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이 떠나가면
레이 클룬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두 손 꼭 맞잡고 생의 자연스러운 시간을 다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늘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음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보다 나 자신을 위하는 지독한 이기심이다. 나는 정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자리에 홀로 남아 있고 싶지 않다. 외로움에 사무칠 그 쓸쓸한 고독을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영혼의 상처로 박힐 만한 상실의 경험을 아직은 해본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늘 ‘상실’에 민감해지는 것은 어쩌면 상실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작가 레이 클룬의 자전소설인 『사랑이 떠나가면』에는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죽어가는 아내 카르멘과,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그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될 남편 댄이 등장한다. 정작 유방암 선고를 받고, 건강하고 풍만한 유방 한쪽을 절제하고, 암 투병으로 아름다운 생기를 잃어가고,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당사자는 카르멘이지만, 갑작스럽게 부닥친 절망적인 현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는 이는 그녀를 지켜보는 댄이다. 오히려 카르멘은 투병에도, 죽음에도 용감하고 강인하게 맞선다.
댄은 끝내는 아내의 죽음을 불러올 암 앞에서 오로지 아내의 혼란과 고통에 애닯은, 온전히 아내만을 위한 사랑보다는 먼저 ‘자기 연민’에 빠진다. 섹시하고 아름다운 데다 능력 있는 아내,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장해 주는 훌륭한 사업체, 귀여운 세 살배기 딸까지 아내의 암만 아니라면 그들 가족의 미래는 행복으로 눈부시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유방암에 걸렸고, 이제 그들 가족의 미래는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막막하다. 이 막막한 통로는 댄이 사랑하는 유방 한쪽을 절제하지 않고도 아내가 유방암에서 완치되거나, 결국 아내가 죽음에 이르러야 끝날 것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는 불가능한 기적일 뿐 카르멘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투병을 시작하고, 댄은 카르멘의 투병 과정을 성심껏 함께하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나”로 대변되는 지독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다.
(어처구니없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독공포증을 핑계로 아픈 아내를 두고 아프지 않은 여자들과의 섹스로 위로받는 댄의 행동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그에 이르게 된 심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떠날 자의 빈자리에서 살아갈 자의 나약함은 가련하기만 하다. 아픈 사람은 스스로 앓으며 고통의 크기를 알지만, 그를 지켜보는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어 더욱 공포스럽다. 한때 실제로 아팠던 나는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나를 지켜봤던 남편은 여전히 두려워한다. 게다가 마지막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죽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있을까. 댄과 카르멘이라면,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은 카르멘이지만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주는 댄도 죽어가며, 마지막 순간에는 상징적으로 함께 죽는다. 사랑하는 둘 중 한 명이 떠나면 나머지 한 명은 결코 둘이 함께 사랑하던 시간의 자신일 수 없다.
『사랑이 떠나가면』은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그를 지켜보는 남편이 함께 아내의 죽음을 맞기 위해 예비하는 솔직한 마음의 변화들을 고백한다. 『D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치병에 걸린 아내 도린에게 보여준 앙드레 고르의 사랑은 위대하고 거룩하고 강인하고 몹시 감동스럽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는 댄이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댄을 섣불리 지탄할 수 없다. 그에게 동족의 연민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