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Pomme, 달콤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동글동글한 사과.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라고 말하는 수동적인 어머니. 아버지가 집을 나갈 때도 잡지 않았던 어머니와 함께 자란 뽐므는 어머니처럼 동글동글한 사과 같은 사람이 된다.

미용실에서 함께 일하는 마릴렌, 화려하고 남의 시선을 원하는 뽐므와는 대비되는 그녀는 뽐므의 순수함에 이끌려 친하게 지내지만 곧 그녀를 떠난다. 휴양지에서 만난 에므리, 파리 국립고문서학교에 다니며 예비 박물관장을 꿈꾸는 지식인이며 도회적인 사람인 그 역시 뽐므의 동글동글한 매력에 빠졌다. 말없는 그녀, 순종하는 그녀에게 반한 에므리는 뽐므와 동거를 한다. 그녀는 조용히 생활비를 벌고 집안일을 했으며 에므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결국은 그런 뽐므를 에므리는 지겨워한다. 뽐므의 침묵을, 뽐므의 배려를, 뽐므의 이 닦는 소리를 싫어한다. 결국 뽐므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한없이 수동적인 모습으로 에므리를 떠난다. 혼자가 된 그녀는 자신의 동글동글한 몸을, 사과 같은 자신을 싫어해 거식증에 걸리고 만다.

뽐므의 침묵은 에므리를 배려하는 그녀 나름의 소통방식이었지만 에므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뽐므 역시 에므리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뽐므는 마침내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과 단절했다. 에므리와 주위 사람들의 일방성에, 세상의 불합리함에 지친 그녀는 거식증에 걸린다. 어쩌면 뽐므 스스로 원했던 것일까. 자신을 주위의 모든 것에서 유폐하고 꼬치처럼 말라간다.

레이스를 뜨는 것은 관계를 수놓는 작업이다. 주위와 얽히고 얽혀야 무늬를 만들어 내는 레이스처럼 뽐므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과 세상들과의 관계 아니었을까. 한 올이라도 닿아 있지 않으면 풀려 버리는 레이스처럼 거식증에 걸린 뽐므는 풀려버린 레이스 같은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병원을 찾은 에므리에게 뽐므는 결국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표정을 보여 준다. 조금이나마 세상의 소통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일까.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는 소통을 이야기한다. 뽐므의 침묵은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할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침묵하는 뽐므와 가장 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러시아 할머니였다는 것은 말이 소통에 있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하지만 그 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소통에 문제가 되는 것인지를 보여 준다. 뽐므의 침묵이 신비한 매력으로 보였던 에므리였지만 연인이 된 뽐므의 침묵은 답답함 그뿐이었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에므리를 보는 뽐므에게 침묵은 최선의 대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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