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삶 안에 또 하나의 삶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황홀한 독서였다.”

이것은 책과 읽는 행위에 바치는 정혜윤식 고백이다. 나에게 독서는 언제나 현실로 막막하게 놓여 있는 삶에서 현실과 멀찍이 떨어질 수 있는, 내 삶과는 달라야 하는 삶으로 옮겨 가 나의 현실에서 놓여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행동하지 않아도 내가 행동하는 것같이 생생하게, 그러나 현실의 물리적인 어려움, 곤란함, 당혹스러움, 고통은 건너뛴 채 ‘놀이’처럼 빠져들 수 있었다. 내가 아닌 책 속의 인물이 되는, 이 마법 같은 놀이는 다양한 놀이 중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행복한 놀이라고 완전히 착각할 뻔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내 앞에는 내가 직접 감당해야 할, 직접 행동해야 어떻게든 해결될 현실이 동그마니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몹시 허무했다. 나에게 책의 절실한 효용성은 그렇게 사라지고, 나는 좀더 다른 차원의 놀이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제3의 관객이 되었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 공감하기는 했지만 동화되지는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인물로 살지를 않으니 나의 잣대와 취향을 들이대고 깐깐하고 까탈스러워져 뒷말이 많아졌다.

앤 패디먼이 편집한 『Rereading』이라는 책이 있다. ‘다시 읽기’의 맛을 이야기하는 독서 에세이인데, 주로 ‘고전’이라 불림 직한 작품들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 된다. 같은 책이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원형을 간직한 별개의 고유한 책이 되는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을 다시 읽었을 때도 그렇다는 점이다. 그 점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읽어도 변함없을 것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 무엇보다 내가 변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축적해 가는 우리는 어제와, 어제보다 좀더 축적한 오늘과, 오늘보다 좀더 축적할 내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게 달라진 것이다.

나에게 ‘고전’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어둠침침한 학교 도서관의 빛바랜 양장본 전집이다. 다양한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거니와, 그 시절의 아이가 읽고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전에 고전이라면 학교 도서관에서 무조건 한 질 정도 구비해야 하고 또 읽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준 책은 대학 시절에 다시 읽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나어린 시절에는 베르테르의 일방적인 사랑이 답답하고 미련해 보여서 그리 긴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지막까지 읽어내기가 지리하기만 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된 베르테르의 이야기에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안타까운 호흡을 멈췄던 것 같다. ‘베르테르 효과’를 혹독하게 겪은 셈이랄까.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고전’의 범주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지금도 몹시 사랑하는 책이긴 하지만, 엘리자베스 구지의 『작은 백마』에는 그 시절만큼 열광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이 책을 통째로 삼켜서 외워버리고 싶었다. 이 책보다 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그때껏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메리웨더가 되지 못하고 그 용감하고 모험심 강한 꼬마 숙녀를 지켜보면서, 이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조금쯤은 추억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코 내 인생 최고의 책들 중 하나다.

정혜윤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어린 시절에 읽었거나 읽다 말았거나 읽었다고 착각하는 ‘고전’을 정혜윤식으로 읽어준다. 그녀는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뭔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이다”라는 말로 고전으로 다가가는 길을 연다. 황홀한 속삭임으로 그 길의 안내자를 자처하는 그녀는 친절하지만은 않다. 명확한 뜻의 단어들을 가지고 손에 잡힐 듯 말듯, 눈앞에 그려질 듯 말듯 모호한 문장들을 지어낸다. 프랑스 쇠이유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책을 어렵게 읽어가는 즐거움을 알려줘야 합니다. 독자들에게 책을 즉각 이해하지 못할 권리도 있다고 말해 줘야 합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는데도 부분만을 이해하면 어떻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완전히 이해하며 읽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읽어갑니다.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환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책을 고통스럽게 읽어낸 후의 (배우는) 즐거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문장들을 참아내며 읽는 것은 책에 관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이 들려줄 수 있는 방식이 분명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불평을 터뜨리는 것은 역시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일 텐데, 어쨌든 정혜윤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들려준 고전 이야기 덕분에 ‘다시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또다시 제대로 한 번 더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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