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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소녀
빅토리아 포레스터 지음, 황윤영 옮김, 박희정 그림 / 살림Friends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고물에 욕심을 부리다가 알맹이를 놓칠 줄 알았다. 책을 선택할 때는 되도록 내용에만 관심을 두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외의 것들에 욕심이 난다. 빅토리아 포레스터의 『하늘을 나는 소녀』는 소설 자체보다 ‘박희정’이라는 각별하게 아끼는 이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고른 책이라면 믿을 만하지’라고 내 선택에 대한 책임도 조금은 덜어놓았다. 박희정의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출판사의 상술에 사기당했다! 이보다 더 황망하고 실망스럽고 급기야 기분이 나빠질 수 있을까.
“『호텔 아프리카』 만화가 박희정의 신비로운 그림(※띠지)” “이 책의 표지와 본문 안의 그림은 따뜻한 색감과 섬세한 그림체로 ‘순정만화의 신(神)’이라고까지 불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만화가 박희정이 작업했다. 만화가 박희정이 그린 하늘을 나는 소녀 파이퍼의 모습은 작품이 주는 감동의 한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출판사 리뷰).” 표지 그림 말고 책 안에도 삽화가 여러 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심하게 애매모호한 문구로 박희정을 팔아 독자 몇몇을 속이면 출판사는 얼마나 큰 이득을 챙길까? 정말이지, 지나치게 심했다. 혹시라도 박희정에 의지해 이 책을 고르는 사람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반감을 가진 채 『하늘을 나는 소녀』를 읽기 시작했으니 내 시선이 고울까?
어쨌거나 『하늘을 나는 소녀』의 알맹이에 관해 좀 이야기해야겠다. 이 소설에는 일반적인 보통 인간의 능력 이상을 가진, 한마디로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날거나, 투시를 하거나, 염력을 쓰거나, 몸을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거나, 해일을 일으키고 뇌우를 부리거나, 강력한 전기를 발산하거나, 상상 불가능한 속도로 달리거나, 상상 불가능한 힘이 있거나, 치유 능력이 있거나, 투명 인간이 될 수 있거나, 천재 중의 천재이거나. 영화 『엑스맨』 같은 구태의연한 설정에 익숙한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자칫 방심하면 나도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다수자의 오만한 횡포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운다.
상식적인(이 시선도 역시 다수자의 횡포!) 능력 안에서 자기 이권을 최대한 다투며 살아가는 보통 인간이 다수자로 군림하는 세계에서 초능력자의 비극은 그들이 극히 소수라는 데 있다. 다수이므로 자신들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세상의 기준이고 정답이라는 생각을 하는 다수자는 그것에 어긋나는 소수의 무엇도 참아내지 못한다. 성적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등 사회 전반에 소수자로 존재하면서 편견 어린 시선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초능력자도 포함된다.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책이나 만화, 영화를 보면 그들은 대개 실험 대상으로 필요에 따라 쓰이다가 그 필요가 사라지면 버려진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경이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그것을 압도한다. 초능력자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단지 다수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늘을 나는 소녀』에서 리티샤 헬리언 박사는 줄곧 ‘옳지 않아’, ‘위험해’를 주술처럼 되뇌며 초능력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비밀 연구소에 가두어 그 아이들의 정체성인 초능력을 없애기 위해 잔혹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도 상관없다. 초능력을 갖고 있으면 세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분자다. 여기에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도 포함된다. 장미이긴 한데 뾰족한 이빨이 있는 향기로운 장미, 기린은 분명한데 은빛 반점이 햇빛보다 더 밝게 발광하는 기린, 귀뚜라미이긴 한데 평생에 딱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귀뚜라미도 제 능력 이상의 ‘능력’을 소멸시켜야 하는 ‘갱생’의 대상일 뿐이다. 헬리언 박사는 이 소설에서 다수의 모습을 극대화한 사람이지만, 이것은 (이 소설의 도입에서) 보통 아이와 달리 하늘을 날 줄 알았던 파이퍼를 숨기려 했던 매클라우드 부부도, 파이퍼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밀리 메이 부인과 그 아이들도, 천재 중의 천재인 아들 콘래드를 두려워하여 제 자식을 버린 헤링턴 부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매클라우드 부부는 파이퍼의 하늘을 나는 능력이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다. 신의 섭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신의 섭리가 다수의 오만한 중론이 아님은 분명코 알겠다. 신의 섭리는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편견 없이 아우르며 개체마다 순수한 존재 가치를 부여해 주는 무엇이 아닐까. 소수자들이 연대를 형성하지 않고도 상처 입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다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