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화해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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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현실 속에서는 당신은 거의 있지도 않아” 이 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랑뎅 박사에게 안나가 말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우리는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만, 그 관계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로 인해서 하루를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관계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관계 때문에 우리 모두는 타협할 준비, 이성적으로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나는 전문가의 대답이, 내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려는 순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고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부분을 읽는데 내가 폴 스테른이기라도 한 것처럼 울음 덩어리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토록 철저히 거부당한 것처럼. 특별히 뭔가를 치명적으로 잃어본 적 없으면서도 나는 어떤 ‘상실’이든 그에 대해 아주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다. 마주 사랑했고 나는 아직도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데 내가 줄곧 바라본 그에게는 더 이상 나란 존재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래서 그를 생경하게 잃게 되는 비극. 공감에 무딘 내가 나도 모르게 폴에게 감정이입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폴과 안나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 새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삼십 년을 함께한 부부다. 그래서 충분히 사랑하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아내 안나는 돌연 남편 폴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 “당신을 보지도 않고 당신 말을 거의 듣지도 않아. 내가 속한 현실 속에서는 당신은 거의 있지도 않아”라고, “폴, 나는 아프지 않아. 다만 내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고 살고 싶게 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가는 게 좋겠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 나는 내가 돌볼 거야”라고.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 라니 이보다 더 치명적인 존재의 거부가 있을까. 

공교롭게도 폴의 직업은 죽은 영화 대본을 살리는 스크립트 닥터(Script Doctor)다. 다른 시나리오 작가의 실패한 원본을 조각내어 재배열하고 잘라내고 덧붙이며 깁는. 그러나 남의 죽은 영화 대본은 여기저기 손봐 살리면서도 폴은 언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아내와의 잘못된 관계는 어쩌지 못한다. 생기 가득하고 삶의 의욕으로 넘치던 아내 마리는 어느 날부터인지도 모르게 무기력한 우울증으로 삶의 의미를 잃고 급기야 폴과 그들의 사랑도 부정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폴은 시나리오라는 가상 세계에서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게다가 형이 살아생전 그의 모든 세속적인 호화로운 삶을 비판했지만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죽자 형의 재산과 애인까지 거리낌 없이 누리는 노년의 아버지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눈물을 왈칵 쏟은 폴은 일을 핑계로 생경해진 아내와 가족을 벗어나 미국으로 더욱 도피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곳에서 그는 아내와 가족에게 더욱 옥죄이는 것 같다. 형의 죽음을 기점으로 평생 수호해 왔던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평생 매도해 왔던 형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시도 때도 없는 아버지의 전화는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현실의 아내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폴은 오히려 젊은 시절, 그들 부부가 가장 사랑했던 시절의 아내와 꼭 닮은 여자 셀마 샨츠에게 빠져든다. 폴은 셀마를 아내와 따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에게 셀마는 아내의 분신, 가상의 아내다. 마치 아내와 가족은, 분리하려 해도 분리되지 않는 자신의 일부인 듯 폴은 현실의 도피처인 미국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아버지를, 그리고 아내를 돌아본다. 사랑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오늘도 여전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내 책임을 따져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우리의 지난 삶을, 무의미하면서 내밀한 사소한 것들을, 어두우면서 빛나는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바다에 갔을 때 아버지의 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녀가 오래전에 썼던 향수의 이름과 그 향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30년에 대해서 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쳤다. 말하자면 순간의 기억을 놓쳤다.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안나가 조심스럽게 멀어졌던 그때, 모든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날들의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폴은 자신이 놓친 것을 찾지 못한 채 있어야 할 현실의 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폴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심하지만 가능하다. 폴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장폴 뒤부아는 그것을 ‘이성적인 화해’라고 말한다.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화해의 요건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도 무언의 용인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적절한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일종의 현실적인 타협이라고. 폴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에게 상처 입은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것’은 폴이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었다. 하지만 폴은 끝내 ‘아주 중요한 것’을 찾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화해한다. 그들 사이에 잃어버린 ‘아주 중요한 것’에는 잠시 눈감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이 함께하는 현실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성적인 화해’의 어감은 어딘가 개운하지 못하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므로 덜 잃기 위해 화해하는 것은 현명하다. 도저히 잃어지지 않는 것들은 잃어서는 안 되므로... 여전히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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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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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더글라스 애덤스의 두 번째로 읽는 책이다.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히치하이커 때와 똑같을 것 같다. 히치하이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작품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특유의 영국식 유머-영국식이라고 뭐 별다르지는 않겠지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한 상황이나 말장난, 점잖게 상대를 조롱하는 것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 역시 별다른 재미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믿는 전자수도사, 촉수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의 폭발로 인해 생겨난 인류, 유령이 되어 버린 촉수 외계인, 40억년을 넘나드는 타임머신 같은 것에 흥미가 간다면 유쾌하고 지적인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 이야기에 푹 빠질 것이다. 

내부 결함이 생겨 모든 것을 믿어버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자수도사, 유명한 시인인 콜리지를 기념하는 대학교 행사장의 기묘한 교수, 웨이 포워드 테크놀로지 II의 운영자이며 전자수도사에게 총을 맞고 죽어 유령이 된 고든 웨이, 이렇게 기묘한 이야기들이 탐정인 더크 젠틀리의 수사로 하나로 엮이면서 엄청난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40억년전 지구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 온 촉수 외계인의 우주선이 폭발하면서 흘러 나온 아미노산으로 지구에 인류가 생겨나게 된다.  유령이 된 외계인은 시인 콜리지를 조종해 우주선의 수리 지침을 시에 숨겨 둔다. 더크 젠틀리는 자신의 대학 동창인 리처드가 하는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하게 되고 리즈 교수가 타임머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낸다. 유령이 된 외계인은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로 가 자신의 우주선이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는 하고 그렇게 되면 인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위기를 알게 된 더크 젠틀리와 무리들은 과거로 가 콜리지를 방해한다. 

히치하이커와 마찬가지로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 역시 더글라스 애덤스의 기발한 상상력과 재미로 가득 찬 책이다. 하지만 이것이 재미있고 어색하지 않은 것은 억지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지적 유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점점 톱니가 맞물리듯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고 이것에 숨겨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오래되고 엄청난 비밀을 파헤쳐 가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크다. 

책을 처음 보고 의아해 했던 것은 왜 ‘성스러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었다(인터넷을 살펴보니 단어에 대한 지지글과 번역자 분인 듯한 해명글을 보았지만 역시 단어 선택이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원제대로 철학적 의미의 ‘전체적인’정도가 적당할 것이고 이것이 재미가 없다면 차라리 ‘범우주적인’이라는 단어 정도면 어땠을까 싶다. 뭐 어쨌거나 외계인들로부터 지구를 구해낸 더크 젠틀리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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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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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요긴하게 쓰고도 있는 감각은 ‘시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보는 눈’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책 읽기(혹은 글쓰기), 그림 감상하기, 드라마 보기, 예쁘거나 귀엽거나 아기자기하거나 멋진 영상의 게임 즐기기. 게다가 돈벌이까지 눈과 손(뇌는 물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라고 상상하는 것만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삶이 곧 악몽이 될 것이다. 지독한 근시이지만, 이렇게라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데 시각을 잃게 된다면,에 대해 가정하려니 다른 감각들도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오긴 마찬가지다.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삶도,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삶도, 포근한 살결과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느끼지 못하는 삶도, 사랑하는 사람의 살내와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삶도 싫다. 오감이 조화롭게 나를 자극할 때 나는 아마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어쨌든 하워드 엥겔의 『책, 못 읽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지독한 독서광에 추리소설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어느 날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은 시각을 잃게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뇌졸중을 앓아 읽기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일부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손상된 뇌는 멀쩡한 눈까지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시력에는 문제 없이 모든 것을 봐도 익숙한 세계의 친숙한 사물들이 이계(異界)의 낯선 사물들처럼 보였다. 하워드 엥겔에게 가장 비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독서광으로서 본능처럼 읽었던 글자들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처럼 낯설게 보여 해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수만 단어들을 썼던 손 감각은 살아남아 여전히 쓸 수는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리하여 하워드 엥겔은 실서증(失敍症) 없는 실독증(失讀症),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alexia sine agraphia)’ 진단을 받았다. 쓸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는. 내가 직접 쓴 것도 읽을 수 없는. 

읽는다는 행위에는 시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글자들의 상징 체계를 인식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해독 능력도 필요하다. 시각을 잃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과 뇌의 해독 능력을 상실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 중 어느 것이 더 비극적일까. 처음에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보이기는 하는데 책은 읽을 수 없다니 이거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읽기’에 대한 갈증을 쉽게 체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볼 수만 있다면 다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보는 눈’이니까. 보는 눈이 없이는 ‘다시’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책, 못 읽는 남자』는 실독증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읽기 위해 노력한,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과정을 지극히 침착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읽을 수 없게 된 하워드 엥겔은 눈 대신 청각(오디오북)이나 손(읽지는 못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써보면 인식할 수 있으니)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눈, 다시 눈으로 읽기 위한 재활 훈련을 선택했다.

   
 

병원에서 깨달은 것은 책 읽기가 아무리 느리고 어려울지라도―지독히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나는 어쩔 도리 없는 독서가라는 것이다. 뇌에 들이닥친 돌풍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이미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희열, 환희 등(이런 유사한 감정의 모든 단어)에 중독됐던 그가 살아 있는데, 눈앞에 암흑이 드리운 것도 아닌데 어찌 실독증에 굴복하여 눈으로 읽기를 포기할까. 나라도 결국은 하워드 엥겔처럼 선택했을 것이다. 눈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책장을 펼치고 눈을 고정한 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것들과의 교감, 오로지 나만의 것들을 체념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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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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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오랜 미스터리물에 대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이시모치 아사미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라는 작품에 접근하기가 쉬울 것이다. 본격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도서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숨어 있는 범죄자를 밝혀내거나 전혀 의외의 사람이 범죄자라는 반전을 노리는 것이 아닌 범죄자를 알려주고 탐정 역의 인물이 등장해 범죄자가 준비한 트릭을 파헤치는 것으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의외의 놀라움을 선사하는 대신 독자와 지적 게임을 즐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래된 TV 드라마 시리즈인 <후루하타 닌자부로>가 이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작가는 독자와 지적 게임을 즐기고 페어플레이를 하기 위해 잘 보이지 않지만 범죄자의 치명적인 실수를 숨겨 두고 있다. 독자가 이것을 어떻게 관찰하고 추리하는가 하는 것이 도서미스터리류의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사실 독자가 이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부분의 독자라면 마지막의 사건이 끝날 때 탐정역의 인물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역시 후시미의 행동과 대화 속에 여러 가지 실수를 숨겨 두고 탐정 역의 유카가 이것을 풀어 나가는 범죄자 대 탐정의 지적게임이다. 

대학 경음악부 '알코올중독분과회'의 멤버들이 졸업 후 오랜만에 대학 동창회를 겸해 고급 펜션에서 묵게 된다. 이곳에서 모임의 리더격이던 후시미 료스케는 술을 좋아하는 후배 니이야마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공작을 펼치는 동시에 밀실로 만들어 놓는다. 니이야마의 방문은 열리지 않고 멤버들은 아직 니미야마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계속 흘러도 열리지 않는 니이야마의 방문과 그것을 여는 것을 원하지 않는 후시미를 보며 그가 저지른 범죄에 다가오는 미모의 후배 유카가 있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역시 도서미스터리류의 기본적인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히려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한 동기에 있어서는 ‘설마 이것 때문에’라는 느낌마저 들어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작품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라는 책의 제목에 관련된 후시미의 행동 때문이다. 마지막에 알려주는 후시미의 이야기는 책의 제목과 후시미는 왜 방문을 여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준다. 

오래되고 두터운 일본 미스터리 역사 속에서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으로 그 넓은 저변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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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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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풍경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에게 초록빛 풍경은 그리움이고 꿈이지 않을까. 가토 유키코의 『꿀벌의 집』이 순식간에 내 눈길을 잡아챈 것은 초록빛 잎사귀들이 점점이 수놓인, 그토록 상큼한 표지였다. “표지보다는 내용이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어도 이럴 때는 정말이지 속수무책이다. 그 표지에 기대어, 이 소설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부풀었다. 자연 속에서 니노미야 도모코의 농촌 명랑 순정만화 『그린』처럼 생기발랄하거나, 타샤 튜더의 매혹적인 정원처럼 아름답거나,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처럼 더욱 진지하게 자연과 깊숙이 조화하거나. 

어쩌면 200쪽도 안 되는 분량의 소설에 너무 많은 것들이 구현되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가에 따라서는 쪽수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짤막한 단편소설인데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연이 꾸밈없이 펼쳐지지 않는가.) 『꿀벌의 집』은 각자 자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곰도 사는 깊숙한 산골에 자리 잡은 ‘꿀벌의 집’에 우연찮게 모여들어 꿀벌의 생체 주기에 맞춰 양봉하면서 그 상처를 보듬어 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파리에 착색한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꿀벌이 지금은 노랑과 검정의 세련된 다지인의 사랑스런 곤충”으로 꿀벌에 대한 애정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 제법 섬세하게 그려지면서 인물들의 상처를 입은 사연도 조금씩 드러난다. 사실 자연의 치유 능력은 위대하다. 이에 좀더 집중할 요량이었다면 인물들의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상처가 자연에 조응하여 치유되는 과정, 그리고 꿀벌의 집 사람들 사이의 감정과 에피소드를 더욱 풍부하고 세밀하게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이 급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참 아름다웠다. 자연이 빚어놓은 매혹적인 풍경들을 묘사하는 글귀들을 읽고 상상하는 일은 즐겁고 또 황홀하다.

   
 

차에서 내리자 곧 시원한 파란색 꽃무리가 보였다. 도회의 공원에 피어 있는 수국과 비슷하지만, 자주와 분홍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파랑이다. 리에를 마중 나온 듯 절벽을 따라 높은 곳까지 줄지어 있었다.

두 사람의 발밑에서 작은 반원형의 논이 서랍을 조금씩 꺼내놓은 듯 계곡을 새기며 이어지고 있다. 수면에서 부드러운 빛이 흘러넘친다.

보라색 (라벤더) 안개에 싸인 넓은 공간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리에가 때때로 부딪히고 아픔을 느껴온 벽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했다. 이 이상한 감각도 라벤더 향기의 영향일지 모른다.

 
   

이런 부분은 읽다 보면 뭉클해진다. 따로 인용해 놓기에는 애매하지만, 분봉(分蜂)을 막기 위해 새로운 여왕벌이 될 왕대를 없애야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새 여왕벌과 한 무리의 꿀벌을 하늘로 띄워보냈다가 새로운 벌통에 맞아들이는 에피소드에도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두근거린다.

   
 

여왕벌은 무리 안에서는 스타 연예인과 같은 존재다. (…) 그녀가 소중히 대접받는 이유는 많은 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늘 어두운 둥지 속에 갇혀서 일벌처럼 야외로 날아다닐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산다면……. 상상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
“하지만 평생에 한 번, 그녀가 둥지를 나와 여행하는 시기가 있어. 성충이 되어 날개가 돋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즉 아직 여왕이 되기 전인 공주 시절에 말이지. 그녀는 오후가 되면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가는 거야. 거기서 수많은 수벌과 만나서 몇 마리인가와 교미를 하지. 이른바 파트너를 고르기 위한 여행이야. 넓은 하늘이 결혼식장인 셈이야.”

 
   

그리고 이런 부분은 개인적인 관심이 집중시킨다.

   
 

리에는 꿀벌 코너로 돌아와 최초로 읽을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케미짱이 곁에 다가와 한 권을 뽑아 건넸다. 이 책이 상당히 재미있을 거예요. 저자의 이름에 리에는 놀랐다. 엉? 마테를링크라면 『파랑새』의 작가가 아니었나? 이 사람이 꿀벌 책을 썼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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