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0
조지오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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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물학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소설!

'이 소설은 동물들을 부려먹는 못되먹은 인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라.'인 것이다. 인간도 지구상의 한 생명일 뿐이고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거나 할 것도 없는 존재이므로 인간과 동물은 평등하다는 것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생각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돼지들은 두발로 걷지 않던가!) 동물들도 인간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존재다. 이 소설은 나에게 러셀의 책 [인간과 그 밖의 것들]에 포함된 글인 '동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을 떠오르게 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인간의 이익이 동물들의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이유가 전혀 없으며 인간이 예술과 과학과 문학을 높이 치는 것은 단지 그것을 더 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물들은 각자가 잘하는 것을 인간의 그것보다 더 소중히 여길 것이다. 칠면조들에게도 크리스마스시즌은 평화와 친선의 시간일까?'

 

만약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위와 같은 제목에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세계사적 상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비지성인으로 봐야할까, 아니면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 봐야할까.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글은 작가의 의도대로 읽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이자 내용을 올바로 소화하는 길일까?

 

고등학교때 처음 읽었던 것 같은데, 친구가 빌려줘서 읽었던 것 같다. 그 책이 소담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고 나는 거기 실린 동물농장 서문(조지오웰이 직접 썼지만 24년 후에나 발견된)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옛 기억을 살려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읽기 시작해서 금방 다 읽어버렸다. 괜히 애니매이션으로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84]와 [동물농장]이 같이 있는 책을 샀으나 서문을 다시 읽고싶다는 생각, 갖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소담출판사에서 나온 동물농장을 따로 구입했다. 조지 오웰에 대한 평론가들의 글이나 작품 해설같은 것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는데,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져온 다른 판들을 보니 조지 오웰의 다른 글들(이것은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었다.)과 작품 해설같은 것이 읽고싶어졌다. 책을 읽을 때 앞의 머릿말이나 뒤에 붙은 역자의 말, 작품해설 등을 다 읽는 편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그것들이 '읽고 싶어서' 읽는다기 보다는 '있으니까' 읽는 느낌이었는데, 이 소설의 경우는 무척이나 달랐다. 아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작품만 읽고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1984]도 마지막 반전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이 소설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긴 하지만)돼지들이 두 발로 걷는 모습, 인간과 돼지의 얼굴이 구분이 안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영국의 독자들이 뽑은 20세기를 움직인 10권의 책에 조지 오웰의 책은 무려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이런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두 작품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다음은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메모해둔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스노우볼의 축출 이후 '동물농장'에서는 토론이 금지된다. 의사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는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 특정 성향의 집단이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를 논하지 말자. 그보다 개개인의 태도부터 살펴보자. 단적으로 말해 ('우리'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우리는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입을 틀어막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고?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진다면 크게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면 교육의 효과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 이 문제는 움베르트 에코의 책을 다룰 때도 언급되었던 '관용'의 문제다.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럽다. 어느 누가 자기 얘기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반대를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가?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은 교육되어야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 서문에도 인용된 볼테르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나는 네가 말하는 바를 증오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네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겠다." 이쯤되면 알겠지만 이거 정말 쉽지 않다.

나폴레옹은 공포를 이용했다. 따로 교육시킨 개들을 통해서는 물리적인 공포를 조장했다. 다음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이다. 인간과 축출된 스노우볼이 외부의 적 역할을 한다. 내부의 적은 철저하게 숙청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냉전 체제를 생각했다. 한국도 미국도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삼아 내부 구성원의 단결과 충성을 보장받았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금 미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떤가? 흔히 '펜타곤 시스템'이라 불리는 체제가 붕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 '적'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기억의 조작'이 있다. 그저 머리가 좋지 못한 어리석은 동물들의 이야기일까? 경험적으로 기억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연인 사이에도 추억은 다르게 적히게 마련인 것이다. 영화 [오!수정]을, [메멘토]를 보라. 우리의 뇌는 외부의 자극과 유도가 있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동물들이 알았던 칠계명은 조금씩 달라져 자신들의 멍청함을 자조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스노우볼은 '소 외양간 전투'에서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운 배신자가 된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들이 싸워 온 것은 결코 이런 것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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