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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눈부신 금발, 하얗고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욕망을 대신 해소시켜 준 포르노 배우이자 제작자가 술과 마약에 찌든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고로 화상을 입고 온몸이 검은 가고일처럼 변한 처참한 자신의 모습. 포르노 배우에게는 가장 중요한 음경마저 손상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는 마리안네 엥겔이라는 한 여인. 그녀는 “너 화상 입었구나, 또.” 라는 말로 찾아와 그와 자신의 700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리안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점차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고 퇴원한 후 마리안네와 지내면서 그럴 듯한 자신의 외모로 섹스를 팔았던 자신에게도 700년의 사랑이 있었음을,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깨닫는다. 석상 가고일에게 심장을 주어 생명을 불어 넣은 마리안네는 마지막 심장을 그에게 전해 주고 사라진다.
우리 시대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고귀한 것이 되었다. 하룻밤의 만남도 사랑으로 포장되고 화학적으로 분해되기도 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발에 치이는 것이 사랑인지라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라고 외치는 앤드루 데이비드슨의 『가고일』의 선전 문구에는 여타 로맨스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고 하였으나 이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로맨스이자 러브 스토리다. 예술작품에서만큼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끝나는 사랑은 그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마리안네가 들려주는 네 가지 짧은 사랑 이야기는 자신들도 그 이야기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임을 암시한다. 사랑을 위해 죽은 사람과 그 사람을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는 더할 수 없는 비극이어서 슬프고도 아름답다.
작가 앤드루 데이비드슨은 천년의 『가고일』을 통해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 3년여를 생활하고 그 시절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이야기-이 책에서도 다이묘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로 미루어 보아 앤드루 데이비드슨은 자기만의 천 년의 사랑 『겐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서양의 문화와 결합되어 색다른 분위기를 전해 준다. 하지만 이것이 동양권에서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윤회 사상-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우리에게는 얼마나 익숙한 소재이던가. 전생의 부부나 원수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들을 보라-을 기반으로 잘 포장된 서양의 이야기는 색다른 경험일지는 모르겠지만, 요란한 선전 문구처럼 시대에 남을 사랑의 고전은 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