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모어 이모탈 시리즈 1
앨리슨 노엘 지음, 김경순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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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멸의 존재와 필멸의 존재, 그들의 환생을 거듭하는 영원한 사랑 이야기라는 말에 신일숙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떠올랐다. 불멸의 신 에일레스와 필멸의 인간 레 샤르휘나의 마지막 장면은 불새가 된 샤르휘나가 환생할 때까지 그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깨울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에일레스의 모습이다. 샤르휘나가 모래알 한 알로 환생하더라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환생과 그 이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암시만으로도 얼마나 짙은 여운이 남는지. 게다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전날 학교 기숙사 친구들과 밤새워 읽고 책장이 낱낱이 떨어지도록 몰두했던 추억이 그립게 어려 있는 최고의 만화책이다.

그리하여, 앨리슨 노엘의 『에버모어』에 대한 기대가 턱없이 컸음을 먼저 밝혀둔다. 그러니까 로맨스 소설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로맨스 소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로맨스 소설’로 분류된 책을 그리 자주 읽지는 않아, 로맨스 소설로서 『에버모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도 어렵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 로맨스를 우아하고 신비하게 감싸는 문학적인 장치가 내 취향을 사로잡아 나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내어주길 바랐다. 내 기대가 너무 과했나 보다. 아니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든지.

일단 여자 주인공 에버와 남자 주인공 데이먼이 선남선녀라는 묘사가 지나치게 자주, 그것도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표현으로 되풀이되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끝내는 에버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인지, 데이먼이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 그게 로맨스 소설의 공식이라는 것쯤은 잘 알아, 라고 빈정거리고 말았다. 불사의 존재를 늘 신화와 연관 지어 황홀해하는 내 선입견 탓도 있겠지만, 석연치 않은(아직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은. 모두 6부작이라고 하니까.) 모종의 연구 결과인 불사의 붉은 음료(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불멸의 생명수 암리타도 있긴 하지만)라니 잔뜩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게다가 디즈니랜드와 경마장 장면은 특히 유치했다. 솔직히 그 장면이 무엇을 위해 필요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디즈니랜드에서 해적(놀이기구의 일종인 듯!)을 한 번 더 탄다든지, 귀신의 집에 들어가자든지, 경마장에서 남들은 가지지 못한 초능력으로 쉽게 떼돈을 번다든지…….  사실 시간 죽이기용으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면 책장은 잘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불만이 조금씩 머릿속에 들어차다 보니 한 권을 완독하는 시간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처음에는 이렇게 불만만 부각하는 감상을 남길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것은 모두 닉 혼비의 영향이다. 이 책과 함께 『닉 혼비 런던 스타일 책읽기』를 함께 읽다 보니 그의 시니컬한 어조에 전염됐고 조금은 용감해졌다. 그러나 이런 소설에 별 감흥이 일지 않는 내 나이 탓이 가장 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모두 6부작이라고 하니 아직 섣불리 단정짓기에는 이를 테지. 하지만 내가 다음으로 나아갈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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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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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에는 모리미 도미히코가 숭고한 바보이길 자처하는 교토 다다스 숲의 명문가 시모가모 가문의 너구리들을 몰고 왔다. 대대로 면면히 진하게 흐르는 ‘바보의 피’가 시키는 대로 이 너구리들은 “때로는 인간을 호리기도 하고 때로는 텐구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며, 때로는 펄펄 끓는 쇠냄비에 빠지기도 해왔다”. 바보의 피는 “재미있게 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건 좋은 거야! (무조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재미있었으면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도미히코가 바보 같아서 아름답고 더욱 사랑스러운 너구리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놓고 떠벌리고 있으니, 이 소설의 재미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일단 이 책을 펼쳐 들면, 재미있게 읽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세상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모두 인간이기만 할까? 『유정천 가족』은 그들 사이에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와 텐구도 섞여들어 있다고 능청스레 이야기한다. 알고 보면, 오히려 인간보다 너구리와 텐구 들이, 특히 너구리들이 너구리 냄새를 폴폴 풍기며 넘치게 활보하는 세상이라니, 너무 귀엽다! 그 이야기의 뼈대는 이렇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금요구락부의 냄비요리가 되어버린 아버지 소이치로와의 영영 이별 이후, 형제애로 뭉친 시모가모 사형제가 천둥을 두려워하는 어머니를 지키고 가문의 앙숙인 에비스가와의 소소한(?) 음모들을 극복해 가는 다사다난한 과정이 떠들썩하게 펼쳐진다.

때론 농밀한 감동까지 자아내는데, 텐구들에게까지 명성이 뜨르르한 너구리들의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였던 ‘니세에몬’ 소이치로가 왜 어이없이 인간의 냄비요리가 되었는가에 대한 미스터리가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그 밤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애잔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진다. 소이치로가 주노인(이 노인의 정체가 수상하다. 둔갑 풀린 털뭉텅이 너구리들이 떼로 등장해 소동을 벌여도 전혀 놀라지 않는 이 음흉한 노인네는 텐구, 아니면 너구리?)의 주관하에 전통이라는 이유로 송년회 밤마다 너구리 냄비요리를 즐기는 금요부락부의 희생양이 되던 날, 시모가모 사 형제는 각자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소중한 추억으로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회상은 그날 아버지의 행적을 재구성한다. 그 재구성의 마지막은 둔갑한 너구리들의 지하 술집 ‘아케가라스’의 저승길이다. 그 길을 가는 도중의 마지막 대화를 읽는 동안 뭉클했다. 눈물도 났고 웃음도 났고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아쉬움 한 자락, 억울함 한 자락, 증오 한 자락, 두려움 한 자락 남기지 않고 홀가분하게 아케가라스의 어두운 복도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는 소이치로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소이치로, 너 죽은 거냐?”
“죄송스럽습니다만, 조금 전에 냄비요리가 되어서요.”
“그런 바보 같은 일이!”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길입니다.”
“그러기에 뭐라고 했나. 어지간히 까불라고 했더니.”
“어쨌든 저는 너구리니까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죠. 이 또한 바보의 피 때문이니.”

 
   

아카다마 포트와인을 연료로 하늘을 나는 텐구의 안방, 도시의 고층 빌딩 옥상의 아름드리 벚나무 한 그루, 바람이 스칠 때마다 도시의 거리로 눈처럼 내리는 벚꽃잎, 싸구려 연립주택에 은거한 괴팍한 텐구, 저세상으로 가는 어두운 복도가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지하 술집 등등 나를 매혹하는 소설적인 장치들도 여전히 너무나 사랑스럽다. 하지만 『유정천 가족』의 매력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익살스러운 소설에 비해 부드러운 유머로 감싸여 있는 대신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과 장면들이 갈피갈피 숨어 있다는 것이다. 모두 3부작이라고 했던가. 시모가모 너구리들의 다음 이야기는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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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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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초등학교에서 재직했고 이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Heute Kommt Johnson Nicht Kolumnen』는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에 와서 실종되어 버린 기다림, 이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요즈음 세상에서는 효율성이야말로 최고의 가치-특히 요 몇 년 사이 유난히 강조하긴 하지만-처럼 여겨지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진 우리에게 75세 먹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어떻게 와 닿을까?

우리나라에서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죄악이다. 여유-금전적인-가 있으면서도 시간이 많다면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여유가 없으면서도 시간이 많다면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삶 때문에 시간을 갖기 힘든 우리나라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휴가를 쓰는 것인데도 온갖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일에 지쳐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월요일이 되면 또 일을 하러 나간다. 아이들이라고 별다를까? 코흘리개 꼬마 아이들부터 자기 몸만한 가방을 메고 온갖 학원에 다니며 시간을 쪼개 활용하고 있다. 심각하게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뒤쳐진다고 강요를 받을뿐더러, 요즘 세상이라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 쉬우니 그저 안쓰럽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삶에 시간과 여유를 가져야 했어'

페터 빅셀이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남았잖아?' 페터 빅셀의 사물을 보는 관점이 독특하다는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인간에 대한 관점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아니 인간을 바라보는 것 역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차 시간표를 외우고 있으며 시간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에밀이라는 지적장애인을 보며 어린 페터 빅셀이 생각했던 것은 '에밀처럼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페터 빅셀은 동물원에서 아이에게 동물의 이름을 가르쳐 주려는 부모보다 동물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아이들이 가진 삶의 원초적인 즐거움을 공유한다. 사물에 대한 것이건 인간에 대한 것이건 이런 새로운 관점이 우리가 쉽게 잊고 살아왔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관조하듯 들려주는 페터 빅셀의 이 산문집에는 특별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직 젊거나 어리기 때문에 담담히 들려주는 이 이야기에서 굳이 무언가를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페터 빅셀의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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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터 - 집으로 쓴 시!, 건축 본능을 일깨우는 손수 지은 집 개론서 로이드 칸의 셸터 시리즈 1
로이드 칸 지음, 이한중 옮김 / 시골생활(도솔)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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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에서 잘 빠진 집 한 채를 갖기 위해 무리하게 대출을 하고 집의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우리의 집은 가장 큰 재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이는 우리의 삶이 여유롭게 살기에는 너무 팍팍한 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원의 삶을 꿈꾸고 전원의 주택을 꿈꾸고 있다. 삶의 여유가 된다면 나도 역시 한적한 곳에서 자연과 함께 하며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고 싶다.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거라고 쉽게 말하지 말자. 적어도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로이드 칸의 『셸터SHELTER』는 부제인 ‘건축 본능을 일깨우는 손수 지은 집 개론’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스스로 지은 집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 동굴 같은 곳에서 기거하다가 자신만의 집을 짓기 시작한 이후로 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책 소개의 SHELTER의 의미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초창기의 집은 임시거처의 목적이 더 컸고 그만큼 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나무나 짚, 돌과 같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어진 오두막, 사막에서 주로 지어졌던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 쉽게 짓고 철거할 수 있는 천막에서 시작해 지붕과 뼈대가 분리되고 벽돌이나 콘크리트 같은 인간이 직접 만든 재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집은 점차 상시 거주의 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실용적인 면만을 강조했던 임시 거처에서 벗어나 인간이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집은 실용적인 공간만의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집이 생활의 일부가 된 덕분에 그 규모는 더욱 커지고 튼튼해졌으며 외관은 화려해졌다. 겔에서 거주하는 몽고 유목민들과 시멘트로 집을 짓고 살고 있는 몽고 마을 주민들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야말로 좁은 땅에 지을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거처일 지도 모른다. 인구가 갑자기 감소하지 않는 이상 멋없지만 좁은 땅에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아파트 형태의 건축물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자연을 향하는 것인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전원주택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황토집이나 한옥집, 통나무집처럼 손수 집을 지을 수 있는 강좌가 열리기도 한다. 디자이너들에 의해 예쁘게만 지어진 집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집에 대한 애착은 더울 클 것이다. 로이드 칸의 『셸터SHELTER』는 실용서가 아니다. 이 책에서 집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오래 전에 지어졌던 집을 위주로 소개하는 덕분에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그대로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지역별로, 나라별로 다를 뿐 아니라 지은 사람의 개성마저 표출되는 손수 지은 집을 사진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만의 집을 짓고 싶어서 좀이 쑤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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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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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하나가 또 죽음을 선택했다. 현실의 내 주위에서든, TV 뉴스에서든, 심지어 소설에서든 아이의 죽음은 심장을 쿵 떨어뜨린다. 소설에서마저 아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 작가가 몹시 미워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수한 아이들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죽음을 선택하거나 당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애써도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며, 소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는 현실보다 더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을 읽기 전에 이미 천지라는 여자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이 책을 펼친 것은 김려령이 이전의 『완득이』에서 보여준 밝고 건강한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가 얼마간 완충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보였다. 아이의 극명한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플 뿐이다.

   
  내일을 계획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우아한 거짓말』은 이 짧지만 먹먹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내일을 이야기하던 아이가, 착하고 속 깊고 의연해 보이던 아이가, 불가항력적인 병도 불의의 사고도 아니고 오늘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대체 왜? 소설은 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툭 던져놓고, 이 무서운 현실에 이르게 된 과정을 역행하여 보여준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명백한 사실 하나 뒤에 숨겨진 더 많은 사실들이, 아이를 죽인 미움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남모르는 사정들이 아이가 엮어가던 삶의 가닥에 올올이 맺혀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천지의 죽음 이후, 언니 만지는 죽을 이유가 없는 동생 천지가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천지가 아직은 살아 “그래도 용서는 할게”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봉인해 둔 다섯 개의 붉은 털실 뭉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천지와 가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던 화연이부터 천지를 도와주는 척 천지의 상처를 헤집었던 미라와 화연이를 내세워 천지를 놀잇감으로 삼았던 아이들, 그리고 천지의 아픔을 눈치 챘지만 더는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 오대오, 천지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던 엄마와 만지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던 마음들이 서로 부딪쳐 짓무른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일만 가지고 생각하면) 나는 화연이 같은 아이가 제일 싫다. 그래도 천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천지의 마음과 상관없이 나만 안도하려고 천지가 의연하고 씩씩하게 버텨주길 바라는 이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화연이는 천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만, 곧 천지에 관한 교묘한 거짓말로 천지를 따돌리고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는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친구의 뒷말들을 나누며 친해지고 누군가의 주도로 괴로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를 구경거리 삼아 왁자지껄 떠든다. 냉담한 구경꾼인 아이들은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 안전하게 책임을 회피할 변명 거리를 마련해 두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누군가를 이구동성으로 지목하고 자기 꼬리를 감춘다. 또 다른 따돌림은 그렇게 되풀이된다.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 입지를 다지기 위해 천지를 교활하게 이용한 화연이도 싫지만, 비겁한 구경꾼들은 더 무섭고 싫다. 미라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구경꾼이었다. 화연이에게 속고 또 속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화연이가 자신을 속이고 또 속이는 천지의 현실을, 천지도 이미 사무치게 잘 알고 있는 슬픈 현실을 눈앞에 들이밀며 비웃었다. 그래서 천지는 곱절로 아팠을 것이다. 이미 덧난 상처를 또 후벼대는 것이니까.

이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 시절의 나는 천지가 아니라면 차갑고 무심한 아이들 사이의 미라의 모습으로 뚱하니 서 있다. 천지라 해도 나는 천지처럼 착하지 않다. 나는 나 아닌 다른 누구의 마음도 먼저 헤아리지 않고 내 마음부터 들여다본다.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기제는 언제든 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따뜻한 심장을 차갑게 식히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실제로 왕따를 당하는, 자신이 모두를 따돌리고 있다고 믿으려는 미소의 모습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에게 나는 그만큼 널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어 가슴 아프게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왜 똑같은 정도의 감정을 함께 나누지 못하면 상대의 마음까지 쌀쌀맞게 외면하고 거부했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던 나는 정말 어리석었다. 평생의 친구로 함께했을지도 모를 몇몇 녀석들은 진한 후회로 남는다. 천지 때문에 눈물이 나지만, 화연이도 가엾고 미라도 가엾고 미소도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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