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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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낯선 곳보다 익숙한 곳을 훨씬 좋아하여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한곳에 비비적거리면서 자족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난해까지는 단 한 번도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독한 붙박이 성향인 내가 ‘행복한 나라’라는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여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에 푹 빠져버렸다.

스무 해를 훌쩍 넘기도록 머물렀던 안전한 부모 슬하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루어 독립하고 보니, 부모의 든든한 보호막 안에서는 굳이 보지 않아도, 몰라도 괜찮았던 세상 물정이 절로 보이고, 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대체로 행복했던 나의 생활이 실제로 올해부터 흉흉하게 위협당하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의 여파가 나에게까지 들이친다면, 그건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니까.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남거나, 떠나거나. 남아 작은 행동 하나를 보태어 행복으로 가는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에 불안한 의구심이 짙어지면, 다른 어느 곳도 ‘지금, 여기’보다는 낫지 않을까, 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에릭 와이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행복으로 이르는 지도를 그리고자 했다. 그가 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 보고서가 바로 『행복의 지도』이다. 행복을 수치화하여 행복학을 연구하는 ‘세계 행복 데이터베이스’가 있는 네덜란드를 시작하여 국민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에서 낮은 나라까지 여행하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무엇이 행복도를 증가시키고, 또 무엇이 행복도를 떨어뜨릴까’를 자유로운 단상으로 끊임없이 풀어낸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담백한 재치와 유머로 가벼운 필치를 더해 500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지루한 줄 모르고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는데, 행복에 대해 다각도로 강박관념 없이 좀더 편안하게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소수의 ‘나’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경제’를 선택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때로는 맞장구치면서, 때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행복의 지도』를 읽는 동안 유독 세계 최대의 부국 ‘카타르’가 씁쓸하게 잊히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은 행복한 나라로 꼽혔지만, 나에게는 졸부들의 불행한 나라로 다가왔다. ‘돈’이 행복의 한 요소임은, 최소한 생존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만큼의 ‘돈’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임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 이상의 돈’은 행복을 저해한다. 지금 우리 행복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경제’가 아닐까. ‘경제’를 선택했지만 ‘경제’는 나동그라지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부르짖은 사람은 먼저 국제 정세 탓을 하니 잘못된 선택, 공허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행복 여행을 떠난 에릭 와이너의 결론은, 행복은 미꾸라지 같지만 행복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행복한 나라, 불행한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한 나라 안에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섞여 살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한 나와 불행한 나가 어울려 완전한 ‘나’를 형성한다. 조지 버나드 쇼가 말했다지. “오로지 행복하기만 한 평생이라니! 그런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삶은 지상에서 경험하는 지옥이다.” 세상 그 무엇도 지나쳐서는 좋을 것이 없나 보다. 행복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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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만드는 소년 - 바람개비가 전하는 치유의 메시지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폴 플라이쉬만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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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중심은 ‘자아 찾기’일 것이다. 평생을 두고 문득 자아를 잃어버리고 고통스럽게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육체적 성장은 멈추어도 영혼은 성장을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끝없이 갈구하는 자아, 진정한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인 줄 알고 되찾으려는 것일까? ‘자아’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는 일은 짤막하게 남기는 책 읽은 후의 감상 안에 일목요연하게 매뉴얼처럼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내 내면의 눈’이 만족스럽게, 그리고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남의 시선에 물들지 않은 원시적인 본성일 것이다. 원시적인 본성을 속이는 생활은 꼭 맞는 내 옷이 아닌, 꽉 기거나 지나치게 헐렁한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나를 옥죄거나 나에게서 겉돌며 남의 가면을 뒤집어쓴 유령의 삶을 살게 한다. 원시적인 본성을 되찾아야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내면이 시끄럽게 소용돌이치지 않는다. 그래야 ‘진정한 나’를 토양으로 깊이 뿌리내린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다.

폴 플라이쉬만의 『바람을 만드는 소년』의 주인공 브렌트가 성장하는 이야기도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 원시적인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브렌트는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까에만 전전긍긍하는 열여덟 고등학생이다. 친구들의 눈에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 한껏 신경 쓴 옷차림을 하고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갔다가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한다. 졸지에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브렌트는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파티장을 뛰쳐나와 경솔한 자살의 마음을 품은 채 음주 운전을 한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착한 영혼을 덮친다. 마치 착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착해질 기회를 한 번 더 주려는 듯이. 그것이 착한 영혼의 안타까운 마음이라는 듯이.

브렌트 대신 죽은 착한 영혼, 리 잠모아도 브렌트에게 착해질 기회를 준다. 남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해 온 브렌트가 더 이상 남의 변덕스러운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그리고 바람직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이제 『바람을 만드는 소년』의 진짜 이야기, 리가 좋아했던 바람개비를 만드는 속죄 여행이 시작된다. 리를 위한 브렌트의 속죄 여행은 남의 시선에 옭죄어 있던 자신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아를 되찾는 성장의 고통스러운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브렌트의 속죄와 성장은 브렌트 개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브렌트가 온 마음을 다해 세운 바람개비 네 점은 브렌트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작고 소박한 삶의 이야기 네 편을 싣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브렌트는 드넓은 땅을 여행하며 바람개비를 하나씩 세울 때마다 자신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자기 본성을 회복해 간다. 단지 리를 향한 죄책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려는, 단지 살인죄로 소년원만큼은 가지 않으려는 영악한 거짓 속죄의 마음이 아니라, 진정이 깃든 바람개비는 유령 브렌트를 진짜 브렌트로 변화시킨 따뜻한 미풍을 브렌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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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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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카 대학의 의국에 근무하면서 발생학 강의를 맡고 있는 소네자키 리에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의료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곧 폐업하게 될 마리아 클리닉에서 마지막 다섯 명의 임산부를 진료하는데 일본에서 불법인 대리모 출산에 관련되어 있다는 투서가 들어오면서 그 숨겨진 비밀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

가이도 다케루의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대리모를 통해 접근하는 생명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와 관료주의 덕분에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공공 시스템으로서의 의료 문제가 그것이다. 인공수정 전문가이며 자신도 난소를 제거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주인공인 소네자키 리에를 내세워 이 두 가지 문제를 현장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리모에 대해서는 소네자키 리에의 극단적인 접근-대리모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만을 제공하면 된다는-도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수긍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리모라는 현실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것이어서 생명의 탄생이라는 본질적인 문제 이전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로 현실적인 공공 시스템으로서의 의료 문제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치명적이다. 저출산을 우려하면서도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마저 비용을 이유로 정치적인 논리를 들먹이는 관료들의 행태는 쓰레기 말고는 대체할 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출산은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의료행위로 보면 안 되고 보험료도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처구니없는 관료주의의 끝을 이야기한다. 현장을 전혀 파악하지도 않고 파악할 생각도 없는 관료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가이도 다케루는 마리아 클리닉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복지나 의료행위 등은 정치적인 관료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현직 의사이기도 한 가이도 다케루는 전작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이 미스터리에 치중했다면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을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공공 시스템보다 정치 논리가 우선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근래 우리나라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불쾌하고 씁쓸하다. 결국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소수가 아니던가. 현장의 목소리와 문제점을 내세우는데 치중한 탓인지 리에의 곁에서 항상 함께한 출산조무사 묘코가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서를 보내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는 소설로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듯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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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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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금발, 하얗고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욕망을 대신 해소시켜 준 포르노 배우이자 제작자가 술과 마약에 찌든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고로 화상을 입고 온몸이 검은 가고일처럼 변한 처참한 자신의 모습. 포르노 배우에게는 가장 중요한 음경마저 손상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는 마리안네 엥겔이라는 한 여인. 그녀는 “너 화상 입었구나, 또.” 라는 말로 찾아와 그와 자신의 700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리안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점차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고 퇴원한 후 마리안네와 지내면서 그럴 듯한 자신의 외모로 섹스를 팔았던 자신에게도 700년의 사랑이 있었음을,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깨닫는다. 석상 가고일에게 심장을 주어 생명을 불어 넣은 마리안네는 마지막 심장을 그에게 전해 주고 사라진다.

우리 시대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고귀한 것이 되었다. 하룻밤의 만남도 사랑으로 포장되고 화학적으로 분해되기도 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발에 치이는 것이 사랑인지라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라고 외치는 앤드루 데이비드슨의 『가고일』의 선전 문구에는 여타 로맨스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고 하였으나 이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로맨스이자 러브 스토리다. 예술작품에서만큼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끝나는 사랑은 그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마리안네가 들려주는 네 가지 짧은 사랑 이야기는 자신들도 그 이야기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임을 암시한다. 사랑을 위해 죽은 사람과 그 사람을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는 더할 수 없는 비극이어서 슬프고도 아름답다.

작가 앤드루 데이비드슨은 천년의 『가고일』을 통해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 3년여를 생활하고 그 시절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이야기-이 책에서도 다이묘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로 미루어 보아 앤드루 데이비드슨은 자기만의 천 년의 사랑 『겐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서양의 문화와 결합되어 색다른 분위기를 전해 준다. 하지만 이것이 동양권에서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윤회 사상-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우리에게는 얼마나 익숙한 소재이던가. 전생의 부부나 원수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들을 보라-을 기반으로 잘 포장된 서양의 이야기는 색다른 경험일지는 모르겠지만, 요란한 선전 문구처럼 시대에 남을 사랑의 고전은 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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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책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존 코널리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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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속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것은 이야기 밖보다 이야기 안의 세계가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현실 속에서 실제로 떠들고 웃고 울면서 움직이는 나보다, 책을 펼쳐 들고 이야기 안의 인물들이 떠들고 웃고 울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훨씬 편안했다. 현실 속의 나는 작은 몸짓 하나도 내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어색하고 자꾸만 서걱이는데, 책을 펼치고 이야기에 빠져들면 그런 이물감은 저만치 달아나버리고 이야기 안이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더욱 현실감을 가지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나버린 데이빗처럼 깊은 슬픔을 겪은 것도 아니면서 틈만 나면 이야기의 세계로 도망쳤다. 어릴 적 그 이야기의 세계는 물론 동화의 세계였다.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은 현실을 외면하고 동화의 세계로 도피한 소년 데이빗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동화를 사랑했던 엄마를 꼭 닮아 역시 동화를 좋아했던 데이빗은 병으로 엄마를 너무 일찍 잃어버린 후 책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게다가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빠는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할 연인 로즈와 결혼하여, 엄마와 아빠, 데이빗이 함께하던 풍경을 지우고 엄마 없이 아빠와 로즈, 이복동생 조지가 있는 현실을 들이민다. 여전히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데이빗은 그 현실을 거부한 채 엄마가 사랑했던 동화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꼬부라진 남자’로 등장하는 룸펠슈틸츠헨의 계략에 빠져 현실의 경계를 벗어나 이야기의 세계에 갇힌다.

존 코널리의 소설에서, 룸펠슈틸츠헨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한 아이들을 유혹하여 이야기들을 잔인하게 물들이며 아이들의 영혼을 빼앗아 생을 거듭하는 마법사로 변형된다. 당연히 데이빗이 들어선 룸펠슈틸츠헨의 세계가 동화(Fairy Tale)처럼 순진하고 아름다울 리 없다. 그곳에서 데이빗이 목격하게 되는 「빨간 모자」,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 외에 다양한 신화와 전설들은 잔혹하게 비틀리고 왜곡된다.

그것은 난데없이 자기 삶에 끼어든 로즈와 조지를 몸서리치게 미워하는 마음을 안고 룸펠슈틸츠헨의 가짜 엄마 목소리에 속은 데이빗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엄마가 알려준 이야기의 속성처럼(“이야기는 누군가 읽어줄 때 살아난다. 큰소리로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없다면, 담요를 뒤집어쓰고 램프 불빛 아래서 이야기를 쫓는 커다란 눈동자가 없다면, 이야기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이야기는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 읽어주는 순간부터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그렇게 이야기는 읽는 사람의 상상력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읽혀야 이야기 속의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우리가 생명을 주기를 기다린다.”), 데이빗이 읽어준 이야기들도 룸펠슈틸츠헨의 세계로 살아난 것이다. 미움과 분노의 마음으로 읽은 동화가 아름답고 깨끗하고 따사로운 이야기로 살아날 리 없다. 어쩌면 룸펠슈틸츠헨은 데이빗의 어두운 분신이 아니었을까.

데이빗은 어린 마음속에 어둡게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는 통과의례를 용기 있게 거쳐 미움과 분노를 정화하고 현실로 담대하게 돌아온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데이빗이 부닥치는 현실도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슬픔만큼 아프기 그지없지만 이제 더 이상 마냥 이야기의 세계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곳은 삶이 주어진 자의 도피처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다 살아낸 자의 마지막 안식처다. 그것도 동화의 시간을 어둠으로 물들이지 않고 건강하게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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