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포스터 작가정신 청소년문학 1
케이 기본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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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제인 에어와 앤 셜리를 닮은 꼬마 여자아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에 내 귀가 팔랑거렸다. 제인 에어와 앤 셜리는 내가 얼마나 사랑해 온 불멸의 캐릭터던가. 게다가 몇 개의 문학상까지 받았다고 하니 이건 보증수표야, 싶었다. 하지만 케이 기본스의 엘렌 포스터는 몹시 냉소적이어서 마음이 한없이 껄끄러웠다. 외면하고 싶은 풍경인데 한번 바라본 눈길을 도저히 거두어들일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는 느낌이 『엘렌 포스터』를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에 불편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얼마나 단란한 가정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느냐는 아이의 사소한 행동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아이를 가리키는 ‘애늙은이’라는 말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다는 것은 아이가 아이답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어떤 폭압적인 외압을 가했음을 의미한다. 티 없이 말개야 할 아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애늙은이’라는 가면을 계산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제 나이답게 자라야 할 아이에게 ‘저 아이, 참 어른스럽구나!’는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

엘렌은 애늙은이 이상이다. 열한 살 어린 소녀였어야 하는 엘렌은 왜 지독히 냉소적이고 타산적인 어른의 가면을 둘러써야 했을까?

일단 마땅히 사랑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엘렌을 보호해 줄 어른이 없었다. 술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날건달인 아빠는 물론 그런 아빠에게 상처받아 심장이 고장 난 병약한 엄마도 자기 상처에 몰두해 끝내 죽음을 선택할 우울에 빠져 있을 뿐 엘렌을 돌볼 여력까지는 없다. 오히려 엘렌이 아빠로부터 엄마까지 보호하려 애쓴다. 엘렌이 차라리 방치되어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엄마가 자살한 후 아빠는 만취하여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엘렌을 범하려 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엘렌이 한 번도 ‘할머니’라 부르지 않은 ‘엄마의 엄마’는 자기 딸을 죽게 한 아빠 대신 엘렌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노동으로 괴롭힌다. 엄마의 자매들도 엘렌을 진심으로 보듬어주지 않고 골칫거리로 여긴다.

엘렌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기 위해 모든 일을 스스로 대처해야 하므로 어른만큼 똑똑한 양 매사를 따질 수밖에 없다. 씩씩한 척, 강한 척, 단단한 척,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엘렌은 학교에서 흑인 여자아이 스타레타를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도통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엄마의 엄마’의 시신을 조화로 장식하는 장면은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자신을 위해 아무도 주지 않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준비하는 엘렌의 모습은 행복한 가정에서 진심이 깃든 사랑 속에 살며 보호받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프다. 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그 소박하고 평범한 권리가 엘렌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꿈이다.

엘렌은 늘 행복한 가정을 열망한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이에게는 다정한 엄마와 아빠, 모락모락 흘러나오는 굴뚝 연기,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스토브, 아이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선물 등 스타레타의 집은 몹시 가난한 흑인 가정이지만 백인인 엘렌의 냉기 흐르는 집보다 훨씬 따뜻하다. 이곳은 엘렌을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엘렌의 집은 아니다. 아빠의 폭력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줄리아 선생님의 집도 전형적인 행복한 가정이지만 엘렌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그리고 엘렌은 자신도 행복한 가족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는 집을 스스로 선택한다. 이렇게 엘렌의 행복한 가정 구하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엘렌의 해피엔딩은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다. 이야기는 줄곧 엄마의 죽음부터 시작되는 엘렌의 불행한 과거와 엘렌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한 현재가 번걸아 진행된다. 그 때문일까, 왠지 행복한 현재에도 과거의 불행이 그늘져 있는 듯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행한 과거가 깨닫게 한 진실, 행복한 현재에도 다시 다짐하게 되는 진실은 뼈아프다.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잘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가마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와 똑같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뒤에서 불러 세우면 그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게 칼은 아닌지 어깨 너머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게 흑인의 손이 아닐 수도 있지만 들려 있는 게 칼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사소한 행복에도 절절히 감격에 겹는 아이, 엘렌에게 부디 어른의 한 자락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꼿꼿이 세우는 가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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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떠나가면
레이 클룬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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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두 손 꼭 맞잡고 생의 자연스러운 시간을 다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늘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음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보다 나 자신을 위하는 지독한 이기심이다. 나는 정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자리에 홀로 남아 있고 싶지 않다. 외로움에 사무칠 그 쓸쓸한 고독을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영혼의 상처로 박힐 만한 상실의 경험을 아직은 해본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늘 ‘상실’에 민감해지는 것은 어쩌면 상실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작가 레이 클룬의 자전소설인 『사랑이 떠나가면』에는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죽어가는 아내 카르멘과,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그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될 남편 댄이 등장한다. 정작 유방암 선고를 받고, 건강하고 풍만한 유방 한쪽을 절제하고, 암 투병으로 아름다운 생기를 잃어가고,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당사자는 카르멘이지만, 갑작스럽게 부닥친 절망적인 현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는 이는 그녀를 지켜보는 댄이다. 오히려 카르멘은 투병에도, 죽음에도 용감하고 강인하게 맞선다.

댄은 끝내는 아내의 죽음을 불러올 암 앞에서 오로지 아내의 혼란과 고통에 애닯은, 온전히 아내만을 위한 사랑보다는 먼저 ‘자기 연민’에 빠진다. 섹시하고 아름다운 데다 능력 있는 아내,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장해 주는 훌륭한 사업체, 귀여운 세 살배기 딸까지 아내의 암만 아니라면 그들 가족의 미래는 행복으로 눈부시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유방암에 걸렸고, 이제 그들 가족의 미래는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막막하다. 이 막막한 통로는 댄이 사랑하는 유방 한쪽을 절제하지 않고도 아내가 유방암에서 완치되거나, 결국 아내가 죽음에 이르러야 끝날 것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는 불가능한 기적일 뿐 카르멘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투병을 시작하고, 댄은 카르멘의 투병 과정을 성심껏 함께하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나”로 대변되는 지독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다.

(어처구니없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독공포증을 핑계로 아픈 아내를 두고 아프지 않은 여자들과의 섹스로 위로받는 댄의 행동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그에 이르게 된 심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떠날 자의 빈자리에서 살아갈 자의 나약함은 가련하기만 하다. 아픈 사람은 스스로 앓으며 고통의 크기를 알지만, 그를 지켜보는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어 더욱 공포스럽다. 한때 실제로 아팠던 나는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나를 지켜봤던 남편은 여전히 두려워한다. 게다가 마지막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죽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있을까. 댄과 카르멘이라면,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은 카르멘이지만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주는 댄도 죽어가며, 마지막 순간에는 상징적으로 함께 죽는다. 사랑하는 둘 중 한 명이 떠나면 나머지 한 명은 결코 둘이 함께 사랑하던 시간의 자신일 수 없다.

『사랑이 떠나가면』은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그를 지켜보는 남편이 함께 아내의 죽음을 맞기 위해 예비하는 솔직한 마음의 변화들을 고백한다. 『D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치병에 걸린 아내 도린에게 보여준 앙드레 고르의 사랑은 위대하고 거룩하고 강인하고 몹시 감동스럽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는 댄이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댄을 섣불리 지탄할 수 없다. 그에게 동족의 연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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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연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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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공원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드라큘라의 성처럼 꾸민 으스스한 귀신의 집, 천천히 올라갔다 휙 내려오며 뱅글뱅글 돌며 스릴을 느끼는 롤러코스터, 커다란 배를 타고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바이킹도 있겠다. 그리고 도저히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회전목마다. 흥겨운 오르간 소리가 들리고 알록달록한 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가 빠진 놀이공원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놀이공원의 상징처럼 되 버린 회전목마는 금새 지루해지는 놀이기구이기도 하다. 흥겨운 음악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말을 타 보아도 그저 빙글빙글 도는 것이 전부인 놀이기구.

우리나라 공무원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인한 복지부동, 변화를 싫어하는 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라는 좋지 않은 인식이 생겨 버렸다. 일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나라답게 공무원을 바라보는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회전목마』는 평범한 9년차 공무원 토노 케이치가 적자에 허덕이는 놀이공원을 재건하라는 날벼락 같은 임무를 떠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코믹 장편소설이다.

사기업인 가전회사에서 회사생활을 하다가 일에 치어 사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공무원의 삶을 시작한 토노 케이치, 그는 지방의 한가한 공무원 생활을 너무 사랑하고 있다. 식당에서 메뉴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다섯 시 퇴근에 길들여진 소심하고 평범한 토노 케이치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임무가 떨어진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운영되며 적자에 허덕이는 놀이공원인 ‘아테네 마을’을 재건하라는 것이다. 그것에 더해 ‘골든 위크 이벤트’까지 성공시키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게 된 토노 케이치는 여러 계획을 세워 보지만 그 주위에 있는 것은 평소의 자신보다 더한 인간들 뿐,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상사와 일을 시켜도 요리조리 빠져나가 버리는 부하 직원들을 보며 절망하지만 예전의 열정이 되살아난 토노 케이치는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변화 없는 삶 때문일 것이다. 안정적인 삶은 지금처럼 불안한 시대에 얼마나 매력적인가. 복지부동은 위태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아테네 마을’의 실패는 예정되었던 것이었고 토노 케이치 역시 이제는 관광과 소속 공무원으로 예전처럼 일상적인 삶 속으로 다시 되돌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토노 케이치는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은 놀이공원에서 밤의 회전목마를 타며 더 멀리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변화를 꿈꾸며 노력한 토노 케이치를 응원하게 된 것은 나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고 평범한 것을 꿈꾸는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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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2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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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의 공간적인 배경이 되어주는 찰스턴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인종차별 폐지에 반대하는 남부연합의 격전지이기도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보다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멋진 남자 레트 버틀러의 고향으로 더 강하게 기억되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남북전쟁 시대가 시간적인 배경이니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찰스턴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세부적인 묘사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문장을 기억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정혜윤이라면 근사하게 인용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정말 안타깝게도 책도 없어서 다시 뒤적여볼 수도 없다), 레트는 그곳의 모든 것을 사랑했으며 찰스턴 출신이라는 사실에 높은 자긍심을 드러냈다.

팻 콘로이는 그 찰스턴을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애슐리 강과 쿠퍼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어귀에 자리 잡은 찰스턴을 『사우스 브로드』는 (이 소설의 주인공 레오 아버지 재스퍼의 말을 빌어) “강가의 대저택”이라고 묘사한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옹기종기 매혹적인 대저택을 이루는 찰스턴의 풍경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다. 찰스턴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팻 콘로이가 그토록 찬사를 늘어놓는 아름다운 찰스턴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레오폴드 블룸 킹과 그의 친구들이다.

레오의 이름은 그의 풀네임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1904년 6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을 기념한 이름으로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너무나 사랑하는 어머니의 흔적이다. 이것은 『사우스 브로드』를 더 폭넓게 지배한다. 훗날 어른으로 성장한 레오가 회상하는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는 1969년 블룸스데이부터 1990년 블룸스데이까지 이어진다. 서로 별세계에 사는 것같이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좀처럼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이 찰스턴에서 한 운명으로 묶이게 된 날은,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는 특별한 날인 블룸스데이(Bloom’s Day)다.

바로 그날, 문제아들과 떨거지들이 죄다 모여드는 유배지 같은 공립 고등학교인 페닌슐라의 냉엄한 교장선생님인 레오의 어머니 린지가 레오에게 그들을 찾아가 마음은 주지 말고 페닌슐라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특명을 내린다. 성폭행을 일삼는 정신이상자 아버지를 피해 레오네 맞은편으로 이사 온 쌍둥이 남매 시바와 트레버, 엄마와 할머니를 찾으려고 고아원에서 늘 탈출을 감행하다가 찰스턴에까지 흘러든 남매 나일즈와 스탈라, 찰스턴 최상류층 집안에서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마약소지죄로 퇴학당한 채드와 몰리,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어이없이 죽은 삼촌의 일로 백인을 두려워하는 흑인 풋볼 코치의 아들 아이크, 여기에 채드의 여동생 프레이저와 뒤늦게 찰스턴 고아원에 합류한 베티까지 너무나 이질적인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내어주는 레오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평생의 우정을 쌓는 친구가 된다.

『사우스 브로드』의 굵직한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그들은 모두 불행한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도 지속되는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있다(소위 부유한 명문가에서 성장한 채드와 몰리, 프레이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른들에게 교육받은 대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누구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한다. 불쌍하게도). 그것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빛나던 형의 자살을 목격하고 황폐해진 레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레오와 친구들의 미래는 자신들의 비극을 극복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어 절망적인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고단한 현재를 행복한 미래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물론 모두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는 못하는 이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때론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기쁘고, 때론 눈물방울이 뚝뚝 흐를 만큼 슬프고, 때론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올 만큼 안타깝다. 무엇보다 그들이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짓궂은 말들이 좋았다. 치명적인 상처를 건드리는 말은 대개 혀끝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팍에 꽂히게 마련인데, 그들이 서로에게 툭툭 던지는 말들은 부드럽고 뭉툭하고 정다워 상처로 벌어진 마음을 아물게 해주는 치유의 마법이다.

『사우스 브로드』는 (찰스턴과 레오의 비극을 설명하는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문장에서 시작하여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로 끝난다. 열여덟 살의 가시 돋인 청춘들이 각자의 아픈 삶에서 뚜벅뚜벅 걸어와 인생을 공유하고 서른여덟 살의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그들에게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 물론 그중에서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았다.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는 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테지. 레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하루는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길고(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완독하는 일은 꿈이기까지 하다!) 모든 일이 일어난다. 단 하루일 뿐인데도. 어쩌면 인생은 그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하루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 사이를 배회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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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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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처음 받아본 독자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뭐 이렇게 길어!’ 그렇다. 이 책은 너무나도 길쭉하다. 다른 책과 함께 꽂아두기도 힘든 이 책은 실험소설이라는 딱지답게 책의 길이마저도 실험적이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고 세 가지의 이야기가 한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것을 보면 이 책이 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책의 내용은 3단으로 분리되어 세뇨르 C의 정치적, 사회적 의견들과 뒷편의 일기가 맨 윗 단에, 자신이 고용한 타이피스트인 젊고 아름다운 안야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간에, 그리고 노작가와 접하게 되며 변해가는 자신을 느끼고 세뇨르 C를 점점 이해해가는 안야의 이야기가 아랫단에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실험적인 구성은 대단히 독특하면서도 조화롭게 이루어져 대위법의 대가인 바흐의 음악처럼 읽힌다는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책의 구성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불협화음처럼 들릴 터, 우선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세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읽는 것이겠지만 텍스트의 경우 이 방법은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자꾸 앞장을 뒤적이게 될 수도 있다. 번역자의 경우처럼 아래 두 단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나중에 세뇨르 C의 원고를 읽는 방법과 반대로 세뇨르 C의 원고를 먼저 다 읽고 아래 두 단의 이야기를 읽는 방법도 있겠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세 이야기를 함께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터,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두 방법을 절충한 것이다. 다행하게도 중간에 빈 페이지가 있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틈을 주고 있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려니 나름대로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세 이야기를 함께 읽기를 고집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결국은 ‘변화’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전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둘의 만남은 세뇨르 C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안야에게는 돈 많은 작가에 대한 유혹과 흥미로 시작되어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교감을 갖게 된다. 개인적인 것을 이야기해 보라는 안야의 권유는 세뇨르 C에게 민족과 테러리즘 같은 ‘강력한 의견’들 대신에 죽음을 앞둔 자신의 삶과 작가로서의 인식 같은 개인적이고 섬세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뇨르 C의 이야기는 안야에게 정치적인 무관심과 편협한 생각 대신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해 보려는 시각을 갖게 한다. 이런 둘의 변화는 안야가 떠나기 전 잠깐의 포옹으로 서로에게 완전하게 전해진다.

세 이야기가 조화롭게 연주되는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은 음악처럼 읽어야겠다. 격정적으로 시작되어 조용한 선율로 마감되는,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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