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미쳤어요
윌리엄 사로얀 / 여울기획 / 1992년 10월
평점 :
절판


여기는 서울, 헌책방에서 우연히 2000원에 구한 3500원짜리 윌리엄 사로얀의 『아빠 미쳤어요』에는 ‘해남공공도서관’이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남쪽 땅끝 마을 해남의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었을, 이 사랑스러운 책이 어쩌다가 한참 북쪽에 있는 내 눈에 띄었을까?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가져온 해남에 살았던 누군가도 우연히 이 책을 읽고 차마 돌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누구인들 그러지 않으랴.) 그리하여 내가 헌책방에서 집어 들기까지 이 책의 고마운 여행이 시작됐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테지만, 그 누군가는 조마조마 심장이 벌떡이는 시간을 견뎠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책을 떠나보냈을까? 그 사연이 궁금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어도, 이 책은 이제 나에게 닿았다.

소설가 아빠와 어쩌면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는 열 살 아들 피트의 이야기다. 아이의 해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여름날 피트의 열 살 생일부터 다음 새해를 맞기까지 아빠와 아들이 함께 있는 이 풍경 속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그들의 대화다. 특별히 예쁘고 근사한 말로만 치장한 것도 아닌데, 아들이 질문하고 아빠가 아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대답하는 언어들은 참 아름답다. 쉽고 단순하고 소박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문장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덕지덕지한 문장들이 감히 가닿을 수 없는 깊이로 마음에 점점이 스며든다. 그런데도 지금 그럴싸한 단어들을 골라 더욱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려고 머리를 굴리는 내가 부끄럽다. 이런 방식은 윌리엄 사로얀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은 잘 안다. 내 말은 힘이 없어 단단한 심지를 지닌 그의 순수한 말 앞에서 덧없이 바스러진다는 것도. 그러나 이렇게라도 지금 나의 벅찬 느낌을 남겨두고 싶은 나를 용서하라.

소설가 아빠는 생일날 피트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을 쓸 줄 모른다는 피트에게 소설은 “네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하루하루의 ‘나 자신’에 대해 쓰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란다. 아빠의 그 말은 “어떤 것이라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똑같은 물건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고 보다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고, 또 그 말은 “세계를 이해하는 힘”을 의미하고, 또 그 말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로 이어진다. 피트는 자기 세계 안에서 자기 언어로 묻는다. 아빠는 피트의 어떤 물음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정성껏 대답한다. 그 대답은 피트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피트가 자기 물음의 답을 직접 찾을 수 있도록 이끈다. 아빠의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고, 피트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곧 자기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아빠는 대견하게도 피트가 스스로 찾은 답을 긍정해 주되, 그 답의 이면을 살펴 피트의 세계를 조금씩 넓힌다. 아빠는 피트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싶게 만든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인데, 사랑하면 그에 대해 끝도 없이 말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피트의 소설은 피트 자신에게서 무한히 확장되어 그의 것으로 가진 세상을 담아 그만의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그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또한 깊어질 것이다. 그래서 생은 언제나 감동할 만한지도. 꾸밈도 허식도 없는 단순한 문장에 깊고 많은 의미를 담아 만들어낸 이야기는 참으로 소박하지만, 그 이야기가 주는 감동적인 여운은 참으로 경이롭고 눈부시고 따뜻하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세계에 대한 이해로 통하고 그게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퍼져 나가 결국은 자신의 생과 다른 모든 생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살아 있지 않으면 그건 정말 쓸쓸할 것”이라는 것, 이 당연한 진실을 왜 그리도 자주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피트처럼 나를, 세계를, 세상 사람들을 제대로 관찰하고,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구하는 일을 게을리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피트의 ‘아빠’가 되어줘야 할 이 시점에 피트의 마음과 시선도 가지지 못했으니, 한때 그런 마음과 시선을 가진 시절도 있었을 테지만 이젠 잃어버린 것 같으니 어떡하나. 그래도 살아 있으니 어떻게든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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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소녀
빅토리아 포레스터 지음, 황윤영 옮김, 박희정 그림 / 살림Friends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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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물에 욕심을 부리다가 알맹이를 놓칠 줄 알았다. 책을 선택할 때는 되도록 내용에만 관심을 두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외의 것들에 욕심이 난다. 빅토리아 포레스터의 『하늘을 나는 소녀』는 소설 자체보다 ‘박희정’이라는 각별하게 아끼는 이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고른 책이라면 믿을 만하지’라고 내 선택에 대한 책임도 조금은 덜어놓았다. 박희정의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출판사의 상술에 사기당했다! 이보다 더 황망하고 실망스럽고 급기야 기분이 나빠질 수 있을까.

“『호텔 아프리카』 만화가 박희정의 신비로운 그림(※띠지)” “이 책의 표지와 본문 안의 그림은 따뜻한 색감과 섬세한 그림체로 ‘순정만화의 신(神)’이라고까지 불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만화가 박희정이 작업했다. 만화가 박희정이 그린 하늘을 나는 소녀 파이퍼의 모습은 작품이 주는 감동의 한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출판사 리뷰).” 표지 그림 말고 책 안에도 삽화가 여러 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심하게 애매모호한 문구로 박희정을 팔아 독자 몇몇을 속이면 출판사는 얼마나 큰 이득을 챙길까? 정말이지, 지나치게 심했다. 혹시라도 박희정에 의지해 이 책을 고르는 사람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반감을 가진 채 『하늘을 나는 소녀』를 읽기 시작했으니 내 시선이 고울까?

어쨌거나 『하늘을 나는 소녀』의 알맹이에 관해 좀 이야기해야겠다. 이 소설에는 일반적인 보통 인간의 능력 이상을 가진, 한마디로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날거나, 투시를 하거나, 염력을 쓰거나, 몸을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거나, 해일을 일으키고 뇌우를 부리거나, 강력한 전기를 발산하거나, 상상 불가능한 속도로 달리거나, 상상 불가능한 힘이 있거나, 치유 능력이 있거나, 투명 인간이 될 수 있거나, 천재 중의 천재이거나. 영화 『엑스맨』 같은 구태의연한 설정에 익숙한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자칫 방심하면 나도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다수자의 오만한 횡포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운다.

상식적인(이 시선도 역시 다수자의 횡포!) 능력 안에서 자기 이권을 최대한 다투며 살아가는 보통 인간이 다수자로 군림하는 세계에서 초능력자의 비극은 그들이 극히 소수라는 데 있다. 다수이므로 자신들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세상의 기준이고 정답이라는 생각을 하는 다수자는 그것에 어긋나는 소수의 무엇도 참아내지 못한다. 성적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등 사회 전반에 소수자로 존재하면서 편견 어린 시선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초능력자도 포함된다.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책이나 만화, 영화를 보면 그들은 대개 실험 대상으로 필요에 따라 쓰이다가 그 필요가 사라지면 버려진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경이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그것을 압도한다. 초능력자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단지 다수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늘을 나는 소녀』에서 리티샤 헬리언 박사는 줄곧 ‘옳지 않아’, ‘위험해’를 주술처럼 되뇌며 초능력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비밀 연구소에 가두어 그 아이들의 정체성인 초능력을 없애기 위해 잔혹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도 상관없다. 초능력을 갖고 있으면 세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분자다. 여기에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도 포함된다. 장미이긴 한데 뾰족한 이빨이 있는 향기로운 장미, 기린은 분명한데 은빛 반점이 햇빛보다 더 밝게 발광하는 기린, 귀뚜라미이긴 한데 평생에 딱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귀뚜라미도 제 능력 이상의 ‘능력’을 소멸시켜야 하는 ‘갱생’의 대상일 뿐이다. 헬리언 박사는 이 소설에서 다수의 모습을 극대화한 사람이지만, 이것은 (이 소설의 도입에서) 보통 아이와 달리 하늘을 날 줄 알았던 파이퍼를 숨기려 했던 매클라우드 부부도, 파이퍼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밀리 메이 부인과 그 아이들도, 천재 중의 천재인 아들 콘래드를 두려워하여 제 자식을 버린 헤링턴 부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매클라우드 부부는 파이퍼의 하늘을 나는 능력이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다. 신의 섭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신의 섭리가 다수의 오만한 중론이 아님은 분명코 알겠다. 신의 섭리는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편견 없이 아우르며 개체마다 순수한 존재 가치를 부여해 주는 무엇이 아닐까. 소수자들이 연대를 형성하지 않고도 상처 입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다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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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아이들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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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글귀가 일반적인 문학 장르에 붙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과도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들일 경우에 19금 딱지라는 것을 붙이게 된다. 그런데 재일 소설가 양석일의 『어둠의 아이들』을 보면 현실을 반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19세 미만 구독불가’가 붙어 있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잔혹하고 충격적이며 슬프다. 외면하고 싶고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여기 있다. “이 아이는 얼마입니까?”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 문장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현대 사회의 한 쪽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황금빛 사원으로 잘 알려진 아름다운 나라 태국, 순박한 사람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TV로 본 사람들이라면 여행지로 가고 싶은 곳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 또 다른 의미의 환상의 여행지가 바로 태국이다. 12000바트 우리 돈 36만원, 애완견보다 싼 아이들의 가격. 부모는 아이들을 판 돈으로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를 산 것에 뿌듯해한다. 이렇게 36만원에 팔려온 아이들은 소아성애자가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위해 아이들을 사 가기도 하고, 또 다른 아이들은 약을 먹고 코카콜라 한 캔 값도 안 되는 가격에 매춘을 하다 에이즈에 걸려 죽게 되면 검은색 봉투에 담겨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지는 그곳. 산 채로 장기를 적출당하고 온몸이 분해되어 비싼 가격에 팔려 부자들의 몸을 대신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의 있는 그곳. 당연하게 이들의 뒤에는 태국 마피아 같은 폭력 단체가 얽혀 끊임없이 아이들을 공급해 준다.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NGO를 위시한 아이들을 구하려는 노력은 그 수요와 공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머나먼 태국의 이야기니까, 우리와는 상관없잖아…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부쩍 늘어난 동남아 매춘 관광의 증가율을 본다면 전혀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같은 나라를 주 무대로 하는 황제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매춘 관광은 현지인들에게 어글리 코리안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읽고 조금 더 잘 살고 여유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가해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추악한 우리 모습을 증오하게 된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 19세 미만 아이들의 집단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파렴치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알게 된다면 이 같은 성 범죄자들이나 인간쓰레기들에게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으로 강력한 제제를 가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추악한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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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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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과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만으로도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편인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를 간직할 가치는 충분하다. 물론 다른 단편들도 고른 수준과 남미문학 특유의 정취를 유지해 만족감을 더욱 높여주지만, 이 두 편은 나를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이런 설렘에 사로잡힌 것은 얼마나 오랜만인지.

쿠바 작가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보여준다. 한 인간이 태어나 인간사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을 모두 견디며 차곡차곡 쌓아간 순행의 시간이 어느 한순간 역행하는 그 여행은 아찔하고, 허무하고, 경이롭다. 이 여행의 시작은 이렇다.

오랜 세월 뜨거운 햇빛에 마르고 스산한 비에 젖어들다가 쇠락한 대저택이 거침없이 철거되고 있다. 한때는 파티와 손님과 집안 식구 들로 북적였을 화려한 대저택이었을 것이다. 벽돌 하나, 장식 하나, 조각품 하나, 이 대저택을 이루었던 모든 것에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다. 소중하게 쓸고 닦고 윤내고 했을 대저택이 안타까움 한 자락 없이 무심하게 허물어지고 있는 철거 현장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잡석들이 널린 광경을 바라보며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코가 뭉개진 여신상 발치에. 그 여신상은 죽음의 운명을 관장하는 죽음의 여신 케레스. 철거를 중단한 채 인부들이 돌아간 폐허에 그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한다. 마법처럼.

   
  희고 검은 네모난 대리석이 방바닥으로 날아올라 흙을 뒤덮었다. 돌멩이들은 정확히 튀어 올라 좁은 벽의 갈라진 틈을 메웠다. 징이 박힌 호두나무 문짝들이 문틀에 끼어들었고, 돌쩌귀의 나사들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다시 구멍 속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화단에서 자라나는 꽃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기왓장이 파편 조각들을 이어 맞추며 요란한 흙바람을 일으켰다가 빗물처럼 지붕의 뼈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품위 있게 옷을 차려입은 집은 다시 평소의 균형을 되찾으며 커져갔다. 케레스 여신상은 점차 회색빛이 가셨다. 분수에서는 더 많은 물고기가 헤엄쳤고, 졸졸대는 물의 속삭임은 잊혀진 베고니아를 다시 살려냈다.  
   

시간의 역행은 처음에는 신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철거 인부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망치들 아래에 무심하게 헐려버릴 운명에 처했던 대저택이 순식간에 과거의 영광스러운 위용을 되찾은 것이다. 대저택의 주인인 후작 돈 마르시알이 자기 임종의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난 것이다. ‘죽음’이 ‘삶’이 되었다. 이때부터 필름을 빠르게 되감는 것처럼 대저택의 순간순간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된다. 죽음에서 벗어난 돈 마르시알의 생애도, 인간의 시간에 따라 마지막 시간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왔던 대저택의 경매, 샹들리에가 빛나는 파티,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 신학교, 아버지의 죽음, 장난감 밀랍 병정 등, 그 모든 기쁨과 슬픔, 영광과 몰락, 천진함과 본능적인 지각을 거꾸로 통과해 씨앗이 되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도 처음인 대지로 돌아간다.

   
  새들은 깃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알로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연못 바닥에 비늘의 강설을 남기고 알로 응결됐다. 야자나무는 부채를 접듯 갈라진 잎을 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줄기들은 잎사귀들을 다시 빨아들였고, 대지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수했다. 천둥이 회랑에 울려 퍼졌다. 샤무아 가죽 장갑에서는 털이 자랐다. 양모 담요는 올이 풀려 멀리 있는 목장의 양털이 되었다. 밤이 오자 벽장과 장식장, 침대, 그리스도 수난상, 탁자, 블라인드는 밀림 가까이의 옛 근원을 찾아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못이 박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어디에 정박해 있는지 아무도 몰랐던 쌍돛 범선은 건물 바닥과 분수대의 대리석을 이탈리아로 실어 날랐다. 갑옷, 쇠붙이 연장, 열쇠, 구리 냄비, 마구간의 재갈은 녹아내려 지붕 없는 회랑을 통해 일렁이는 철의 강을 이루며 땅속으로 흘러갔다.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흙은 한때 집이 서 있던 자리에 황무지를 남기며 흙으로 돌아갔다.  
   

‘삶’이 ‘죽음’에서 벗어났다가 곧 ‘죽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죽음’에서 ‘삶’이 다시 시작된다.

   
  그는 철저히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든 숨구멍을 통해 우주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단지 흐릿하고 거대한 형체들밖에 분간할 수 없는 눈을 감았고, 어둠 가득한, 뜨겁고 축축한, 죽어가는 몸뚱이 속으로 들어갔다. 죽은 몸뚱이의 물질에 싸였음을 느꼈을 때 그는 삶을 향해 미끄러졌다.  
   

죽음과 삶은 양극단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깨를 겯고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다음 생에는……’이라고 늘 환생을 가정하는 우리의 버릇에도 배어 있다. 완전한 죽음에서 비로소 삶이 잉태된다. 삶의 마지막도, 그리하여 다시 시작도 죽음이다. 역행하던 시간도 비로소 멈춰 대저택의 빈터는 누군가의 역사로 새로운 시간을 순행할 것이다. (이 단편의 문장 하나하나는 조각 퍼즐처럼 꽉 짜여서 맨 뒷문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가면 대저택과 돈 마르시알의 생애를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이 단편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리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해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이자 칠레 작가인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은 말의 힘을 보여주는, 정말이지 최고의 단편이다. 말의 힘이라고 하면,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알마시가 사랑한 캐서린이 한 말이 떠오른다.

캐서린은 말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어느 사막의 밤, 그녀는 남편 제프리와 자신, 그리고 알마시를 칸다울레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의 시종 기게스와 동일시하면서 가이어스가 캔덜루스 왕을 죽이고 왕비를 차지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 한 부분을 읊는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음성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말에 사로잡힌 듯 그녀와의 위태로운 사랑에 빠져든다.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꽤 오래도록 그 말의 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질지니! 그 힘은 어쩌면 말 자체가 아니라 말에 담긴 진심이나 기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 자체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얼마든지 번드르르하게 포장될 수 있으니.

「두 마디 말」에서는 벨리사(Belisa, Isabel의 애너그램, 그리하여 작가의 분신)가 말(言)을 판다. 판에 박힌 말, 포장된 말, 가식적인 말, 위선적인 말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리하여 “세상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자신만의 말”을. 그녀는 불순한 의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말의 힘을 알았고 또 믿었다. 어느 날, 벨리사가 파는 말을 사려는 대령이 수하를 보내어 그녀를 납치하듯 거칠게 데려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를 만난다.

   
  그곳에는 온 나라가 벌벌 떠는 두려움의 대상인 한 남자가 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해먹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얼굴 위에 무성한 나뭇잎의 흐릿한 그림자와 불한당으로 살아온 긴 세월의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구의 부관이 쩔쩔매며 다가가는 것으로 보아 분명 험상궂은 인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교수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억양이 적당한 그의 목소리에 적잖이 놀랐다. (…) 대령이 일어서자 물라토가 들고 있던 횃불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여자는 그의 시커먼 피부와 퓨마처럼 사나운 눈을 보았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 앞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벨리사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친 남자에게서 짙은 고독을 먼저 발견한다. 그녀가 대령을 사랑하게 된 건 횃불에 그의 고독이 드러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황량한 땅에 동생 넷을 묻고 홀로 기어코 살아남은 자신의 고독과 맛닿아 있는. 그녀는 대령의 명령대로 자신이 가진 말 중에서 “거칠고 무미건조한 말, 지나친 미사여구, 함부로 사용해서 퇴색된 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말, 진실이 결여된 말, 막연한 말”을 제외하고 “남자들의 속마음과 여자들의 심금을 확실히 울릴 수 있는 말”로 된 대통령 선거 유세문을 팔면서 “두 마디 말”을 선물했다.

   
  그녀가 그에게만 권리가 있는 비밀스러운 두 마디 말을 귀에 속삭일 때, 대령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산짐승 냄새와 그녀의 엉덩이가 발산하는 불타는 열기,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가공할 느낌, 박하향의 호흡을 느꼈다. “이 말은 당신의 것입니다, 대령님. 원하실 때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로지 대령만 사용할 수 있는 벨리사의 선물, 그 두 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 대령은 자신의 영혼 깊숙이 박힌 그 두 마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감각이 일제히 깨어나며” 벨리사가 떠올랐다. 이것은 사랑의 조짐이다. 벨리사는 대령에게 두 마디 말을 선물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 두 마디 말은 분명 그녀를 떠올리게 할 사랑의 주술일 텐데, 어쩌면 대령에게만 허락한 그녀 자신의 이름 ‘벨리사 크레푸스쿨라리오’일지도 모르겠다. 퓨마처럼 사나운 대령의 눈조차 온순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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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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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안에 또 하나의 삶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황홀한 독서였다.”

이것은 책과 읽는 행위에 바치는 정혜윤식 고백이다. 나에게 독서는 언제나 현실로 막막하게 놓여 있는 삶에서 현실과 멀찍이 떨어질 수 있는, 내 삶과는 달라야 하는 삶으로 옮겨 가 나의 현실에서 놓여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행동하지 않아도 내가 행동하는 것같이 생생하게, 그러나 현실의 물리적인 어려움, 곤란함, 당혹스러움, 고통은 건너뛴 채 ‘놀이’처럼 빠져들 수 있었다. 내가 아닌 책 속의 인물이 되는, 이 마법 같은 놀이는 다양한 놀이 중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행복한 놀이라고 완전히 착각할 뻔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내 앞에는 내가 직접 감당해야 할, 직접 행동해야 어떻게든 해결될 현실이 동그마니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몹시 허무했다. 나에게 책의 절실한 효용성은 그렇게 사라지고, 나는 좀더 다른 차원의 놀이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제3의 관객이 되었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 공감하기는 했지만 동화되지는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인물로 살지를 않으니 나의 잣대와 취향을 들이대고 깐깐하고 까탈스러워져 뒷말이 많아졌다.

앤 패디먼이 편집한 『Rereading』이라는 책이 있다. ‘다시 읽기’의 맛을 이야기하는 독서 에세이인데, 주로 ‘고전’이라 불림 직한 작품들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 된다. 같은 책이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원형을 간직한 별개의 고유한 책이 되는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을 다시 읽었을 때도 그렇다는 점이다. 그 점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읽어도 변함없을 것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 무엇보다 내가 변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축적해 가는 우리는 어제와, 어제보다 좀더 축적한 오늘과, 오늘보다 좀더 축적할 내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게 달라진 것이다.

나에게 ‘고전’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어둠침침한 학교 도서관의 빛바랜 양장본 전집이다. 다양한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거니와, 그 시절의 아이가 읽고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전에 고전이라면 학교 도서관에서 무조건 한 질 정도 구비해야 하고 또 읽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준 책은 대학 시절에 다시 읽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나어린 시절에는 베르테르의 일방적인 사랑이 답답하고 미련해 보여서 그리 긴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지막까지 읽어내기가 지리하기만 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된 베르테르의 이야기에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안타까운 호흡을 멈췄던 것 같다. ‘베르테르 효과’를 혹독하게 겪은 셈이랄까.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고전’의 범주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지금도 몹시 사랑하는 책이긴 하지만, 엘리자베스 구지의 『작은 백마』에는 그 시절만큼 열광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이 책을 통째로 삼켜서 외워버리고 싶었다. 이 책보다 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그때껏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메리웨더가 되지 못하고 그 용감하고 모험심 강한 꼬마 숙녀를 지켜보면서, 이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조금쯤은 추억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코 내 인생 최고의 책들 중 하나다.

정혜윤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어린 시절에 읽었거나 읽다 말았거나 읽었다고 착각하는 ‘고전’을 정혜윤식으로 읽어준다. 그녀는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뭔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이다”라는 말로 고전으로 다가가는 길을 연다. 황홀한 속삭임으로 그 길의 안내자를 자처하는 그녀는 친절하지만은 않다. 명확한 뜻의 단어들을 가지고 손에 잡힐 듯 말듯, 눈앞에 그려질 듯 말듯 모호한 문장들을 지어낸다. 프랑스 쇠이유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책을 어렵게 읽어가는 즐거움을 알려줘야 합니다. 독자들에게 책을 즉각 이해하지 못할 권리도 있다고 말해 줘야 합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는데도 부분만을 이해하면 어떻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완전히 이해하며 읽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읽어갑니다.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환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책을 고통스럽게 읽어낸 후의 (배우는) 즐거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문장들을 참아내며 읽는 것은 책에 관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이 들려줄 수 있는 방식이 분명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불평을 터뜨리는 것은 역시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일 텐데, 어쨌든 정혜윤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들려준 고전 이야기 덕분에 ‘다시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또다시 제대로 한 번 더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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