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의 집
수전나 클라크 지음, 서동춘 옮김 / 북노마드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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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하면 생각 나는 것이 무엇일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모로코를 배경-실제로는 모로코를 정밀하게 재현한 세트에서 촬영했다-으로 한 <카사블랑카>나 음악이나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 지역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이 모로코를 통해 넘어온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를 생각할까, 그 밖에는 특별히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나라다. 이것저것 찾아 보면 유럽과 근접한 아프리카 서북쪽의 나라로 현재는 라바트가 수도며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왕국이라는 단편적인 지식 밖에 습득할 수 없다. 이는 우리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터, 생활 방식이나 종교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통적인 집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호주에서 저널리스트 일하고 있는 수전나 클라크 부부는 모로코 첫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여행 중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사온 사하라 사막 빛깔의 카페트를 볼 때마다 치명적일 만큼 감각적인 모로코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켓을 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제품들에 실망하고 모로코 재래시장의 신선함과 사람 냄새 나는 활기참을 그리워한다. 결국 그들은 모로코의 옛 수도인 페스에 집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런 무모함이라니! 그들 부부는 호주에 삶이 매어 있는 월급쟁이였고 몇 번의 휴가를 위해 집을 산다는 것은 친구의 충고처럼 19세기적 발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모로코에서 시작될 삶에 큰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모로코에서 집을 장만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집은 서류가 부족해 계약이 파기되었고 결국 구한 것은 원형은 아름다웠지만 파손된 것이다. 부부는 그 집을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리아드 자니’라고 이름 붙인다. 리아드는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의 형태를 의미하며 자니는 수전나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다. 인샬라. 집을 복원하면서 모로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모로코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를 동화된 삶으로 접하고 이해해 가면서 낯선 곳에 삶의 터전을 가꾼다는 것이 그곳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수전나 클라크의 『페스의 집』에는 모로코의 삶과 역사가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특히 모로코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있는 독특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외국인에게 개방적이며 휴대전화 광고판과 장인공방, 당나귀를 끌고 가는 농부가 공존한다. 하지만 이런 모로코 역시 외국의 리아드 열풍에 전통적인 가옥들이 훼손되고 있다. 수전나는 이런 열풍을 우려하며 최소한 그들의 전통적인 것들만이라도 존중해 줄 것을 원한다. 이것이 모로코만의 문제일까? 한옥을 지키려다 실명한 외국인의 뉴스를 접한 것이 떠오르니 더욱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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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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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에 관한 이야기들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책들에 대해서도 눈길이 더 가게 되는데 의외로 책에 관련된 책들도 종류가 제법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책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나 서점에 관련된 이야기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이야기할 개인의 독서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독서기라는 것이 책의 선택에 있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독서기를 읽는 것은 그만큼 흥미로울 수도, 지루할 수도 있다.

윤미화의 『깐깐한 독서 본능』은 인터넷 서점의 블로그에 연재된 독서기를 모은 책이다.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는 독서기로 여러모로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생각나게 한다. 저자는 40대에 귀농을 5년간 1,000여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방대한 양과 속도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차례만 보아도 한국문학, 외국문학, 고전•해석, 인문•사회, 인물•평전, 문화•예술, 역사•기행, 만화•아동으로 우리나라에 출간되는 모든 영역의 단행본을 다 섭렵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 그 범위가 넓다. 저자는 자신을 어중이떠중이 독서가라고 한껏 낮추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겸손이다. 세상에는 책이 아직도 많으니 저자의 책 먹어 치우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고, 풍성한 서평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요즈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 같은 것으로 강요된 독후감 덕분에 책 읽기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도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책을 읽고 기록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한다면 그것만큼 피곤한 것이 없을 터, 어쩌면 마음이 내키고 손이 갈 때마다 써 내려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윤미화의 『깐깐한 독서 본능』은 독후감 쓰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차례가 바뀔 때마다 삽입되어 있는 저자의 이야기 중 좋은 서평 쓰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꼭지를 읽다 보면 마치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서평에 대해 진지하고 강렬하게 이야기한다. 잡담으로 시작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활용하고, 유사도서를 참조하여 좋은 서평을 만들라고 말이다. 대부분의 인터넷에 올려진 서평은 물론 나 역시도 공개된 서평을 쓸 때면 이런 방식으로 쓰곤 한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공개된 블로그가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을 개인적인 서평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윤미화의 『깐깐한 독서 본능』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나 같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독자라면 ‘단순하고 쉽게쉽게 쓰는 독서 일기’ 같은 것이라도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기록하는 행위다. 저자의 말처럼 기록하지 않은 책은 뇌에서 삭제되는 것은 물론 책을 받아들이는 자신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10대에 읽은 책과 30대에 읽은 책은 같은 책이지만 다르다. 이처럼 자신이 읽은 것을 기록하는 것은 독서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소한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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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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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이것은 나의 유일한 독서 목적이다. 결국은 재미로 통하는. 그래서 책은 내게 언제나 놀잇감이었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뭔가를 발견하면 별로 망설이지 않고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게 게임이든, 드라마든, 만화든, 자수나 뜨개질이든, 술이든, 외출이든 그 밖의 등등 무엇이든 말이다. 무엇을 하든 내 시간을 즐겁게 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랄까, 그중에 책은 대개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물론 즐거움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감정이고, 그 즐거움을 유발하는 요인들도 그때그때 너무나 변덕스럽긴 하다. 또한 그 즐거움은 온갖 형태의 감동에서, 설령 눈물을 쏟게 하는 슬픔이 구축한 감동에서도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결국 얼마나 내 마음을 장악하고 울려서 뒤흔드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작가의 명성과 작의(作意),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작품의 가치도 내 마음과의 공명 앞에서는 그 권위를 내세우지 못한다. 그러니까 일단 독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은 온전히 그 책을 읽은 독자만의 것으로 유일해진다. 작가가 책을 쓰기 시작하지만 그 책을 완성하는 사람은 독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에게는 책 속의 텍스트를 마음 가는 대로 해독할 수 있는 고유의 권리가 있다. 작가도 독자의 책 읽기를 위해 개인 교습을 해줄 것이 아니라면(개인 교습도 독자가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래라저래라 관여할 수 없다. 작가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작의가 아무리 훌륭해도, 작품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인 독자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으면 그 독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물론 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부족해 누군가는 새 지평이 열리는 경험을 했지만 또 누군가는 줄곧 하품만 해댔다면, 그것 또한 독자의 책임일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내 마음대로 읽기’는 독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권리를 충분히 누리려면 의무도 다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이 책이 무척 반가웠고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하거나 잇새로 키득키득 동조할 수 있었던 것도 닉 혼비의 책 읽기가 독서를 오직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취미’, 결국은 여가 시간의 놀이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책을 읽는 행위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일’이다. 내 직업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을 내 독서 목록에 포함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책 읽기는 내가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도무지 재미있지가 않다. 일은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그러나 일과 놀이는 분명 다르다. 일로 책을 읽으면 재미없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결코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놀이로 책을 읽을 때는 재미없으면 언제든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않는가). 독서는 ‘놀이’, ‘취미’, ‘여가’로 남아 있을 때 가장 빛난다. 그때 독서의 가장 순수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어쨌든 닉 혼비는 ‘창작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책값)를 지불하고 내 소유의 책을 내 마음대로 읽겠다는데, 그래서 불만도 마구 터뜨리고 찬사도 맘껏 보내겠다는데 누가 뭐래! 작가도 감히 뭐라고 못 하지! (그게 싫으면 책을 팔지 말아야지!)’라는 배짱을 부린다. 닉 혼비의 독서 이야기들이 연재됐다는 잡지 ≪빌리버≫의 성스러운 의도(작가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어떤 책도 비난하지 말지니!)도 온갖 엄살을 떨며 가볍게 물리친다.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도 잘 안 되는 90% 과장의 우스운 거짓말, 대개는 투덜투덜 불평, 가끔 전폭적인 찬사, 책을 읽지 못한 데 대해 줄줄이 이어지는 변명, 문학인들과의 부러운 인연(특히 커트 보네거트와 테라스에서 담배 피우기) 등등이 켜켜이 ‘농담’을 이룬다. 닉 혼비의 (읽은) 책들 중 한국에도 번역됐고 내게 없는데 읽고 싶어진 책은 제스 월터의 『시티즌 빈스』, 조슈아 페리스의 『호모오피스쿠스의 최후』, 마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다.

달별로 산 책과 읽은 책 목록을 나란히 기록해 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나도 시도하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다. 산 책 따로, 읽은 책 따로 목록을 정리하긴 하지만 두 목록을 합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산 책 목록은 그 양이 닉 혼비를 능가하고(그도 목록에 올리지 않은 책들이 많다지만) 읽은 책 목록은 엇비슷하니, 굳이 적나라하게 비교하여 읽은 책 목록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밀려들 때도 있는 죄책감도 느끼고 싶지 않다. 이런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글귀가 있으니, 닉 혼비가 소개한 가브리엘 자이드의 교양인에 대한 정의다. 그는 『So Many Books』에서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럼 나도 교양인? 그리고 이어서 닉 혼비는 “우리가 소유하는 책들은 읽었든지, 읽지 않았든지 간에 우리의 자유재량에 맡겨진, 가장 온전한 자아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내 책장의 책들이 진정한 나를 표현해 준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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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1 - 로마인의 피 로마 서브 로사 1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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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참 전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과학적 수사 기법-모든 것은 DNA로 통할 것이니-을 이용하는 미국 수사 드라마들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탐정은 희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인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거나 표정을 관찰하는 탐정역들도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학 수사대와 마초적 냄새를 물씬 풍기는 도시의 탐정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직관과 논리력으로 무장한 탐정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탐정과 조력자 콤비를 만나는 것은 추리소설을 읽는 가장 전통적인 즐거움일 터, 스티븐 세일러가 만들어낸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의 탐정 고르디아누스와 키케로라는 변호사를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고르디아누스 역시 순수한 의미로 전통적인 탐정이라기 보다는 하드보일드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는 활동적인 탐정이다. ‘더듬이’라 불린 가공의 인물인 고르디아누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웅변가이자 로마의 국부로 불렸던 키케로가 처음 변호해 명성을 떨치게 된 아버지 존속 살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로마 시대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었다고 알려진 BC 1세기 공화정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추리물-키케로의 등장으로 법정물까지 더해져-과 역사물이 결합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정석적으로 보여 준다. 제목만 보아도 『로마 서브 로사Roma Sub Rosa 』의 sub rosa는 ’장미 밑에 있다(under the rose)’ 라는 뜻으로 비밀회의 장소에 장미를 꽃아 두었던 로마 시대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과거 비밀의 의미로 사용되는 장미를 이용해 시리즈 물에서 로마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첫 이야기인 [로마인의 피]에서도 카이사르, 술라, 키케르 같은 당시에 쟁쟁했던 실존 인물을 등장시겨 사실감을 더하는 것은 물론 세부적인 묘사에도 충실하여 당시 로마의 정치상과 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해 내었다.

『로마 서브 로사』의 가장 독특한 점은 추리소설의 전통적인 관계 설정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탐정 역할의 인물이 주가 되고 조력자가 부가 되는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실제 존재하던 인물인 키케로의 등장과 가공 인물인 고르디아누스의 신분 때문에 둘의 역할이 거꾸로 설정이 되어 있다. 로마 권력의 심층부와 연결되어 있던 사건을 직접적으로 파헤치기에는 고르디아누스의 신분이 너무 낮았고 사건을 해결하려 직접 발로 뛰어다니기에는 실존 인물이었던 키케로의 위상을 바꾸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독특한 고르디아누스의 신분의 제한을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중세를 배경으로 했던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나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처럼 18년 동안 총 10권의 시리즈에서 활약하게 될 고르디아누스라는 괴짜 탐정을 계속 만나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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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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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하루를 온전히 지켜보는 일은 사실 내가 몸소 그 하루를 살아내는 일보다 지루하다. 내 몸을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하루를 머릿속으로 따라가는 일은 때론 따분함으로 하품이 나올 지경에 처하게 된다(사실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 씨를 따라가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짧은 단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1904년 6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레오폴드 블룸을 쫓아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재미있게(!) 읽기에는 녹록지 않은 책임이 분명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씻고 먹고 어딘가로 가고, 또 어딘가로 움직이고, 누군가와 만나고, 또 누군가와 대화하는 사이 밤이 이슥해지는 동안 생각, 또 생각을 한다. 극적인 일도 보통 무수한 하루들 중 어느 하루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재미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의 하루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 하루를 확장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만화경처럼 펼쳐져 인생의 보편적인 의미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일종의 환상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동성 애인 짐을 잃은 쉰여덟 중년의 대학교수 조지의 하루에 밀착한다. 조지는 어느 날 불현듯 짐을 상실했다. 그것도 짐이 그의 여자친구와 떠난 여행길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조지의 이날은 사랑하는 연인을 상실한 이후의 하루다. 연인과 함께해 일상도 빛났을지 모를 이전의 날들과는 완전히 다른 날들 중 어느 하루. 사랑하는 둘 중 한 명이 떠나면 여기 남은 한 명은 결코 둘이 함께 사랑하던 시간의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 죽은 사랑이 남긴 구멍은 블랙홀처럼 남은 사람의 일상을 집어삼키고 깊은 상실감은 그의 존재 자체를 침범한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의 삶은 지속돼야 한다. 혈육의 죽음 앞에서도 화장실은 가야 하고 잠이 쏟아지고 배도 고프더라는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 없이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은 산자의 몫이다. 『싱글맨』은 상실 이후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지만, 끝내는 애인을 잃은 상실감에 함몰되지 않고 본능적으로 살아갈 또 다른 힘, 희망 한 자락,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다.

조지도 짐을 잃었지만 여전히 아침에 눈떠 용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다. 단지 조지라고 여겨지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조지라고 믿는 누군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조지라고 믿도록 조지를 연기한다. 가끔은 내가 정말 내가 맞는지, 나인 척하긴 하는데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내 안의 나와 이질감으로 불편하게 서걱일 때가 있다. 소중한 사랑을 상실한 조지도 짐과 함께하는 동안 온전해졌을, 한 번도 내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 없는 자기 자신과 달라진 지금이 낯선 것이다. 그는 충일감 없는 하루를 그렇게 시작한다.

그는 살아 움직여도 짐이 죽었을 때 진짜 자신도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지는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짐 없는 삶의 가닥을 그래도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차마 놓지 못한 것이다. 살고 싶은 것이다. 조지는 아침을 먹고, 차를 운전해 대학에 강의를 하러 집을 나서고, 운전하는 동안 비뚤어진 세상사에 잔혹한 상념으로 직격탄을 날리고, 대학에서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테니스 코트의 두 젊은 남학생에게 매혹되고, 학생들을 사로잡는 강의를 하면서 뭔가 북받쳐 올라 열을 올리고, 짐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한때 연적이었던 짐의 여자친구 도리스를 병문안하면서 여성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덧없음에 비탄해하면서도 자신이 이겼다는 승리감에 사로잡히고,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열네 살 소년과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벌이고, 샬럿과는 친구(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조지에게 샬럿은 분명코 친구)와 애인(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샬럿에게는 조지가 애인이었으면) 사이에 머무르며 함께 짐을 추억하기도 하고, 한밤 해변의 바에서 만난 젊은 제자 케니와는 짐 이후 오랜만에 완전한 소통의 가능성을 느끼고 지적이면서도 관능적으로 서로를 유혹하는 대화를 즐기고……. 조지는 그 하루 동안 짐의 흔적과 무수히 부닥치며 지독한 상실감에 휩싸여 있지만 문득문득 새로운 삶의 의욕이 반짝반짝 돌출한다. 케니와 함께 완전히 벌거벗은 채 거대한 파도에 몸을 던지며 기쁨에 충만한 조지에게는 더 이상 짐도, 상실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동성애자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싱글맨』을 쓴 1964년 미국의 사회적인 배경을 떠올리면 조지와 짐의 동성애 자체에 집중해도 무방하겠지만, 이젠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을 잃은 상실은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감정으로 작용하니까. 나는 언제나 혼자 남겨지는 게 싫어서 늘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고 싶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항상 그가 제발 오래도록 살길 기도했다. 내가 짧게 죽어야 하는 일이 없도록. 상실 이후가 두려웠던 것이다. 조지의 상실이 그럼에도 삶으로 이어져 이토록 건조하고 메마른 소설을 물기 가득하게 읽었다. 그러나 작가 이셔우드가 그날 침대에 잠들어 있는 조지를 두고 죽음을 상상하는 마지막 가정은 몹시 스산했다. 나도 상실 이후에도 살아 있고 싶은가 보다.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별개로 삶에 중독되어 삶이 아닌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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