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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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소설가들이 들으면 섭섭해할 이야기겠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는 소설 무용론자다. 대학 때 주로 읽었던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읽고 싶은 책만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최소한의 근본적인 교양을 갖추기 위해 고전을 읽는 것 말고는 최신 잡지와 학술지를 권하는 그의 모습은 고양이 빌딩의 수많은 장서 중에 소설책이 없다는 것과 『지식의 단련법』이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등에서 제시하는 자신의 독서 방법은 오로지 아웃풋을 목적으로 한 것이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다 쳐내버리고 전투를 하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다치바나 다카시식의 독서론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적용하기는 힘들다. 허구보다는 현실적인 것이 실용적이라고 말하는 다치바나 다카시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세계가 얼마나 사람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는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도된 듯한 발언들은 자신에 대한 다짐과 가벼운 것만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知)의 정원』은 이런 다치바나 다카시와 일본의 괴짜 논객인 사토 마사루가 만나 자신들의 독서론, 인생론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사유하는 것을 담은 대담집이다. 독서로 단련된 두 사람의 대담답게 독서에 관한 본질적인 이야기는 물론 인생, 종교, 철학, 과학 등을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두 독서가의 날 선 토론을 기대했지만 워낙 여러 분야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심도 깊은 토론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아울러 수많은 독서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힘든 우익적 성향을 가진 사토 마사루를 보고 있으니 교양, 지식과 정치적 성향은 전혀 별개일 뿐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지(知)의 정원』에서는 자신들의 서재에서 각 100권, 판매되고 있는 책들 중에서 100권씩 교양을 쌓기 위해 추천하는 책을 400권이나 소개하고 있어 목록만 훑어보아도 배부르다. 게다가 소개하는 책들에 두 사람의 짧은 소개글이 함께 있어 이것을 살펴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하지만 이런 독서 전문가-이런 사람들에게는 독서 전문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 하다-들이 소개하는 책들이라니, 보기만 해도 어렵고 생소한 책들은 물론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책들도 많다. 이것을 보니 무엇보다 부러운 점은 일본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꾸준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인구나 출판시장의 규모 같은 차이점이 있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그만큼 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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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펀치
엘모어 레너드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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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출간되는 유명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의 원작 소설의 우울한 운명이라면 책의 홍보에 작가보다는 영화에 관련된 것들이 더 홍보된다는 점이다. 작가의 이름보다는 영화감독의 이름, 책의 제목보다는 영화제목을 더욱 부각시키게 되는데 엘모어 레너드의 『럼 펀치』 역시 마찬가지다. “하드보일드의 거장이자 펄프 픽션의 제왕”이라 불리는 엘모어 레너드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에는 밀려 버렸다. 펄프픽션(Pulp Fiction)-이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의 동명 영화가 있다-은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싸구려 소설 잡지를 부르는 말로 잡지가 값싼 갱지(Wood Pulp Paper)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펄프(Pulp)"란 이름이 붙었으며, 펄프 매거진에 실린 소설 또는 잡지 자체를 펄프 픽션(Pulp Fiction)이라 부른다. 우리말로 이야기한다면 싸구려 잡지소설 정도가 될까? 주로 추리물, SF,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소설들이 많았다고 하니, 최근에야 바뀌고 있지만 외국 역시 장르소설에 대한 인식은 가볍게 읽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었나 보다.

미모의 항공기 승무원인 재키 버크는 무기 밀매업자인 오델의 무기판매대금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운반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한다. 오델의 5만 달러를 가지고 입국하던 재키는 거액과 코카인 소지죄로 체포되게 되고 오델은 보석금을 내고 재키를 풀어주게 된다. 하지만 재키는 풀려난 뒤 범죄자 오델에게는 50만 달러 밀반입 제의를, 자신을 체포한 수사관 레이에게는 오델을 체포하는 대신 자신의 죄를 없애줄 것을 원하는 거래를 제의한다. 재키는 50만 달러도 가로채고 자신의 죄를 없애려는 거대한 규모의 계획을 실행한다.

『럼 펀치』는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소설이 쓰인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느낌은 희박하다. 엘모어 레너드의 글쓰기 10가지 원칙에 입각해 서술을 최대한 생략해 간결하게 하고 생생한 대사와 분위기만으로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가의 능력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닌 보여주는 것처럼 읽히는 이 책은 영화화 되는 것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의 광고만 보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에 끌려 영화도 보려고 계획했다면 반드시 『럼 펀치』를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영상의 이미지는 꽤나 강렬해서 등장인물의 얼굴이나 느낌이 자꾸 떠올라 책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다.

출판사에서는 당시의 펄프픽션을 재현하려 한 듯 갱지 스타일의 종이로 책을 만들었지만 글꼴의 크기가 꽤 작아 사람에 따라 읽기가 불편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갱지 스타일과 작은 글꼴 둘 다 좋아해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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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 짐 매드 픽션 클럽
크리스티안 뫼르크 지음, 유향란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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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까? 그에게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그에게로 이끌리는 심장을 멈추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뫼르크의 『달링 짐』을 읽는 내내 그 도리 없는 물음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이 소설을 읽을 즈음 아예 「나쁜 남자」라는 드라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홍태라(오연수 역)는 심건욱(김남길 역)이 위험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의식하게 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고 만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든, 진짜든, 가짜든, 어떤 욕심이 개입되어 있든, 어쨌든.

‘나쁜 남자’에게 매혹될 때, 여자는(얼마나 통상적인지 모르겠다. 그저 무수한 여자 가운데 한 여자인 내 생각일 뿐이지도) 그 남자의 ‘나쁜’ 겉모습 이면에 깊숙이 숨겨진, 그를 나쁜 남자일 수밖에 없게 만든 ‘상처’와 ‘따뜻한 진심’을 믿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그의 진심에 홀로 가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나쁘지만 진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완벽한 악의 화신이라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를 향한 첫 끌림은 머지않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용감하다면 분노로 이어질 것이다.

『달링 짐』에는 그런 여자들의 믿음을 착각으로 배신하는, 완벽한 ‘나쁜 남자’와 자신의 믿음을 송두리째 배반당한 세 자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이모가 등장한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소설은 이모와 조카 사이로 밝혀진 세 여인의 처참한 죽음을 처음부터 들이밀고, 짙은 핏줄로 이어진 혈연인데도 그들이 왜 서로를 증오하며 죽이는 지경에까지 몰렸는지를, 두 자매의 시선으로 쓰인 비망록 두 권과 그중 한 권의 비망록을 우연히 발견한 우편배달부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를 교차하여 서서히 드러낸다. 그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나쁜 남자’가 있다.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이름은 짐이다. 그에게 매혹된 사람은 그를 ‘달링 짐’이라고 부른다.

대체 짐이 어떤 남자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을 사로잡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짐은 이렇게 묘사된다. 세 자매 중 큰언니인 피오나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탄탄한 몸매에 가죽 재킷을 입고 빨간 오토바이를 탄 잘생긴 그를 처음 마주쳤던 때를 회상한다. 그의 “황갈색 눈의 캄캄한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고, “파멸, 격정, 그리고 유혹을 하나로 합친 말이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는 힘”으로 유혹했다고. 게다가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 ‘샤너시’다. 이야기라는 너무나 강력한 마법까지 부리는. 짐이 하필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는 태곳적부터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가장 내밀한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는 미풍에 날렸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깃털처럼 그 영혼에 가닿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남자다. 그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이야기의 마력을 실어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짐이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들려준 아일랜드 전설 ‘늑대가 된 에원 왕자’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그로테스크하고 비밀스럽고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데, 이 전설은 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짐이 머무르는 자리마다 피비린내가 난다는 것을 피오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쌍둥이 동생 중 아오이페도, 돌연 젊음을 되찾기 시작한 모이라 이모도,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신참내기 경찰관 브로나도 이미 그에게 사로잡힌 뒤 너무나 뒤늦게 말이다. 아오이페와 브로나는 역시 뒤늦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짐의 본성을 깨닫지만, 짐에 대한 모이라 이모의 열정은 결코 사그라질 줄 모른다. 마치 기괴한 오라에 둘러싸인 사이비 교주를 향한 맹목적인 신도의 광기처럼. 그리하여 조카들을 대상으로 짐을 위한 복수극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달링 짐은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큼 멋진 외모, 그 아래에 도사린 어두운 영혼이 경고하는 위험의 유혹, 거기에 모두를 단번에 자신에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언변까지 여자를 매혹시키는 무기를 모두 장착했다. 그것은 ‘무기’가 틀림없다. 여자를 유혹하되, 그건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니라 여자의 피와 돈푼이 목적이므로. 그러니 여자들이여, 부디 나쁜 남자를 경계하라.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그의 진심을 안다고 교만한 오만에 사로잡히지 마라. 모범 답안 같은, 일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착한 남자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적어도 그는 두 정체성으로 여자를 시험하거나 조롱하지는 않는다. 그의 진심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니까 믿어도 좋다.


ps.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천명관의 『고래』가 떠올랐다. 독자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작가의 이야기에 휘말렸다가, 또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이야기 밖으로 털썩 내던져져서 홀로 망연자실해지는 기분이 『고래』를 읽은 이후 또다시 들었다. “그래서?”에 대한 답을 작가에게서도 듣지 못하고 스스로도 찾지 못할 것 같은 아찔한 아득함을 어떡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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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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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심이 많거나 여행기를 많이 접해본 독자라면 이야기와 사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유명장소를 찍은 사진 몇 컷에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하고 끝내버리는 관광책자같은 부실한 여행기들을 읽다 분통이 터진 독자라면 후지와라 신야라는 이름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여행기는 현지의 삶을 몸으로 느끼며 진지하게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필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이 기존의 여행기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접해본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황천의 개』와 같은 여행기들이 무겁고 진중한 주제의식과 여행지에서의 삶과 죽음을 관조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풀어내려 했다면 이 책은 저자가 말한 대로 ‘여행의 원석을 독자들 앞에 그대로 내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여행기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작가의 솔직한 감정과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내놓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는 단순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피해왔지만 『여행의 순간들』에서는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젊은 날의 치기와 무모함,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여행자를 기준으로 여행 본연의 원초적인 느낌을 살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 어찌 보면 이제야 여행기 같은 느낌이 더 든다고 해야 할 듯싶다.

『여행의 순간들』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로는 잡지에 연재가 되었던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GEO’와 ‘PLAYBOY’에 연재되었던 이 여행기들은 작가가 연재를 시작하며 “짧은 문장으로 여행을 묘사할 것, 사실에 입각해서 최대한 단순하고 즉물적인 에피소드로 꾸밀 것”이라는 콘셉트를 정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덕분에 기존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들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글들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여행기는 낯설지 않다. 평생을 방랑해 온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라고 하면 놀랍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잡지를 통한 콘셉트 때문이라고 했지만 후지와라 신야 자신도 역시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여행은 떠나지 않았을 때는 환상이고 즐거움이지만 직접 발을 디디게 되면 현실이 된다. 어느덧 노년이 된 오랜 방랑자의 자취를 따라 그의 독특한 느낌의 사진과 솔직한 여행기를 읽다 보면 단순한 경험에서도 삶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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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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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종교(유일신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장점 하나를 꼽아본다면 특정 장르의 영화나 책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신이나 종교에 관련된 논쟁에서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리처드 도킨스를 읽는 것과 특정 종교의 바이블을 읽는 것에 큰 차이점이 없지만 나 역시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주의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종교가 적극적일수록 회의주의적인 입장 역시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는 1985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린 칼 세이건의 기퍼드 강연을 정리한 책으로 신에 대한 과학적 성찰, 과학과 종교의 화해의 길을 모색한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보편성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과학을 끌어들인다. 종교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나올 주제인 창조설과 진화론의 이야기가 가장 좋은 예다. 종교적인 신화에 과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 종교와 과학이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학은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칼 세이건 역시 과학적 범신론은 인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종교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증거와 논리를 통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칼 세이건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종교와 신이 갖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미신이나 기적 같은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UFO를 예로 들며 증거를 검토한 뒤 갖는 회의주의적인 입장에 대해서 반대 증거(실제로 UFO가 나타나는 것)가 나타난다면 자신이 망신거리가 되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과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완전하게 부정하지 않지만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을 의심하는 것은 과학자의 당연한 의무기 때문이다. 유일신을 믿는 빅뱅 이론 과학자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관으로의 신을 인정하는 것과 과학적인 입장에서 신을 인정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종교와 과학이 열린 마음으로 공감을 나누어 지적 수렴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이 책 역시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읽기에는 굉장히 거북하거나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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