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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과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만으로도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편인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를 간직할 가치는 충분하다. 물론 다른 단편들도 고른 수준과 남미문학 특유의 정취를 유지해 만족감을 더욱 높여주지만, 이 두 편은 나를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이런 설렘에 사로잡힌 것은 얼마나 오랜만인지.
쿠바 작가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보여준다. 한 인간이 태어나 인간사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을 모두 견디며 차곡차곡 쌓아간 순행의 시간이 어느 한순간 역행하는 그 여행은 아찔하고, 허무하고, 경이롭다. 이 여행의 시작은 이렇다.
오랜 세월 뜨거운 햇빛에 마르고 스산한 비에 젖어들다가 쇠락한 대저택이 거침없이 철거되고 있다. 한때는 파티와 손님과 집안 식구 들로 북적였을 화려한 대저택이었을 것이다. 벽돌 하나, 장식 하나, 조각품 하나, 이 대저택을 이루었던 모든 것에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다. 소중하게 쓸고 닦고 윤내고 했을 대저택이 안타까움 한 자락 없이 무심하게 허물어지고 있는 철거 현장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잡석들이 널린 광경을 바라보며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코가 뭉개진 여신상 발치에. 그 여신상은 죽음의 운명을 관장하는 죽음의 여신 케레스. 철거를 중단한 채 인부들이 돌아간 폐허에 그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한다.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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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검은 네모난 대리석이 방바닥으로 날아올라 흙을 뒤덮었다. 돌멩이들은 정확히 튀어 올라 좁은 벽의 갈라진 틈을 메웠다. 징이 박힌 호두나무 문짝들이 문틀에 끼어들었고, 돌쩌귀의 나사들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다시 구멍 속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화단에서 자라나는 꽃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기왓장이 파편 조각들을 이어 맞추며 요란한 흙바람을 일으켰다가 빗물처럼 지붕의 뼈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품위 있게 옷을 차려입은 집은 다시 평소의 균형을 되찾으며 커져갔다. 케레스 여신상은 점차 회색빛이 가셨다. 분수에서는 더 많은 물고기가 헤엄쳤고, 졸졸대는 물의 속삭임은 잊혀진 베고니아를 다시 살려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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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역행은 처음에는 신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철거 인부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망치들 아래에 무심하게 헐려버릴 운명에 처했던 대저택이 순식간에 과거의 영광스러운 위용을 되찾은 것이다. 대저택의 주인인 후작 돈 마르시알이 자기 임종의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난 것이다. ‘죽음’이 ‘삶’이 되었다. 이때부터 필름을 빠르게 되감는 것처럼 대저택의 순간순간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된다. 죽음에서 벗어난 돈 마르시알의 생애도, 인간의 시간에 따라 마지막 시간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왔던 대저택의 경매, 샹들리에가 빛나는 파티,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 신학교, 아버지의 죽음, 장난감 밀랍 병정 등, 그 모든 기쁨과 슬픔, 영광과 몰락, 천진함과 본능적인 지각을 거꾸로 통과해 씨앗이 되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도 처음인 대지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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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깃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알로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연못 바닥에 비늘의 강설을 남기고 알로 응결됐다. 야자나무는 부채를 접듯 갈라진 잎을 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줄기들은 잎사귀들을 다시 빨아들였고, 대지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수했다. 천둥이 회랑에 울려 퍼졌다. 샤무아 가죽 장갑에서는 털이 자랐다. 양모 담요는 올이 풀려 멀리 있는 목장의 양털이 되었다. 밤이 오자 벽장과 장식장, 침대, 그리스도 수난상, 탁자, 블라인드는 밀림 가까이의 옛 근원을 찾아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못이 박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어디에 정박해 있는지 아무도 몰랐던 쌍돛 범선은 건물 바닥과 분수대의 대리석을 이탈리아로 실어 날랐다. 갑옷, 쇠붙이 연장, 열쇠, 구리 냄비, 마구간의 재갈은 녹아내려 지붕 없는 회랑을 통해 일렁이는 철의 강을 이루며 땅속으로 흘러갔다.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흙은 한때 집이 서 있던 자리에 황무지를 남기며 흙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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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죽음’에서 벗어났다가 곧 ‘죽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죽음’에서 ‘삶’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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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철저히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든 숨구멍을 통해 우주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단지 흐릿하고 거대한 형체들밖에 분간할 수 없는 눈을 감았고, 어둠 가득한, 뜨겁고 축축한, 죽어가는 몸뚱이 속으로 들어갔다. 죽은 몸뚱이의 물질에 싸였음을 느꼈을 때 그는 삶을 향해 미끄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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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은 양극단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깨를 겯고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다음 생에는……’이라고 늘 환생을 가정하는 우리의 버릇에도 배어 있다. 완전한 죽음에서 비로소 삶이 잉태된다. 삶의 마지막도, 그리하여 다시 시작도 죽음이다. 역행하던 시간도 비로소 멈춰 대저택의 빈터는 누군가의 역사로 새로운 시간을 순행할 것이다. (이 단편의 문장 하나하나는 조각 퍼즐처럼 꽉 짜여서 맨 뒷문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가면 대저택과 돈 마르시알의 생애를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이 단편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리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해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이자 칠레 작가인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은 말의 힘을 보여주는, 정말이지 최고의 단편이다. 말의 힘이라고 하면,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알마시가 사랑한 캐서린이 한 말이 떠오른다.
캐서린은 말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어느 사막의 밤, 그녀는 남편 제프리와 자신, 그리고 알마시를 칸다울레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의 시종 기게스와 동일시하면서 가이어스가 캔덜루스 왕을 죽이고 왕비를 차지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 한 부분을 읊는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음성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말에 사로잡힌 듯 그녀와의 위태로운 사랑에 빠져든다.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꽤 오래도록 그 말의 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질지니! 그 힘은 어쩌면 말 자체가 아니라 말에 담긴 진심이나 기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 자체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얼마든지 번드르르하게 포장될 수 있으니.
「두 마디 말」에서는 벨리사(Belisa, Isabel의 애너그램, 그리하여 작가의 분신)가 말(言)을 판다. 판에 박힌 말, 포장된 말, 가식적인 말, 위선적인 말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리하여 “세상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자신만의 말”을. 그녀는 불순한 의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말의 힘을 알았고 또 믿었다. 어느 날, 벨리사가 파는 말을 사려는 대령이 수하를 보내어 그녀를 납치하듯 거칠게 데려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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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온 나라가 벌벌 떠는 두려움의 대상인 한 남자가 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해먹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얼굴 위에 무성한 나뭇잎의 흐릿한 그림자와 불한당으로 살아온 긴 세월의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구의 부관이 쩔쩔매며 다가가는 것으로 보아 분명 험상궂은 인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교수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억양이 적당한 그의 목소리에 적잖이 놀랐다. (…) 대령이 일어서자 물라토가 들고 있던 횃불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여자는 그의 시커먼 피부와 퓨마처럼 사나운 눈을 보았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 앞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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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친 남자에게서 짙은 고독을 먼저 발견한다. 그녀가 대령을 사랑하게 된 건 횃불에 그의 고독이 드러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황량한 땅에 동생 넷을 묻고 홀로 기어코 살아남은 자신의 고독과 맛닿아 있는. 그녀는 대령의 명령대로 자신이 가진 말 중에서 “거칠고 무미건조한 말, 지나친 미사여구, 함부로 사용해서 퇴색된 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말, 진실이 결여된 말, 막연한 말”을 제외하고 “남자들의 속마음과 여자들의 심금을 확실히 울릴 수 있는 말”로 된 대통령 선거 유세문을 팔면서 “두 마디 말”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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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에게만 권리가 있는 비밀스러운 두 마디 말을 귀에 속삭일 때, 대령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산짐승 냄새와 그녀의 엉덩이가 발산하는 불타는 열기,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가공할 느낌, 박하향의 호흡을 느꼈다. “이 말은 당신의 것입니다, 대령님. 원하실 때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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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대령만 사용할 수 있는 벨리사의 선물, 그 두 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 대령은 자신의 영혼 깊숙이 박힌 그 두 마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감각이 일제히 깨어나며” 벨리사가 떠올랐다. 이것은 사랑의 조짐이다. 벨리사는 대령에게 두 마디 말을 선물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 두 마디 말은 분명 그녀를 떠올리게 할 사랑의 주술일 텐데, 어쩌면 대령에게만 허락한 그녀 자신의 이름 ‘벨리사 크레푸스쿨라리오’일지도 모르겠다. 퓨마처럼 사나운 대령의 눈조차 온순하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