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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 짐 ㅣ 매드 픽션 클럽
크리스티안 뫼르크 지음, 유향란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왜 여자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까? 그에게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그에게로 이끌리는 심장을 멈추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뫼르크의 『달링 짐』을 읽는 내내 그 도리 없는 물음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이 소설을 읽을 즈음 아예 「나쁜 남자」라는 드라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홍태라(오연수 역)는 심건욱(김남길 역)이 위험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의식하게 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고 만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든, 진짜든, 가짜든, 어떤 욕심이 개입되어 있든, 어쨌든.
‘나쁜 남자’에게 매혹될 때, 여자는(얼마나 통상적인지 모르겠다. 그저 무수한 여자 가운데 한 여자인 내 생각일 뿐이지도) 그 남자의 ‘나쁜’ 겉모습 이면에 깊숙이 숨겨진, 그를 나쁜 남자일 수밖에 없게 만든 ‘상처’와 ‘따뜻한 진심’을 믿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그의 진심에 홀로 가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나쁘지만 진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완벽한 악의 화신이라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를 향한 첫 끌림은 머지않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용감하다면 분노로 이어질 것이다.
『달링 짐』에는 그런 여자들의 믿음을 착각으로 배신하는, 완벽한 ‘나쁜 남자’와 자신의 믿음을 송두리째 배반당한 세 자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이모가 등장한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소설은 이모와 조카 사이로 밝혀진 세 여인의 처참한 죽음을 처음부터 들이밀고, 짙은 핏줄로 이어진 혈연인데도 그들이 왜 서로를 증오하며 죽이는 지경에까지 몰렸는지를, 두 자매의 시선으로 쓰인 비망록 두 권과 그중 한 권의 비망록을 우연히 발견한 우편배달부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를 교차하여 서서히 드러낸다. 그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나쁜 남자’가 있다.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이름은 짐이다. 그에게 매혹된 사람은 그를 ‘달링 짐’이라고 부른다.
대체 짐이 어떤 남자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을 사로잡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짐은 이렇게 묘사된다. 세 자매 중 큰언니인 피오나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탄탄한 몸매에 가죽 재킷을 입고 빨간 오토바이를 탄 잘생긴 그를 처음 마주쳤던 때를 회상한다. 그의 “황갈색 눈의 캄캄한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고, “파멸, 격정, 그리고 유혹을 하나로 합친 말이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는 힘”으로 유혹했다고. 게다가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 ‘샤너시’다. 이야기라는 너무나 강력한 마법까지 부리는. 짐이 하필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는 태곳적부터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가장 내밀한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는 미풍에 날렸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깃털처럼 그 영혼에 가닿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남자다. 그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이야기의 마력을 실어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짐이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들려준 아일랜드 전설 ‘늑대가 된 에원 왕자’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그로테스크하고 비밀스럽고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데, 이 전설은 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짐이 머무르는 자리마다 피비린내가 난다는 것을 피오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쌍둥이 동생 중 아오이페도, 돌연 젊음을 되찾기 시작한 모이라 이모도,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신참내기 경찰관 브로나도 이미 그에게 사로잡힌 뒤 너무나 뒤늦게 말이다. 아오이페와 브로나는 역시 뒤늦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짐의 본성을 깨닫지만, 짐에 대한 모이라 이모의 열정은 결코 사그라질 줄 모른다. 마치 기괴한 오라에 둘러싸인 사이비 교주를 향한 맹목적인 신도의 광기처럼. 그리하여 조카들을 대상으로 짐을 위한 복수극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달링 짐은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큼 멋진 외모, 그 아래에 도사린 어두운 영혼이 경고하는 위험의 유혹, 거기에 모두를 단번에 자신에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언변까지 여자를 매혹시키는 무기를 모두 장착했다. 그것은 ‘무기’가 틀림없다. 여자를 유혹하되, 그건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니라 여자의 피와 돈푼이 목적이므로. 그러니 여자들이여, 부디 나쁜 남자를 경계하라.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그의 진심을 안다고 교만한 오만에 사로잡히지 마라. 모범 답안 같은, 일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착한 남자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적어도 그는 두 정체성으로 여자를 시험하거나 조롱하지는 않는다. 그의 진심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니까 믿어도 좋다.
ps.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천명관의 『고래』가 떠올랐다. 독자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작가의 이야기에 휘말렸다가, 또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이야기 밖으로 털썩 내던져져서 홀로 망연자실해지는 기분이 『고래』를 읽은 이후 또다시 들었다. “그래서?”에 대한 답을 작가에게서도 듣지 못하고 스스로도 찾지 못할 것 같은 아찔한 아득함을 어떡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