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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의 하루를 온전히 지켜보는 일은 사실 내가 몸소 그 하루를 살아내는 일보다 지루하다. 내 몸을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하루를 머릿속으로 따라가는 일은 때론 따분함으로 하품이 나올 지경에 처하게 된다(사실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 씨를 따라가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짧은 단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1904년 6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레오폴드 블룸을 쫓아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재미있게(!) 읽기에는 녹록지 않은 책임이 분명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씻고 먹고 어딘가로 가고, 또 어딘가로 움직이고, 누군가와 만나고, 또 누군가와 대화하는 사이 밤이 이슥해지는 동안 생각, 또 생각을 한다. 극적인 일도 보통 무수한 하루들 중 어느 하루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재미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의 하루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 하루를 확장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만화경처럼 펼쳐져 인생의 보편적인 의미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일종의 환상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동성 애인 짐을 잃은 쉰여덟 중년의 대학교수 조지의 하루에 밀착한다. 조지는 어느 날 불현듯 짐을 상실했다. 그것도 짐이 그의 여자친구와 떠난 여행길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조지의 이날은 사랑하는 연인을 상실한 이후의 하루다. 연인과 함께해 일상도 빛났을지 모를 이전의 날들과는 완전히 다른 날들 중 어느 하루. 사랑하는 둘 중 한 명이 떠나면 여기 남은 한 명은 결코 둘이 함께 사랑하던 시간의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 죽은 사랑이 남긴 구멍은 블랙홀처럼 남은 사람의 일상을 집어삼키고 깊은 상실감은 그의 존재 자체를 침범한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의 삶은 지속돼야 한다. 혈육의 죽음 앞에서도 화장실은 가야 하고 잠이 쏟아지고 배도 고프더라는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 없이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은 산자의 몫이다. 『싱글맨』은 상실 이후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지만, 끝내는 애인을 잃은 상실감에 함몰되지 않고 본능적으로 살아갈 또 다른 힘, 희망 한 자락,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다.
조지도 짐을 잃었지만 여전히 아침에 눈떠 용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다. 단지 조지라고 여겨지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조지라고 믿는 누군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조지라고 믿도록 조지를 연기한다. 가끔은 내가 정말 내가 맞는지, 나인 척하긴 하는데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내 안의 나와 이질감으로 불편하게 서걱일 때가 있다. 소중한 사랑을 상실한 조지도 짐과 함께하는 동안 온전해졌을, 한 번도 내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 없는 자기 자신과 달라진 지금이 낯선 것이다. 그는 충일감 없는 하루를 그렇게 시작한다.
그는 살아 움직여도 짐이 죽었을 때 진짜 자신도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지는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짐 없는 삶의 가닥을 그래도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차마 놓지 못한 것이다. 살고 싶은 것이다. 조지는 아침을 먹고, 차를 운전해 대학에 강의를 하러 집을 나서고, 운전하는 동안 비뚤어진 세상사에 잔혹한 상념으로 직격탄을 날리고, 대학에서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테니스 코트의 두 젊은 남학생에게 매혹되고, 학생들을 사로잡는 강의를 하면서 뭔가 북받쳐 올라 열을 올리고, 짐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한때 연적이었던 짐의 여자친구 도리스를 병문안하면서 여성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덧없음에 비탄해하면서도 자신이 이겼다는 승리감에 사로잡히고,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열네 살 소년과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벌이고, 샬럿과는 친구(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조지에게 샬럿은 분명코 친구)와 애인(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샬럿에게는 조지가 애인이었으면) 사이에 머무르며 함께 짐을 추억하기도 하고, 한밤 해변의 바에서 만난 젊은 제자 케니와는 짐 이후 오랜만에 완전한 소통의 가능성을 느끼고 지적이면서도 관능적으로 서로를 유혹하는 대화를 즐기고……. 조지는 그 하루 동안 짐의 흔적과 무수히 부닥치며 지독한 상실감에 휩싸여 있지만 문득문득 새로운 삶의 의욕이 반짝반짝 돌출한다. 케니와 함께 완전히 벌거벗은 채 거대한 파도에 몸을 던지며 기쁨에 충만한 조지에게는 더 이상 짐도, 상실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동성애자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싱글맨』을 쓴 1964년 미국의 사회적인 배경을 떠올리면 조지와 짐의 동성애 자체에 집중해도 무방하겠지만, 이젠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을 잃은 상실은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감정으로 작용하니까. 나는 언제나 혼자 남겨지는 게 싫어서 늘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고 싶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항상 그가 제발 오래도록 살길 기도했다. 내가 짧게 죽어야 하는 일이 없도록. 상실 이후가 두려웠던 것이다. 조지의 상실이 그럼에도 삶으로 이어져 이토록 건조하고 메마른 소설을 물기 가득하게 읽었다. 그러나 작가 이셔우드가 그날 침대에 잠들어 있는 조지를 두고 죽음을 상상하는 마지막 가정은 몹시 스산했다. 나도 상실 이후에도 살아 있고 싶은가 보다.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별개로 삶에 중독되어 삶이 아닌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