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전혀 다른 두 분야의 전문지식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지은이의 말 중..
2.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하려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돼지는 더욱 ‘더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돼지가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실제 몸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이론에도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돼지의 본성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중..
3.
사회가 인간을 야수화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전통적인 계략이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계략은, 가장 야수적인 이난에게 음식이나 위안이나 신체적 건강을 상으로 주어, 인간의 야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계략은, 가장 야수적인 인간에게 가장 큰 성적인 보상이나 성적인 특권을 주어 야수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계략 가운데 후자가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음식이나 위안이나 건강 등을 박탈할 경우 군사적으로는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중략)..성은 인간을 야수화하는 데 좋은 보강제이다. 성의 박탈은 투쟁력을 감퇴시키기보다는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4.
우리는 경찰력과 군사력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육체적인 힘에 의존하는 전투술을 배제하고 보다 개선된 전투술을 개발해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고, 경찰력과 군사력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희망하자. 순수한 성혁명의 결과가 핵미사일 부대장이나 핵 부대 사령관직을 남성 아닌 여성이 장악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원시 야노마모족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별로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3,4 ‘미개족의 남성’ 중..
5.
형제의 우애가 친구간의 우정관계 속에서 양쪽 중 어느 한편이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 해서 그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나 친구간의 우정에 금이 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중략)..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한쪽이 주는 것 없이 계속 받기만 한다면, 시혜자는 무언가 빼앗기고만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나 관대하다는 말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속기를 잘하는 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
우리가 사실 그대로 호혜성의 원칙이 실제 어떤 식으로 준수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화폐가 없고 매매가 전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에서 살아봐야 한다. 호혜성이란 정확한 계산이라든지,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사고와는 정반대되는 사고이며, 사실 누군가가 실제로 어떤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고이다. 혹자는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말하는지 안하는지에 따라서, 생활방식이 호혜성에 기초하고 있는지 혹은 그밖에 어떤 기준에 기초하고 있는지 말할 수 있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평등주의적 사회에서는 물품이나 용역을 제공받았다 해서 공개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로 여겨진다. 중부 말라야의 세마이족들 사이에서는 사냥물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냥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마이족과 같이 살아온 로버트 덴탄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은 받는 사람이 자기가 받은 고기의 크기를 분명히 계산하고 있거나, 받는 사람이 주는 사냥꾼의 성공이나 관대함에 놀라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주 무례한 태도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7.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고기와 기름을 지닌 소였다. 리 교수는 부시멘 친구들에게 다가가 이소가 이 정도면 살찐 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좋소, 물론 우리는 이 수소가 굉장히 좋은 고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한 젊은이가 많은 사냥감을 잡게 될 때에 자신을 마치 대인이나 추장같이 여기게 되죠. 그리고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자기의 종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오.”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만심이 언젠가 그로 하여금 누군가를 죽이게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가 잡아온 고기가 별 쓸모없다고 해주지요. 그래야만 그의 심장은 식게 되고, 겸손해지게 되지요.”
8.
호혜성 경제란 초과생산을 향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오히려 한 집단의 생존에 역효과를 나타내는 자연조건에 우선적으로 적응하려는 교환경제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조건들은 서식지내의 동식물의 자연적 고동체가 얼마만큼 생동력이 있는가 하는 그 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생존해나가고 있는 에스키모족이나 세마이족, 부시멘족과 같은 사냥과 채집을 주로 생계수단으로 하는 부족 가운데서 발견되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냥꾼들이 어느 한 시기에 모든 노력을 집약하여 더 많은 동물과 식물들을 남획하게 되면, 그들의 서식지 내의 식량공급능력은 영원히 상실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9.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는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면서도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명예가 수여되었다. 자기들의 재산이 보다 안전하게 되자 자본주의 상류계급들은 흥청망청 무절제한 소비와 낭비를 하여 경쟁자들의 기를 꺾었다...(중략).. 그동안 중하류 계급들은 아직도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절약적인 사람들에게 최고의 명예를 돌렸고, 모든 형태의 흥청망청 소비하는 낭비형태에 냉엄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산업발달로 소비시장이 확대되자 중하류층들도 검소한 습관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광고와 매스 미디어가 결탁하여 중하류 계층을 현혹하여 저축을 그만두고, 사고, 소비하고, 낭비하고 파괴하라고 권장했다...(중략)..그래서 중하류의 계층내 신분추구자들간에는 이제 가장 잘 써대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명예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부자들은 재산의 재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세금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흥청망청 헤프게 써대는 소비행위가 위험스러운 행위가 되어, 다시 최고의 명예는 최대 소유, 최소 과시자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상류계급의 최고 명예 소유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을 않게 되자, 흥청망청 소비하도록 중하류 계층을 강요했던 압력도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중류계층의 젊은이들이 해진 청바지를 입고 흥청망청 써대는 소비주의에 저항을 하는 것은 이른바 문화혁명의 일종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류계급의 경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기술해온 바와 같이 호혜성 경제체제가 경쟁적인 지위추구의 형태로 해체됨으로써, 늘어난 인구가 기존의 토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번영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키모인들이나 부시멘족과 같은 종족들이 향유했던 물질적 복지와 실제 전혀 다를 바 없는 수준 혹은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인류가 기만당하고 착취당해 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던 전과정이 건강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의문에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이러하다. 즉 수많은 원시사회 사람들은 ‘노동을 덜어주는’ 새로운 생산기술은 실제에서는 생활수준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든 노동을 강요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산을 늘리려는 노력을 거부했고 인구밀도를 높이지 않았다.
-5,6,7,8,9 ‘포트래취’ 중..
10.
인간의 행위가 아주 작은 단편들로 찢기어 역사라는 화폭과 무관한 것이 될 때, 그 행위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11.
서양인들은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경제적 종교적 생활양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재미있는 인상을 받았다. 그건 언제나 원주민들이 너무 미개하고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혀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런 인상이었다. 이런 인상 때문에 분명히 얄리의 사례에 나타난 사실들이 왜곡 전달되고 있다. 얄리는 그런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얄리는 그 원리들을 자기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의 후견인들은 현대적 공장들의 공정을 시찰하고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여전히 화물신화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얄리가 유럽인들이 재화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는 더욱 자신과 자신의 종족들이 그 재화들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유럽인들의 설명을 인정할 마음가짐을 갖지 않게 되었다...(중략)..그러나 얄리는 부자가 되는 길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표준적인 유럽인들의 말이 계산된 기만이라고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상식을 갖고 있었다. 유럽의 대인들이 - 원주민들에게 요구하는 자기들의 모범적 인물상과는 달리 -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원주민들은 없었다.
-10,11 ‘유령화물’ 중..
12.
제자들로서는 메시아가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경배가 원한에 찬 전투적 구세주의 숭배가 아닌 평화의 구세주 경배여야 하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예수가 외형상 메시아적 권능이 없어 보인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되기 시작된 것은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진 후부터였다. 많은 제자들이 환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 환상들을 통해 제자들은 통상의 메시아들과 같은 자격-메시아는 꼭 승리해야 한다는-이 예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환상을 통해 영감을 얻은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그 자체가 예수가 거짓 메시아라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태인들에게 다시 한번의 절정의 기회를 주시어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 백성인가 증명해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여겨졌다. 사람들이 예수를 거짓 예언자라고 의심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이다.
-‘평화의 메시아의 비밀’ 중..
13.
A.D. 1000년에는 그런 날아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그 후 1480년 이후부터는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A.D. 1000년경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가 있다는 말은 악마가 조작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500년 후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은 악마와 손잡은 사람들이라고 공식 표명했다.
-‘빗자루와 악마의 연회’ 중..
14.
마녀사냥제도의 주된 결과는(숯으로 변한 몸뚱아리들은 차치하고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은 영주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단지 자기들이 마녀들이나 악마들의 희생물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네 집의 지붕은 비가 오면 새는가? 당신네 암소가 낙태했다지? 당신네 밭의 귀리가 잘 크지 않는다면서? 당신네 포도주가 시어졌다면서? 당신의 머리가 아프다고? 당신의 자식이 죽었다면서? 당신네 울타리를 부수고 당신을 빚에 쪼들리게 하고, 당신의 농토를 탐내는 자는 바로 당신의 이웃-마녀로 변한 당신의 이웃-이다. 빵 값이 올랐지? 세금이 치솟았지? 임금이 떨어졌다면서? 이제 극악무도하고 지긋지긋한 마녀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군. 백성들의 가공의 적들을 퇴치하자는 힘찬 캠페인을 교회와 국가가 시작했다.
..(중략)..
결국 마녀광이 지닌 실제적인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와 국가로부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들에게 전가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 괴물들의 환상적인 행위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들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대중과 사회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들이 되었다.
15.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가난한 자들과 무산자들을 단합시켰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그들간의 사회상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집단 소명감을 주었고 서로 ‘형제와 자매’로 느길 수 있게 했다. 이 사상은 유럽 전역의 대중들을 가동시킴으로써 그들의 에너지를 특정시간과 특정장소로 집중시켜 무산 영세대중과 사회의 정상에 있는 자들과의 대결로 유도해갔다. 이와 반대로 마법광란은 모든 저항할 수 있는 잠재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법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소외되게 했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법광란은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하고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가난한 자들로부터 박탈하였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14,15 ‘대 마녀광란’ 중..
16.
관념의 유희(head trip)나 일시적인 기분 같은 것으로는 착취와 소외를 야기하는 물질적 근거를 바꿀 수 없다.
-‘결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