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 우리는 매스컴이 길들여 놓은 경박한 방식으로나마 우리 나름대로 종말의 공포를 겪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무책임한 소비자 중심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이데올로기와 연대(蓮帶)의 종언을 찬양하면서, <마시자, 먹자, 내일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는 정신 속에서 그것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묵시록의 환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누구나 마귀를 쫓듯이 그 환영을 몰아내려고 애씁니다. 두려움이 클수록 그 노력은 더욱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그 환영을 유혈이 낭자한 스펙터클의 형태로 스크린에 투사하여 보고 즐깁니다. 그럼으로써 그 환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환영의 힘은 바로 그 비현실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략)..
달리 말해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종말론을 묵상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고, 실제의 종말은 책력으로 측정할 수 없는 차원으로 돌리는 게 마땅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세속에서는 그런 생각을 짐짓 무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하나의 강박 관념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편지 '새로운 묵시록에 대한 세속의 강박관념' 중..


 

2.
계시록들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주제는 일반적으로 현재로부터 도피하여 미래 속으로 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에는 현재의 세계 구조가 전복되면서 저자의 소망과 기대에 일치하는 완전한 가치 체계가 확고하게 수립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계시문학의 배후에는 억압받는 인간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직접적인 행동에서 출구를 찾기보다는 우주적인 힘이 지상에 내려와 적들을 섬멸해 주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계시록에는 유토피아를 향한 크나큰 열망과 현실에 대한 참담한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첫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편지에 대한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답장 '희망은 종말을 <궁극 목적>으로 바꾼다.' 중..


 

3.
사람은 개선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에 대해서만 잘못을 뉘우칩니다.

 

-첫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편지에 대한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답장 '희망은 종말을 <궁극 목적>으로 바꾼다.' 중..


 

4.
인류의 어떤 문명들에서 학살과 식인 풍습과 타자의 육체에 대한 모욕을 용인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문명들이 <야만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타자>의 개념을 부족 공동체 또는 민족에 국한시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군 병사들은 이교도를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를 타인들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류의 천년에 걸친 성장의 결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계명조차도 그것을 위한 때가 무르익고 나서야 비로소 표명되고 어렵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네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답장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중..

 


5.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면 살아 있는 아이의 심장을 빼앗을 각오까지 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답장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중..

 


6.
그런데, 당신은 세속의 모든 윤리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말씀이 없어서 근본적인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고 확고한 신념의 힘을 지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찌하여 용서하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을 권리를 비신앙인들에게서 박탈하려고 하십니까?

 

-네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답장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중..

 


7.
설령 그리스도가 단지 어떤 위대한 이야기의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두 발 가진 불쌍한 동물들-오로지 자기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동물들-이 상상하고 갈망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정말로 육화(肉化)하였다는 것만큼이나 기적적이라는 (기적처럼 신비롭다는) 점을 말입니다.

 

-네번째 대화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답장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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