이 삶의 주제, 철학의 주제, 예술의 주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은 사랑의 깊고도 무겁고 핵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인간과 동물, 식물, 자연을 끌어안고 있는 대지의 중력처럼 태초의 사랑도 핵을 지녀 가벼운 사랑이든 무거운 사랑이든, 진실한 사랑이든 거짓된 사랑이든, 솔직한 사랑이든 편견 가득한 사랑이든, 세상의 모든 사랑을 끌어당겨 정화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사랑’이 난무해도 사랑 본연의 아름다운 힘을 잊지 않도록.

『사랑이, 내게로 왔다』에서 가장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었던 꼭지들은 역시 내가 읽은 적이 있고 좋아해 왔던 커플들의 사랑을 들려주는 부분들이었다. 특히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애버트와 저비 스펜들턴,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의 제인 에어와 에드워드 로체스터,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J.R.R. 톨킨 『반지 제왕』의 톰 봄바딜과 금딸기 이야기. 이주향 교수의 사랑 접근법으로 재해석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새로움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커플들 중 대체로 여성과의 가상 인터뷰가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주향 교수의 질문에도, 명작 속 여성의 대답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그녀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대로) 느껴진다. 잡지 마감을 위해 글을 위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끼며 보듬고 어루만져온 보석 같은 커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풀어냈다는 것을 느낀다. 글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진심이 아니었다면 아마 독자도 빛만 좋은 글에 공감하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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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 -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는 비밀스런 이야기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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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wallflower는 무도회에서 아무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여성을 말하는 의미이지만 일반적으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티븐 크보스키의 『월플라워』는 찰리라는 이름의 소년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를 잘 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를 취하고 있다. 1년여 동안 계속되는 편지에서 찰리는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고백한다.

자신의 선물을 사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헬렌 이모와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마이클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인 트라우마,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만나게 될 새로운 친구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찰리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가정폭력, 마약, 동성애, 섹스 등 찰리와 친구인 샘과 패트릭이 겪었던 치열한 사춘기의 일상, 몸과 마음이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혼란과 고민, 상처의 극복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 있다. 도덕론자들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들은 이 책이야말로 자신들을 위한 필독도서라고 주장한다. 도덕론자들에게 이 책이 공격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청소년들에게 미칠 해악을 차단한다는 명분 때문인데 이처럼 의미 없는 이유가 있을까. 책 한 권으로 덮기엔 정보는 이미 넘치고 있으며 해악의 요소는 현실에 가득하다. 평범한 시절을 보낸 어른이 얼마나 될까. 마약을 담배로, 섹스를 포르노 잡지로 대체해 본다면 성장기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어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덕론자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은 수도승 같은 고고한 어린 시절을 겪어온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모든 성장소설이 그렇겠지만 성장통을 극복하는 것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은 편지를 받아주는 당신일 수도 있고, 편견을 갖지 않은 가족일 수도 있으며, 문화를 함께 이야기한 선생님일 수도 있으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자신이 팔을 둘러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구석에 숨어 있지 않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터널 속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며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빛이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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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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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me, 달콤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동글동글한 사과.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라고 말하는 수동적인 어머니. 아버지가 집을 나갈 때도 잡지 않았던 어머니와 함께 자란 뽐므는 어머니처럼 동글동글한 사과 같은 사람이 된다.

미용실에서 함께 일하는 마릴렌, 화려하고 남의 시선을 원하는 뽐므와는 대비되는 그녀는 뽐므의 순수함에 이끌려 친하게 지내지만 곧 그녀를 떠난다. 휴양지에서 만난 에므리, 파리 국립고문서학교에 다니며 예비 박물관장을 꿈꾸는 지식인이며 도회적인 사람인 그 역시 뽐므의 동글동글한 매력에 빠졌다. 말없는 그녀, 순종하는 그녀에게 반한 에므리는 뽐므와 동거를 한다. 그녀는 조용히 생활비를 벌고 집안일을 했으며 에므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결국은 그런 뽐므를 에므리는 지겨워한다. 뽐므의 침묵을, 뽐므의 배려를, 뽐므의 이 닦는 소리를 싫어한다. 결국 뽐므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한없이 수동적인 모습으로 에므리를 떠난다. 혼자가 된 그녀는 자신의 동글동글한 몸을, 사과 같은 자신을 싫어해 거식증에 걸리고 만다.

뽐므의 침묵은 에므리를 배려하는 그녀 나름의 소통방식이었지만 에므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뽐므 역시 에므리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뽐므는 마침내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과 단절했다. 에므리와 주위 사람들의 일방성에, 세상의 불합리함에 지친 그녀는 거식증에 걸린다. 어쩌면 뽐므 스스로 원했던 것일까. 자신을 주위의 모든 것에서 유폐하고 꼬치처럼 말라간다.

레이스를 뜨는 것은 관계를 수놓는 작업이다. 주위와 얽히고 얽혀야 무늬를 만들어 내는 레이스처럼 뽐므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과 세상들과의 관계 아니었을까. 한 올이라도 닿아 있지 않으면 풀려 버리는 레이스처럼 거식증에 걸린 뽐므는 풀려버린 레이스 같은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병원을 찾은 에므리에게 뽐므는 결국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표정을 보여 준다. 조금이나마 세상의 소통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일까.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는 소통을 이야기한다. 뽐므의 침묵은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할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침묵하는 뽐므와 가장 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러시아 할머니였다는 것은 말이 소통에 있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하지만 그 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소통에 문제가 되는 것인지를 보여 준다. 뽐므의 침묵이 신비한 매력으로 보였던 에므리였지만 연인이 된 뽐므의 침묵은 답답함 그뿐이었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에므리를 보는 뽐므에게 침묵은 최선의 대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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