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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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희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언니, 케이트의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다. 케이트의 완벽한 장기 기증자가 되어줄 수정란을 엄선하여 착상시키는 인공수정은 안나가 모태를 빠져나오기 전에 이미 생의 존재 가치를 규정짓는다. 너무나 사랑하여 서로를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 이상적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명백한 ‘유용성’을 전제한 출산 계획이라면 하룻밤 사랑의 불장난으로 잉태된 아기보다 불행하다. 그 ‘유용성’이 사라지면 생의 존재 가치도 바람에 먼지 흩날리듯 흩어져버리니까. 안나도 애초에 규정된 생의 목적대로 케이트의 병세가 악화될 때마다 케이트가 필요로 하는 장기들을 하나씩 내어주다가, 마침내 자신의 삶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사람의 일, 삶이라는 것은 오차 없는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더하기, 빼기로 계산되지 않는 법이다. 엄마, 사라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딸,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또 하나의 딸, 안나를 낳았지만, 역시 열 달을 자궁에 품어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는 산고 끝에 나은 안나도 케이트만큼 사랑한다. 다만 죽어가는 딸부터 살리고 싶다. 건강한 딸을 조금 희생시켜 죽어가는 딸도 살리고 건강한 딸도 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아빠, 브라이언은 늘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케이트가 안쓰럽고 그런 케이트를 잃지 않으려는 사라의 마음도 함께 느끼지만, 아픈 케이트에게 발목이 잡혀 언니를 위한 희생을 당연하게 강요당하는 안나도 가엾고 안쓰럽다. 그러나 역시 브라이언도 케이트가 좀더 살 수 있는 방법, 안나가 있는데 그냥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리고 안나는 자신의 출생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언니 케이트를 사랑한다.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장기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러나 케이트의 병세가 끊임없이 완화기와 악화기를 되풀이하는 한, 그 일에는 끝이 없다. 케이트의 치료용 장기 기증자로서의 삶 외에 다른 삶도 없다. 케이트가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라고 속마음을 내비쳤을 때 안나는 깜짝 놀란다. 언니의 진심 어린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더 이상의 장기 기증을 거부했지만, 사실은 안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음을. 언니를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적인, 그러나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인 마음. 스스로를 삶의 주체로 만드는 자애심. 

자신을 희생하여 나 아닌 남을 사랑하는 이타심이 거룩하게 다가올 때는 그 희생이 주체적인 결정과 의지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자애심과 이타심은 두 대립점에 있는 말이 아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나 아닌 남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자애심이 없는 이타심은 견고하지 못하다(사실은 과연 그것을 이타심이라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끔찍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출생 이력을 안고서도 안나는 밝고 낙천적이며 건강한 정신을 지킨다. 언니도 잃지 않고 자신도 사는 방법으로 안나는 언니를 위한 모든 기증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얻어낸다. 그런데 그런 안나에게, 이런 결말은 너무나 무자비하지 않은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라지만, 겨우 자기 삶의 주체로 발 디딘 안나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은 작가의 횡포다. 이런 잔혹한 결말로 독자의 눈물 한 방울을 기대했단 말인가. 결국 안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장기를 기증하여(안나도 그걸 원할 거야,라는 타인이 믿고 싶은 해석대로) 케이트를 살린다는 결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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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1 뫼비우스 서재
칼렙 카 지음, 이은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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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뉴욕은 급격한 공업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신흥 부호들이 생겨나고 이런 이면에는 당연한 것처럼 어두운 부분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유럽의 귀족들처럼 생활하려는 졸부와 그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당연한 듯 도시의 빈민가들은 구차한 삶을 이어간다. 상류층의 추악하고 어긋난 성적 욕망을 해소해주던 빈민가의 어린 매춘 소년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되지만 상류층은 자신들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회개혁을 추구하던 당시 뉴욕 경찰청장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대학 친구인 정신과 의사인 크라이즐러와 타임즈 기자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수사팀을 꾸린다. 이 수사팀에 최초의 여성 경찰인 새러와 과학 수사를 지향하는 아이잭슨 형제가 합류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게 된다. 

칼렙 카의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는 이런 19세기 뉴욕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흥미롭게 그려 냈다. 역사학자 출신답게 철저한 연구와 고증으로 그 당시의 화려하지만 어두운 사회상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원제 ‘The Alienist (정신과 의사)’라는 제목답게 크라이즐러라는 정신과 의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물론 기록자 역할을 하는 타임즈 지의 기자인 내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추리소설 측면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혁신적인 부분이 여러 가지 눈에 띈다.최초의 여성 경찰인 새러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아이잭슨 형제가 사용하는 지문감식법과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범죄자의 성향을 추적하는 프로파일링 같은 그 당시에 인정받지 못한 과학수사 기법을 도입한 것은 기존의 수사방식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추리소설에서 사용했던 범죄자의 심리적 측면을 꿰뚫어보는 것이 탐정의 개인적인 능력과 감각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크라이즐러의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에 의한 범죄의 원인과 범죄자의 심리분석은 정신과 의사라는 학문적이고 과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며 이는 현대 수사기법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뿐만이 아니라 어¼면 이것이 기존의 추리소설과 대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도 있는데 이들은 팀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탐정과 기록자라는 기존 추리소설의 구도는 이 작품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물론 크라이즐러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는 완벽한 존재는 아니며 새러와 아이잭슨과 나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루즈벨트의 역할도 크라이즐러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주는 완벽한 팀 체제다. 이들은 범죄수사의 선구자들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뉴욕을 그리고 있지만 본질적인 모습은 현대사회와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화려함 뒤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어두운 부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이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라는 크라이즐러의 의문은 해소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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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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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다. 게다가 글보다 여백이, 여백보다 그림이 많다. 일단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10여 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The Story of My Typewriter’라는 이 책의 글을 쓴 시점을 기준으로, 26년 동안 자신의 작가 인생을 함께해 온 타자기에 대한 폴 오스터의 애틋한 감성과, 폴 오스터의 타자기에 반한 샘 메서의 질박하고 감각적인 그림들은 그 여운을 오래도록 끌어준다.

폴 오스터의 ‘나의 타자기 이야기’는 그가 그때껏 쓰던 소형 헤르메스 타자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게다가 새 타자기를 살 돈이 모자라는 바람에, 구하게 된 중고 독일제 올림피아 포터블 타자기와의 첫 만남부터 담담하게 술회한다. 첫눈에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든가, 왠지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든가 하는 예술가 특유의 감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이전 타자기의 고장과 넉넉하지 못했던 주머니 사정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이유로 올림피아 타자기는 폴 오스터에게로 왔다. 그리고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폴 오스터의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힘을 주는 대로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찍어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이루어 소설을 한 권씩 탈고해 냈다. 최소한 『뉴욕 3부작』(1987), 『폐허의 도시』(1987), 『달의 궁전』(1989), 『우연의 음악』(1990), 『거대한 괴물』(1992),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1992), 『공중곡예사』(1994), 『빵 굽는 타자기』(1997), 『동행』(1999) 등이 모두 올림피아 타자기의 키들을 탁탁, 두드려 얻어낸 소중한 결실들이다.

폴 오스터는 그저 글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었다고 말하지만, 더 편리한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개발되어 타자기의 종말을 알렸음에도 올림피아 타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위기에 처한 타자기 리본을 대량으로 사들였을 뿐이다. “좋건 싫건, 나는 올림피아 타자기와 나의 과거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미래 또한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낡아 못쓰게 되어서 결국에는 그 용도를 잃게 되지만, 내 타자기는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내가 26년 전에 소유했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물건은 그것 하나뿐이다. 몇 달만 더 지나면 그것은 정확히 나와 반평생을 함께한 셈이 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편하고 행복한데 뭐 하러 바꿔’라고 올림피아 타자기를 더 편리한 글쓰기 도구로 바꾸지 않은 이유를 건조하게 들지만, 그건 작가로 살아오는 내내 늘 튼튼하게 자기 곁을 지켜준 평생의 동료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내는 최고의 찬사다. ‘그래도 네가 제일 좋아’라는.

폴 오스터는 따갑고 푸르고 아름다운 아침, 지금도 올림피아 타자기를 탁탁,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을까. 그때 사들인 리본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문득 내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폴 오스터의 타자기처럼 모든 것이 잠시 쓰였다가 사라져도 끝내 남아 있는 무엇이 없을까. 내가 인식하는 순간 심장을 가진, 영혼이 깃든 무생물로 살아 있게 될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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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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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할 만한 독서광 지성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궁금했던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도서관을 마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도도한 눈빛을 빛내는 고양이의 거대한 자태를 건물 벽면에 그려, 일명 ‘고양이 빌딩’이라는 애칭까지 얻은 개인 도서관은 너무나 탐나는 공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만으로 모두 4층 건물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그것도 모두 내가 적어도 한 번은 읽었고 앞으로도 종종 펼쳐볼 책들이라고 생각하면 황홀해질 지경이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다치바나 다카시는 고양이 빌딩만으로도 책들의 공간이 모자랄 판이라 이웃들이 스스로 그의 책을 보관할 공간을 내어주겠다고 나설 정도라니, 이쯤 되면 질투를 넘어서 동경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일단 ‘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다독가로 명성이 자자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다. 제목처럼 ‘나, 다치바나 다카시는 관심사의 변화에 따라 이런 책을 읽어왔다’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책을 과식하는지, 독서 목적이 무엇인지, 독서 방법은 어떤지,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얼마나 분투해 왔는지 이야기한다. 부제처럼 ‘다치바나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인 셈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처럼 마냥 동경하던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괴리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처음 흥분으로 재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제 속도를 찾고, 책을 한 장씩 읽어 나가다 보면 ‘다치바나식’에 절로 눈뜬다.

책꼴을 갖추어 물리적인 형태로 책을 시장에 내놓는 편집자를 열외로 두고 책의 내용만 고려하자면 책의 생산자, 가공자, 소비자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생산자는 책의 내용, 즉 지식을 각 분야의 최전선에서 생산해 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물론 책의 저자일 수도 있고, 책의 저자에게 직접적, 간접적으로 자신이 생산해 낸 지식을 제공한다. 가공자는 자신이 직접 날것의 지식을 생산해 내지는 않지만, 생산자가 생산해 낸 지식들을 조합하고 자신의 통찰을 가미하여 자기 식으로 가공해 낸다. 물론 이 사람도 책의 저자이다. 책의 저자가 순전히 생산자 혹은 가공자이기는 어렵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는 ‘가공자’에 가까운 것 같다(물론 그의 모든 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책 읽기도 가공자로서의 재생산을 위해 이루어진다.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그의 다독은 어느 순간 책의 ‘소비자’에서 ‘가공자’로 넘어선다. 철저히 ‘소비자’인 나는 그 간극이 낯설고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다.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독서’라는 행위에 절대적인 목적과 방법이란 없을 것이다. 내 독서가 ‘즐거움’을 위한 소비적 성향이 짙다고 해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소설’의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지만 ‘효용’으로 대하고 이미 읽을 만한 소설은 다 읽었으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자만한다고 해서, 그의 독서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의 책 읽기를 자꾸만 엿보고 싶어진다. 그에 대한 관심은 그런 개인적인 관음증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독서에 이처럼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가 또 있을까.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에 열렬히 공감하든, 조금은 이질감을 느끼든,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독서로 시작하여 누구나 알아주는 지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에 대한 경탄을 불러일으키며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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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2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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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국민학교’ 시절에) 읽었던 책들 중에 유난히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 하나가 조지 엘리엇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대략적인 줄거리와 여자 주인공 이름, 물방앗간, 꼽추,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장면 등등이 파편으로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찾아보다가 이 책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환한 전구가 켜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내 단편적인 기억으로 흩어져 있던 파편들이 모여들어 잊혔던 망각의 자리들을 메워 나갔다.

그렇게 나는 다시, 조금도 잊지 말았어야 한, 나의 매기를 만났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찬사를 보냈던 시절에 새카만 흑발의 직모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빗어 내리고 활보하는 매기를. 책을 사랑하는 매기를. 총명함을 타고난 매기를. 아빠에게 사랑받는 매기를. 상상력이 풍부한 매기를. 너무나 감성적인 매기를. 동정심이 뚝뚝 흐르는 매기를. 사랑과 신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매기를. 자신을 향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매기를. 남성에게 온전히 의지하던 시대에 독립을 실천하는 매기를. 무엇보다 주체적인 매기를.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읽었던 요약 편집본(글자가 조금 많이 들어간 문고본으로 읽었다!)만큼 드라마틱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미 볼 것, 못 볼 것, 골고루 봐온 세월이 있는지라 이야기 자체는 더 이상 새롭지 않기 때문이리라(플로스 강가의 물방앗간에서 매기는 고지식하고 다혈질이지만 정이 많은 아버지와 그 시대의 전형적인 가정주부인 어머니, 매기와는 정반대 성격의 오빠 톰과 다소 유복하게 자란다. 하지만 물방앗간을 둘러싼 재판에서 웨이컴 변호사에게 져셔 삽시간에 파산하고 그로 인해 아버지도 죽는다. 매기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기 전부터 동정해 왔던 꼽추 필립 웨이컴을 동정하고, 급기야 사랑하게 된다. 필립은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해 주지 않았던 매기를 숭배하고, 매기는 그에 위안을 받지만, 필립은 가족의 파산과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웨이컴 변호사의 아들이라 오빠 톰은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고 가족을 배신한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또 부와 멋진 몸을 가진 한 남자가 더 등장한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여전히 가슴 설레고 분개하고 안타까웠다. 게다가 대폭 요약됐던 조지 엘리엇의 사설을 읽는 재미가 더해졌다. 시대를 감안하면, 조지 엘리엇 또한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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