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미쳤어요
윌리엄 사로얀 / 여울기획 / 1992년 10월
평점 :
절판


여기는 서울, 헌책방에서 우연히 2000원에 구한 3500원짜리 윌리엄 사로얀의 『아빠 미쳤어요』에는 ‘해남공공도서관’이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남쪽 땅끝 마을 해남의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었을, 이 사랑스러운 책이 어쩌다가 한참 북쪽에 있는 내 눈에 띄었을까?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가져온 해남에 살았던 누군가도 우연히 이 책을 읽고 차마 돌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누구인들 그러지 않으랴.) 그리하여 내가 헌책방에서 집어 들기까지 이 책의 고마운 여행이 시작됐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테지만, 그 누군가는 조마조마 심장이 벌떡이는 시간을 견뎠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책을 떠나보냈을까? 그 사연이 궁금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어도, 이 책은 이제 나에게 닿았다.

소설가 아빠와 어쩌면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는 열 살 아들 피트의 이야기다. 아이의 해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여름날 피트의 열 살 생일부터 다음 새해를 맞기까지 아빠와 아들이 함께 있는 이 풍경 속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그들의 대화다. 특별히 예쁘고 근사한 말로만 치장한 것도 아닌데, 아들이 질문하고 아빠가 아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대답하는 언어들은 참 아름답다. 쉽고 단순하고 소박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문장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덕지덕지한 문장들이 감히 가닿을 수 없는 깊이로 마음에 점점이 스며든다. 그런데도 지금 그럴싸한 단어들을 골라 더욱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려고 머리를 굴리는 내가 부끄럽다. 이런 방식은 윌리엄 사로얀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은 잘 안다. 내 말은 힘이 없어 단단한 심지를 지닌 그의 순수한 말 앞에서 덧없이 바스러진다는 것도. 그러나 이렇게라도 지금 나의 벅찬 느낌을 남겨두고 싶은 나를 용서하라.

소설가 아빠는 생일날 피트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을 쓸 줄 모른다는 피트에게 소설은 “네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하루하루의 ‘나 자신’에 대해 쓰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란다. 아빠의 그 말은 “어떤 것이라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똑같은 물건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고 보다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고, 또 그 말은 “세계를 이해하는 힘”을 의미하고, 또 그 말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로 이어진다. 피트는 자기 세계 안에서 자기 언어로 묻는다. 아빠는 피트의 어떤 물음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정성껏 대답한다. 그 대답은 피트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피트가 자기 물음의 답을 직접 찾을 수 있도록 이끈다. 아빠의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고, 피트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곧 자기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아빠는 대견하게도 피트가 스스로 찾은 답을 긍정해 주되, 그 답의 이면을 살펴 피트의 세계를 조금씩 넓힌다. 아빠는 피트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싶게 만든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인데, 사랑하면 그에 대해 끝도 없이 말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피트의 소설은 피트 자신에게서 무한히 확장되어 그의 것으로 가진 세상을 담아 그만의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그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또한 깊어질 것이다. 그래서 생은 언제나 감동할 만한지도. 꾸밈도 허식도 없는 단순한 문장에 깊고 많은 의미를 담아 만들어낸 이야기는 참으로 소박하지만, 그 이야기가 주는 감동적인 여운은 참으로 경이롭고 눈부시고 따뜻하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세계에 대한 이해로 통하고 그게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퍼져 나가 결국은 자신의 생과 다른 모든 생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살아 있지 않으면 그건 정말 쓸쓸할 것”이라는 것, 이 당연한 진실을 왜 그리도 자주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피트처럼 나를, 세계를, 세상 사람들을 제대로 관찰하고,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구하는 일을 게을리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피트의 ‘아빠’가 되어줘야 할 이 시점에 피트의 마음과 시선도 가지지 못했으니, 한때 그런 마음과 시선을 가진 시절도 있었을 테지만 이젠 잃어버린 것 같으니 어떡하나. 그래도 살아 있으니 어떻게든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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