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처음 받아본 독자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뭐 이렇게 길어!’ 그렇다. 이 책은 너무나도 길쭉하다. 다른 책과 함께 꽂아두기도 힘든 이 책은 실험소설이라는 딱지답게 책의 길이마저도 실험적이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고 세 가지의 이야기가 한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것을 보면 이 책이 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책의 내용은 3단으로 분리되어 세뇨르 C의 정치적, 사회적 의견들과 뒷편의 일기가 맨 윗 단에, 자신이 고용한 타이피스트인 젊고 아름다운 안야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간에, 그리고 노작가와 접하게 되며 변해가는 자신을 느끼고 세뇨르 C를 점점 이해해가는 안야의 이야기가 아랫단에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실험적인 구성은 대단히 독특하면서도 조화롭게 이루어져 대위법의 대가인 바흐의 음악처럼 읽힌다는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책의 구성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불협화음처럼 들릴 터, 우선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세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읽는 것이겠지만 텍스트의 경우 이 방법은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자꾸 앞장을 뒤적이게 될 수도 있다. 번역자의 경우처럼 아래 두 단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나중에 세뇨르 C의 원고를 읽는 방법과 반대로 세뇨르 C의 원고를 먼저 다 읽고 아래 두 단의 이야기를 읽는 방법도 있겠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세 이야기를 함께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터,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두 방법을 절충한 것이다. 다행하게도 중간에 빈 페이지가 있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틈을 주고 있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려니 나름대로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세 이야기를 함께 읽기를 고집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결국은 ‘변화’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전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둘의 만남은 세뇨르 C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안야에게는 돈 많은 작가에 대한 유혹과 흥미로 시작되어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교감을 갖게 된다. 개인적인 것을 이야기해 보라는 안야의 권유는 세뇨르 C에게 민족과 테러리즘 같은 ‘강력한 의견’들 대신에 죽음을 앞둔 자신의 삶과 작가로서의 인식 같은 개인적이고 섬세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뇨르 C의 이야기는 안야에게 정치적인 무관심과 편협한 생각 대신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해 보려는 시각을 갖게 한다. 이런 둘의 변화는 안야가 떠나기 전 잠깐의 포옹으로 서로에게 완전하게 전해진다.

세 이야기가 조화롭게 연주되는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은 음악처럼 읽어야겠다. 격정적으로 시작되어 조용한 선율로 마감되는,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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